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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soda Apr 04. 2016

제주도 겉핥기

2016년 봄 #1 첫째 날 도착

제주도를 가는 비행기를 탔다. 혼자였고, 일행과는 현지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 시각, 지금쯤 그녀는 제주 공항에 도착하여 커피를 마시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처음으로 가본 김포공항 국내선 청사는 혀를 내두를 만큼 복잡하고 붐볐다. 일요일 점심이라는 이 어중간한 시각에 국내 어딘가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특히 제주로 가는 비행기는 여기서도 저기서도, 심지어는 몇 분의 간격도 두지 않은 채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출발 시간이 다가오자 길게 늘어선 줄의 끝으로 가서 섰다. 천천히 비행기에 올라탔을 때에는 이미 사람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었다. 웬만한 외국으로 가는 비행기만큼이나 큰 3-4-3 배열의 비행기였지만, 아마도 빈자리가 없이 꽉 차 있을 것 같았다.


웹 체크인을 하면서 복도 쪽 자리를 미리 지정해 두었는데, 옆에는 중년 남성이 앉았다. 그는 탑승 마감 시각이 다 되어갈 때 들어왔는데, 커다란 배낭을 짐칸에 실으려다가 하마터면 내 머리를 후려칠 뻔했다. 그 비행기에 탑승한 뒤 두 번째로 있는 일이었지만, 나는 평소답지 않게 뛰어난 반사신경을 발휘하여 두 번 다 그 공격을 무사히 피할 수 있었다.

다행히 머리를 맞지 않았음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그는 나에게 맞지는 않았으니 사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조금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 가방을 올리더니 무작정 자기 자리에 들어와서 앉았다. 그러고는 당연한 듯이 양쪽의 팔걸이를 모두 차지했다. 한껏 쩍 벌린 다리는 내 자리까지 침범해 들어왔고, 그는 신문을 접지도 않고 펼쳐 읽었다. 종류별로 모두 한 부씩 가져온 것 같은 그 신문을 바꿀 때와 십 분 남짓 잠에 빠져들었을 때를 제외하면, 그는 비행시간 내내 그 자세를 그대로 유지했다. 앞자리 의자 밑에 밀어 넣어둔 내 가방은 이미 그의 흙 묻은 운동화에 차인 지 오래였다.


저기, 다리 좀 오므려 주세요. 팔꿈치도 안쪽으로 좀 넣어주시고요. 제가 너무 불편합니다.

그렇게 말을 하면 의외로 쉽게 자세를 바꾸어 주었을지도 모르고, 그 사람은 그 정도의 양식과 배려심은 있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알고 있듯이 운송 수단에 나란히 앉은 모르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살짝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이고, 음악 볼륨을 높여서 앞쪽과 대각선 뒤쪽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차단하면서, 일부러 말을 하기에는 드물고 신경을 안 쓰기에는 꽤 잦은 빈도로 찾아오는 뒤에 앉은 아이의 의자 등받이 발길질을 꾹 참으며 40분만 참으면 된다는 주문을 되풀이했다.

아무튼 그런고로, 비록 시간이 흐를수록 적응이 되어서 그리 못 견딜 정도는 아니게 되기는 했지만, 제주도로 가는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나는 상당히 좋지 않은 기분을 맛보았다. 비행기가 서자마자 통화를 하며 복도로 나가려는 옆 자리 사람에게 길을 터주느라 복도로 나가 섰는데, "요즘 사람들은 영 참을성이 없어. 좌석 벨트 사인이 꺼지기도 전에 막 일어나서 짐 꺼내고 그러잖아."라는 옆 옆 자리 여자들의 대화를 들었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간에 승무원에게 자리에 일단 좀 앉아달라는 핀잔을 먹기도 했고.


공항으로 내려와서 이미 한 시간 전에 도착하여 나를 기다리고 있을 지인 H에게 전화를 걸었다. 뭔지 모르게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십 몇 년 전에 제주도에 왔을 때에는 배를 타고 왔고, 연한 물 색깔을 보며 제주도에 왔다는 걸 실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비행기로 공항에 내렸기에 당장 내가 어디에 무엇을 하러 왔는지 미묘하게 어리벙벙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어리벙벙한 상태로 공항 밖으로 나갔다. 일단 늦은 점심을 먹고 숙소에 짐을 가져다 놓은 뒤에 어디를 갈지 의논해볼 작정이었다. 숙소 근처에 먹을 곳이 없다는 것은 조사 결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까운 식당까지 택시를 타고 가기로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때 우리에게는 버스를 탈 수 있다는 발상이 없었다. 우리는 택시 정류소 앞에서 잠시 어느 가게를 갈지 의논을 했는데, 그러는 동안 두 팀이 우리보다 먼저 택시를 타고 떠났다. 어중간한 시간대라서 줄은 없었고, 우리는 가게를 정한 뒤에 세 번째로 서 있던 택시에 올라탔다.

문을 열기 전에 H는 걱정스러운 듯,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무 가까워서 아저씨가 안 좋아하실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죠."

그 말에 대해서는 별 생각도 없이 택시를 타고 목적지를 말했을 때, 예기치 못한 엄청난 제주 도착 환영인사가 날아왔다.

"아, 정말, 한참을 저기 서서 의논하고 있더니 왜 하필이면 내 차를 타서."

