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돌이는 왜 에세이를 쓰게 되었나
3월 중순부터 글쓰기 수업을 참석하고 있다.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를 쓴 정지우 작가가 운영하는 7주짜리 짧은 강의다. 7주의 기간 동안 2주에 한 번 씩, 총 세 편의 에세이를 제출한다. 수업을 같이 듣는 수강생들과 정지우 작가님이 내 에세이를 꼼꼼하게 읽고 각자의 관점에서 감상과 평가를 말해준다.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대학교 졸업 무렵까지는 매일 일기를 썼다. 초등학교 때 숙제로 매일 일기를 써내던 게 하루 일과로 굳어서, 잠들기 전에는 짧든 길든 뭐라도 적는 것이 그야말로 습관이 되어 버렸다. 직장인이 된 후에는 매일 쓰지 않지만, 뭔가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은 일이 있거나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는 일기를 적곤 한다. 학생 시절에는 일기를 적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혼날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어른이 되어서는 내가 원하고 필요 할 때 일기를 쓰게 되었다. 편한 옷을 입고 좋아하는 펜을 꺼내 들고 책상 위에 일기장을 펼치는 순간이 점점 좋아졌다. 정지우 작가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는데, 하얀 종이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인 것 같은 느낌이다.
일기를 쓰면서 특히 좋은 순간은,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이나 감정을 글로 옮겨 적을 때다. 머릿속에, 아직 글이나 말의 형태가 되기 전인 심상은 비눗방울처럼 약하고 가벼워서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빵 터져버리거나 휙 날아가버리고 만다. 비눗방울 막대를 요령껏 움직이면 예쁜 모양의 비눗방울이 만들어지지만, 기술도 없으면서 마구 휘저으면 비눗방울이 다 터져버리거나 거품이 보글보글 일어나는 이상한 모양이 되어 버린다. 나는 기술이 있는 편은 아니니까 대작 비눗방울 아트보다는 온전한 비눗방울 한 두 개라도 만드는 게 목표다. 머릿속에 뭔가가 떠오르면, 숨 죽이고 눈을 감고 비눗방울 막대에 집중한다. 욕심부리지 않고 살짝 불어서 비눗방울이 보오옹 피어나면, 그 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내 머릿속에 잠깐 떠올랐던 어떤 이미지가 글이라는 형식으로 종이 위에, 컴퓨터 스크린 위에 적절한 형태를 갖고 나타나는 것이 신기하다. 너무 좋아서 때로는 비눗방울들이 햇볕에 반짝이면서 살랑살랑 바람에 떠다니는 것을 한참씩 구경하기도 한다.
학교 다닐 때도 그랬고, 그 이후 직장 생활을 할 때도 대부분 레포트나 보고서 등 실용적인 글쓰기를 해오고 있다. 일기나 편지 정도의 개인적인 글쓰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글을 쓰는 목적이 뚜렷하고, 이미 정해져 있는 상태에서 글 작성을 요청받고, 글을 읽을 독자도 매우 제한적이다. 그래서 레포트나 보고서를 쓸 때는 비눗방울이 등장하지 않는다. 실용적 문서에는 심상이 등장할 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논리나 팩트를 누가 봐도 이해하기 쉽고 명료하게 적으면 된다. 물론 이 과정도 재미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과도 비슷하고 퍼즐을 푸는 것과도 비슷하다. 어려운 개념을 글로 정리해내는 성취감도 있다. 그러나 비눗방울을 불어 낼 때의 가슴 떨림은 없다.
나는 오랜 기간 일기를 쓰고 실용적인 글쓰기를 해왔지만, 개인적인 글쓰기와 실용적인 글쓰기가 구체적으로 이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최근까지 몰랐다. 일기를 쓸 때 특유의 섬세한 설렘이 있다는 것도 최근까지 인지하지 못했다. 그냥 일기를 쓰는 시간이 좋고 힐링이 된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작년부터 페이스북을 통해 정지우 작가님의 글을 접하면서, 정지우 작가님의 글 속에 비눗방울들이 방울방울 떠다니는 것을 보았고 글 속에서 글쓴이가 자신의 심상을 어떻게 다루고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를 반복해서 보면서, 내가 일기를 쓰면서 해오던 게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일기를 쓰는 시간이 나를 지키는 힘임을 알게 되었다.
글쓰기 수업을 신청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글 쓰는데 재능이 있지도 않았고, 내가 쓴 글을 특정한 독자가 아닌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고, 특히 실용적인 글쓰기가 아닌 에세이 장르는 낯설어서 내 이야기를 이토록 솔직하게 털어놓을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일과 중에서 가장 순수하게 행복감을 느끼는 순간들, 찰나지만 내 삶에 없으면 안 되는 순간들을 더 잘 느껴보고 싶어서 결국 신청 마감 시간을 몇 분 남겨두고 수업 신청서를 제출했다. 비눗방울 막대를 다루는 방법을 좀 더 배워보기로 한 것이다.
수업을 신청하고 나니 생각하지 못했던 기술을 하나 더 배우게 되었다. 매 수업 시간마다 같이 수업을 듣는 동료 수강생들은 내가 쓴 글을 꼼꼼하게 읽고 각자의 관점에서 감상과 의견을 들려준다. 이 시간을 통해 내 글은 단단해질 뿐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읽기에도 좋은 글이 된다. 힘들여서 만들어낸 비눗방울을 나 혼자 즐기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즐기려면 어떻게 할지 배우는 것이다. 이 소중한 경험을 흘려버리고 싶지 않아서, 각각의 의견을 한 편의 글로 정리하고, 내 글이 동료들의 의견과 함께 어떻게 나아져 가는지 그 성장의 기록을 남기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