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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향 Jan 30. 2023

헤매면서 생긴대로 살기

리베카 솔닛의 <길 잃기 안내서>

 우연히 유튜브에서 대치동 학원 강사가 진로상담을 해주는 영상을 봤다. 상위권 이과 학생에게는 익숙한 질문일 "의대인가 공대인가?" 라는 주제의 영상이었는데 요지는 결국 생긴대로 살게 되니 내 아이의 생김새가 어떤지를 잘 따져보라는 것이었다. 그분에 의하면 자아없고 무색무취의 아이는 의대에 가는 게 좋다고 했는데,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나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다. 대학생 때 잠시 만났던 남자친구에게 나는 의대에 와서 나라는 사람이 지워지고 의사로 만들어지는 게 너무 괴롭다고 했더니 "나는 그러려고 왔는데" 라고 답했다. 그 말을 듣고 얼마 뒤 우리는 헤어졌다.


유튜브 강사의 말에 의거하면 나 역시 생긴대로 길을 찾으면서 살기는 한 것 같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게 많고 불확실해서 싫다는 사람이 많은 과를 고른 선택도, 곁에 두는 사람들도, 관심사도 모두 한 지점으로 이어진다. 내 생김새는 '불확실을 더듬고 여기저기서 영감받고 확장시켜 사유하기를 좋아하는 철학자형 인간' 이다.


한 선배는 나보고 안타깝다고 했다. A,B,C.. 계속 산만하게 뻗어나가는 내 관심사를 언젠가는 하나로 모아야 깊어질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틀렸다. 나는 헤매고 확장되면서 깊어지는 사람이다. 기존에 내 앞의 나무만 볼 수 있었던 내가 산의 모양을 볼 수 있게 되고 저 너머의 능선을 바라볼 수 있게 될 때 가장 큰 충만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영원히 알 수 없는 진실에 갈증과 사랑을 느낀다. ‘길 잃기 안내서'의 리베카 솔닛의 말처럼 불확실성 속에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다. 이도 저도 아닌 곳, 이원적 세상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곳에 무언가가 있다. 산과 산 사이의 푸른빛을 분석하고 명명하는 것이 아닌 그 거리와 그 푸른빛 자체를 음미하며 넓어진다.


거기서 더 나아가게 된다면, 내 눈 앞의 풀냄새를 맡으며 동시에 저 너머의 능선에도 존재하고 싶다. 자신의 역사를 더듬는 동시에 밖으로 더 뻗어 나가는 리베카 솔닛처럼 나의 존재를 인식하며 동시에 세상을 인식하고 싶다. 과거에 존재하며 미래에 존재하고 싶다. 그 간극을 헤매며 존재하는 무언가가 삶이라고 믿는다. 앞으로도 길을 잘 잃고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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