"……."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순간 인터넷 위에서 떠도는 제주에 관한 각종 좋은 글들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를 전혀 좋아하게 될 것 같지 않았다. 첫인상이란 그런 거니까. 그리고 우리가 멋모르고 정한 숙소의 위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6~7천 원 대 요금의 거리를 택시로 이동해야 했을 때마다, 그 직전까지 보았던 제주의 좋은 풍경이나 좋았던 느낌 등이 싹 날아가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래서 다들 자동차를 빌리는구나 싶었던 거다. 단거리 손님이 걸려서 재수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면, 우리가 내리고 나서 혼잣말로 투덜거리면 안 되는 건가. 비슷한 사정의 동료에게 하소연하면 안 되는 건가. 우리에게 대놓고 그렇게 면박을 준다고 해서 당장 우리가 그 택시에서 내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생각을 해보긴 했지만, 아무리 내가 그들이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길 바란다 해도 그들에게는 그래야 할 의무도 없을뿐더러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건 순전히 그들의 선택의 문제다. 그리고 내가 그들의 말을 듣고 기분이 상하든 말든, 그들의 입장에서는 하등 상관이 없다. 내 기분이 상한다고 제주도 관광객이 줄어들 리도 없고, 애초에 그들 개개인이 제주도 관광객이 늘어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입장인지도 나로서는 알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뭐 그런,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생각을 하며 택시 뒷자리에 불편한 마음으로 앉아 있었더니, 곧 식당에 도착했다. H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택시에서 내려서 얼떨떨한 기분으로 식당에 들어간 뒤, 얼떨떨한 기분으로 밥을 먹었다. 여행을 하는 기분이라기보다는 모르는 동네에 간단하게 밥을 먹으러 온 기분에 가까웠다. 제주도의 특징은 전혀 드러나지 않지만 그래도 나름 먹을 만한 정식을 먹고 나서, 이제 버스를 타고 숙소로 가기로 했다. 택시비가 비싸게 나올 것 같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솔직히 나는 택시를 타지 않을 수 있다면 타고 싶지 않았다.


2박 3일의 제주도 일정 중에서 가장 많이 이용했던 702번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남짓, 저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다가 "젊은 사람이 예의가 없어!" 하는 할아버지의 호통 소리에 잠이 깼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H가 말하기로는 버스 통로에 서 있던 젊은 커플의 가방이 할아버지의 머리에 맞은 모양이었다. 그들이 계속 혼이 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내가 약간 마음이 불편해졌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니 때마침 벚꽃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에 여행 날짜를 잡았을 때 우연히 제주의 벚꽃 개화 시기와 겹친다는 걸 알고 기뻐했는데, 활짝 핀 것은 아니라도 제법 꽃망울이 벌어진 상태였다.

나무에 따라 꽃이 핀 정도가 다르다.


도로에 서 있는 나무마다 꽃이 핀 정도가 달랐는데, 우연히 꽃이 활짝 핀 나무를 만나도 손이 굼떠서 제대로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이틀 뒤에 공항으로 돌아올 무렵이면 꽃이 많이 펴 있을 테니 그 기회를 노리기로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포기했다.


예약해둔 숙소에 가기 위해서 낯선 곳에서 버스를 내렸다. 어떤 시골 마을 어귀 같은 풍경이었는데, 실제로도 막 지었거나 한창 짓고 있는 펜션이나 호텔 따위가 종종 눈에 띄는 걸 제외하면 정말 시골 같은 풍경 속을 한참을 걸어간 뒤에야 호텔이 나왔다. 길에는 우리 말고 어떤 할머니가 길을 가고 있을 뿐이었는데, 도중에 그 할머니도 어떤 다른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 버리자 이제 우리 말고는 그 길 위에 아무도 없었다. 

아직 오후인데도 너무 하늘이 어두웠다.


지도에 나오는 도보 몇 분이라는 건 대체 어떤 다리 길이의 사람을 기준으로 책정된 것인지 몇 번을 궁금해하면서, 게다가 골목을 누비며 길까지 몇 번 헤매다가 우여곡절 끝에 호텔에 도착했다. 정식 로비로 이어지는 길이 아니라 호텔 뒤쪽에 있는 직원들의 출입구를 통해(심지어 그곳에는 오늘 각 방에서 나왔음직한 쓰레기 봉지가 쌓여 있었다) 호텔로 들어갈 무렵에는 이미 나는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그리고 이 호텔은 감히 운전을 못하는 자가 함부로 예약해서는 안 될 곳이라는 걸 깨달았다. 버스 정류장에서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면 가로등도 하나 없는 길이 이어지는 부분도 있는 듯했고, 따라서 그 말은 우리가 해가 진 뒤에 돌아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택시를 타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체크인을 끝내고 둘이 쓰기에는 너무도 넓은 방으로 들어왔을 때의 나는 사실 약간 의욕을 잃은 상태였다. 밖에 나가지 말고 이대로 호텔 방에서 늘어져 버릴까 생각했지만, 고작 2박 3일의 일정인데 하루를 이렇게 낭비할 수는 없다는 의무감에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우리는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밖으로 나왔고, 애월로 가기 위해서 택시를 부르러 로비로 내려왔다. 제주도에 도착해서 몇 번 했을지 모를, "다음에는 운전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와야 되겠어."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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