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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깅여름 Jul 24. 2023

신(新)기록

매일 새로운 일 (1) 도로주행

나이가 들면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 것일까?

3n살인 나는 요즘 시간이 정말 쏜살처럼 빠르게 지나가버리는 게 아까워 어쩔 줄을 모르겠다.

 

새로운 길을 걸을 때 도착지까지의 시간은 예상보다 오래 걸린다. (혹은 그렇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그 길이 더 이상 새로운 길이 아닌 때가 되면 금방 도착한 것처럼 느껴지고 실제로도 그렇다. 두리번거리거나 헤매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겠지.

시간도 마찬가지 아닐까?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일이 없고 생길지라도 무서워서 피한다. 그러다 보니 세월이 속절없이 빠르다. 나는 새로움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 되도록이면 낯선 환경을 피하려 했고 변화보다는 익숙함을 택했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왔는데, 문득 이제 와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너무 아까워졌다.


그래서 결심했다, 매일 새로운 일을 하나씩 하고 기록하기로.

매일은 다르게 기억되고 시간도 아주 조금은 천천히 쌓일 것이다.


2023년 6월 1일 

오늘의 신(新)기록 : 도로주행


나는 잠깐의 인생 방학 중이다. 거창하게 포장했지만 사실 13년을 회사원으로 살아왔고, 현재는 백수다. 

회사를 왜 그만두었는지에 대해서는 너무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 추후 얘기하기로 하고 무튼 백수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무조건 운전면허를 따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학원에 등록하고 필기시험, 장내기능시험을 합격하고 오늘 도로주행을 했다. 생각보다 심장 터지게 떨리지는 않지만 손에는 자꾸만 땀이 났다. 신호 대기 중, 선생님이 물었다. 


"왜 여태 운전을 안 했어요?"

"필요 없기도 하고 좀 무서워서요." 

" 더 어렸을 때 했으면 잘하고 다녔을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이 나이 들면서 운동신경이 다르거든."

" 네... 그러게요. 히히."


수능이 끝나면 다들 운전면허를 따던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당장 운전할 것도 아닌데 왜?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10년이 훌쩍 지나고 서울에서 뚜벅이로 살다 보니 큰 불편함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몰랐겠지 차가 있어봤어야 편한지 불편한 지 알 것 아닌가.


나는 굉장히 온실 속 화초, 착한 아이 콤플렉스로 무장한 채 겉모습만 어른인 채로 할 수 있는 것만 열심히 하며 살아왔다. 늘 이러면 안 될 것 같은 막막한 마음을 애써 모른 채하며 막연하게 부모님을 대신할 누군가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내가 잘 모르고 두려워하는, 어른이라면 해결해야 할 문제 - 투자, 보험, 부동산, 결혼, 운전 등- 를 해결해 주리라 생각했다.

 

그런 내가 운전면허를 따겠다고 다짐한 것은 심리적 독립을 겪으면서였다. 흑색종이 의심된다는 의사의 소견을 들었는데 아무에게도 말할 곳이 없었다. 지방에 계신 부모님? 아직 정확한 것도 아닌데 말 못 하지, 걱정만 할 거야. 언니? 언니는 중국에 살잖아. 그리고 건강염려증이 있어서 더 심하게 걱정할 텐데 안돼. 친구? 친구들은 좀 그렇지... 마음이 괴로워서 죽을 것 같은데 엉엉 울며 매달릴 수 있는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누가 나 좀 달래줬으면, 당연히 아닐 거고 괜찮다고 말해줬으면 했는데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밤을 보내고 검사결과 암이 아닌 것으로 확인을 받고서는 진료실에서 나와 펑펑 울었다. 그때 울면서 깨달았다, 내 인생은 오롯이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인생은 정말 혼자라는 것.


그 사건 이후 나는 나 자신을 책임지고 잘 지내기 위해 하고 싶고 해야 하는 일들을 리스트업 하고 도장 깨기를 시작했다. 주택청약 정리, 재테크 강의, 주식, 부동산 재계약, 주기적인 건강검진, 미루던 사랑니 뽑기, 이직 등. 그리고 그중 운전이 있었다. 


그동안 나는 늘 누군가의 자동차를 '얻어'타며 미안해하고 고마워했다.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 인생을 리드해 주기 바랐던 때에는 운전하는 남자친구 옆에서 음악을 고르고 김밥을 입에 넣어주며 그가 피곤해할까 봐 더 살갑게 굴었고, 회사 워크숍이라도 가게 되면 누구에게 태워달라고 해야 할지 눈치를 살피고 돌아와서는 꼭 기프티콘을 보내 부채감을 털어냈다. 


조금 거창하지만 운전을 배우기 시작하니 내 인생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다는 것이 더 와닿는 것 같다. 다음 주 도로주행 시험에 합격한다면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내가 원하는 때에 갈 수 있을 것이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병원도 가고, 피곤한 남자친구를 위해 회사 앞으로 퇴근길 마중도 가고, 혼자서 떠나는 제주도 여행도, 내 버킷리스트인 미국 서부 횡단도 할 수 있겠지. 그나저나 오른쪽 페달이 브레이크였던가요? 농담입니다. 




2023년 6월 1일 오늘의 신기록, 도로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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