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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유럽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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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롱 Jan 27. 2021

위로의 빵 한 덩이

소울 푸드는 사치였던 시절

아일랜드 대학 시절, 우리 학교 구내식당은 정말 맛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나치게 익혀서 퍽퍽한 닭가슴살에 정체 모르게 으깨 놓은 야채 등을 함께 곁들여 한 끼 식사라고 했다. 가끔은 쌀밥도 나온다. 우리나라의 조리 방식과는 상당히 다르지만. 쌀을 삶아낸다고나 할까? 폴폴 날리는 쌀도 아니고 오동통한 쌀알임에도 불구하고 찰기, 전분기가 없다. 냉동 야채를 데우고, 시판 소스를 한통 쏟아부은 것 같은 고기도 있다. 라자냐도 단골 메뉴였다. 대량 조리에 최적이라는 이유여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불어 터진 라자냐에 샐러드가 아닌 칩스 (감자튀김)을 곁들여 하루 먹을 탄수화물 할당량을 한방에 끝낼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거의 모든 메뉴가 10유로였다. 그 비주얼에 10유로라니! 도저히 그 밥을 사 먹을 수 없었다. 10유로가 소소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때 10유로는 내게 아주 큰돈이었다. 1800원까지 치솟은 환율을 보고 1유로에 2천 원이라고 생각하며 살았고, 5유로짜리 기다란 샌드위치를 사면 배는 살짝 고파도 아껴두었다가 두 번에 나눠먹곤 했다. 학교 식당에서 비싼 밥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불행한 것은 아니었다. 이유는 단순했으니까.


'맛없는 것에는 돈을 쓰기 싫어.'


먹는 게 늘 중요했던 나에게 점심시간이 시련으로 다가왔다. 뭔가 한 끼 배부르게 먹고 싶었다. 게다가 이곳은 여름조차 으슬으슬 추운 날씨란 말이다. 물론 이건 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조금만 햇살이 고개를 든다 싶으면 체감온도가 낮아도 반팔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니 말이다. 교실을 둘러보면 항상 내가 제일 두껍게 입고 있었다. 한 번의  식사를 한다는 건 배가 고프니 먹는다는 의미로 끝나는 게 아니다. 식사가 몸을 데워 준다는 것을 이곳 생활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다. 허한 배를 초콜릿으로 채우기도 했다. 그래도 허기졌다. 무엇보다 학교에서 하루 종일 보낼 힘이 나질 않았다. 2.7km를 걸어 학교에 도착하면 당 떨어진다고 해야 하나. 현기증이 났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카페테리아에서 근사한 버터 향이 난다. 하얀 유니폼을 단정하게 입은 아주머니가 갓 구운 빵을 카운터에 내어 두셨다. 향기에 이끌렸나 갑자기 사람들이 우르르 줄을 선다. 눈치 볼 새도 없이 뭔가 싶어 궁금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같이 줄을 섰다. 모두가 그 같은 빵을 하나씩 샀다. 대부분의 아이리쉬가 그렇듯 티 한잔도 시키고 말이다. 나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메뉴로 주문해 보았다. 라즈베리가 콕콕 박혀있는 한 손에 가득 찰만한 커다란 한 덩이였다. 이게 뭐길래 줄까지 서나 의심하면서 사긴 했다. 의문이 확신으로 가득 차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와! 이걸 위해서라면 매일 1시간씩 일찍 올 수도 있겠어!'


그리고 그 빵의 이름이 스콘이라는 것도 그 날 처음 알았다. 누구에게나 주머니 가벼울 적 먹던 추억의 음식이 있을 것이다. 저렴해도 맛있어서 기분 좋게 배를 채울 수 있는 '위로의 음식' 말이다. 스콘이 내겐 딱 그랬다. 빵을 만난 이후로 학교 식사에 대해 불평하는 일이 적어졌다. 따뜻한 스콘과 밀크티가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한 끼를 먹고 나면 든든하게 오래오래 배부른 데다 입에서 마늘향이 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소울 푸드는 없었지만 더 강력하게 내 마음을 채워주는 빵이 되었다. 마음이 허전할 때마다 배가 고플 때마다 나는 스콘을 먹으러 갔다. 커다란 빵 한 덩이를 반으로 갈라 버터를 듬뿍 바르고 한입 베어 물면 다른 행복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그시절의 스콘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삼단 트레이에 정갈하게 담긴 에프터눈 티로 종종 사치 부리기도 했다. 스콘이 나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좋아하는 한 끼. 옛 추억 덕에 버킷리스트에도 한 가지를 추가했다. 런던의 아주 멋진 티 전문점에 가서 에프터눈 티를 하는 것 말이다. 그곳에서는 최고의 스콘을 맛볼 수 있을 테지! 마드리드도 날씨가 점점 추워져서 밀크티가 생각나는 계절. 자연스럽게 떠오른 건 바로 그 메뉴였다. 커다랗게 잘라 갓 구워낸 스콘.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먹고 싶다. 먹고 싶다.


그래서 찾은 곳은 마드리드 살라망카 지역에 위치한 Living in London이라는 영국식 티 살롱이다. 예약이 필요한 줄도 모르고 들어갔더니 사람이 가득 모여 티 한잔과 티 푸드 트레이를 앞에 두고 수다 삼매경이다. 신기하게 스페인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런 걸 즐기고 있다니 한국이었다면 분명 내 나이 또래의 여자들만 가득했을 것 같은 가게. 오늘도 문화 충격에 한 가지 에피소드가 추가되었다. 유명한 곳은 늘 예약해야 한다는 불문율을 오늘도 배우고 아쉬운 마음 가득하지만 테이블에 앉아 분위기를 즐길 여유도 없이 스콘만 사 왔다.


이젠 집에서도 종종 스콘을 굽곤 한다. 의미 있는 음식을 아기들도 함께 좋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게다가 오븐을 켜면 부엌 전체가 훈훈해지고 고소한 향기가 폴폴 퍼지니까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 같다. 이제는 조금 컸다고 구내식당 가격이 더 이상 비싸 보이지 않고 스콘 정도야 식구 수대로 사도 지갑이 텅 비진 않을 만큼의 여유가 생겼지만. 첫 한입 그때의 감동은 다시 찾아오지 않아 아쉬울 때가 종종 있다. 어느 시기에게나 소울 푸드는 필요하니까. 마드리드에서도 하나 정도는 찾았으면 좋겠다.  



Living in London @ Madrid (2018)



집에서 구운 스콘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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