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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향 Dec 14. 2021

의미가 없어도

<죽음의 수용소에서>와 <다가오는 것들>


 의미를 발견해야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그냥’ 한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스스로를 설득시켜야지 어떤 일들을 해낼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데에서 예상할 수 있듯 나는 이런 사람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은 늘 치열한 고민의 과정이었다. 졸업반일 때 좋은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하니, 한 선배는 자기는 ‘왜’ 보다는 ‘어떻게’를 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좋은 의사가 되어야지’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하는 사람보다는 평소에 ‘좋은 의사’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새벽에 응급실 콜이 올 때 나가기 귀찮고 졸려도 나가는 사람이 더 좋은 의사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 말은 나를 부끄럽게 했고, 자주 생각났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는 부분도 있다. 그 말은 ‘왜’를 어느 정도는 생각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인 것 같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이자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인 빅터 프랭클은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라고 하였다. 수용소에서도 의미를 발견하고 삶을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지점이 있고, 의미를 찾아내고 발견하는 것이 인간이 허무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하였다. 이 말에 어느 정도는 동의하지만(사실은 매우 동의하지만), 동의하고 싶지 않은 지점도 있다. 신은 감당할 수 있는 고통만 준다는 말을 들을 때 절망하는 어떤 사람들을 생각한다. 과연 모든 고통은 의미가 있을까? 아무리 찾으려 해도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고통도 있다. 그럴 때 고통은 의미를 발견하는 수단이 아닌 주체가 된다.


이럴 때면 ‘다가오는 것들’이라는 영화를 떠올린다. 철학 선생님인 나탈리에게는 남편의 외도, 아끼던 제자의 비난 등의 일들이 연 일어 일어나지만 그녀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묻지 않는다. 그저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고, 사랑하던 철학을 계속 사랑하며 살뿐이다. 사실 불행은 모두에게 닥칠 수 있으며, 나라고 특별히 더 운이 좋지 않을 확률은 충분하다. 하지만 모두가 나탈리처럼 이 사실을 덤덤히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나탈리가 삶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다가오는 것들'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철학으로 대변되는 정신적인 충만감이 있어서가 아닐까. 그녀가 철학 선생님이라고 해서 고통에서 어떤 철학적 의미를 발견하진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이 나를 배신하더라도, 그 모든 과정이 설령 의미가 없더라도, 수용하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외부가 아니라 나의 내면 안에 있다면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살아가는 의미는 여전히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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