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brillo National Monument 카브리요 국립 기념비.
후안 로드리게즈 까브리요(Juan Rodriguez Cabrillo)는 그가 모험한 바다만큼이나 신비로운 사람이었다. 그에 대하여 비록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까브리요(Cabrillo)는 기록에 남겨진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지금의 미국의 서해안을 발견하였다는 것이고, 그의 항해는 스페인 첫 탐험 시대의 서막을 올렸다.
까브리요는 콜럼버스(Columbus)가 미국 대륙을 발견한지 50년 후, 웅장한 항해에 나섰다. 까브리요는 배 3척을 이끌고 멕시코 북쪽에서부터 스페인의 왕과 뉴스페인 (현재 멕시코) 의 총독을 위하여 향신료가 풍부한 아시아(Spice Islands)와 미지의 아니안 해협(Strait of Anian), 그리고 금맥을 찾아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가는 미지의 바닷길을 항해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확실히 까브리요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 16세기 역사가인 안토니오 데 헤레라(Antonio de Herrera)는 까브리요를 포르투갈인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일부 역사가들은 까브리요가 스페인 출신이라고 오랫동안 믿고 있었으며, 2015 년에 발견된 일련의 문서는 그 의견에 힘을 주었다. 후안 로드리게스 까브리요 (Juan Rodriguez Cabrillo) 라는 증인이 1532 년 소송에서 본인은 스페인 코르도바 지방의 팔마 데 미세르질리오 (Palma de Micergilio (now Palma del Río), a town in the province of Córdoba in Spain) 현재의 팔마 델 리오)에서 태어 났다고 선서했다는 것이다. 증인의 전기에 대한 다른 세부 사항은 탐험가 까브리요에 대한 알려진 사실과 일치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포르투갈에는 그의 까브리요의 출생지라고 주장하는 지역이 여러 곳이 있으며 특히 라펠라 (Lapela ) 라는 지역에는 로드리게즈 까브리요 ( Rodrigues Cabrilho ) 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이 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그가 태어났다는 오래된 집을'아메리칸의 집 Casa do Americano (House of the American)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까브리요가 썼던 향해일지의 원본은 없어졌지만, 까브리요 여행의 상세한 설명과 그의 죽음에 상황들은 당시 탐험단이 멕시코에서 돌아온 후, 편집하고 수집해 놓은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까브리요는 미국 대륙에 1520년에 도착하였다. 그는 허르낸 코테즈(Hernan Cortes) 가 아즈텍 (Aztec) 의 수도 테노치티란 (Tenochtitlan) 을 정복하던 때의 석궁 사수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후, 까브리요는 과테말라를 정복하기 위해 나선 페드로 데 알바라도 (Pedro de Alvarado) 를 따라갔다. 야망과 학식이 풍부했던 까브리요는 콰테말라에서 금광과 조선업을 통하여 멕시코에서 가장 부유한 정복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과테말라를 정복하여 총독이 되었던 알바라도 (Alvarado) 가 원주민들의 반란에 의하여 사망하자 뉴스페인의 총독인 안토니오 데 멘도자(Antonio de Mendoza) 는 까브리요에게 샌 살바도르(San Salvardor), 라 빅토리아(La Victoria), 샌 미겔 (San Miguel) 등 3척의 범선 지휘권을 주며, 뉴스페인의 북쪽으로 떠날 것을 제안하는데, 1542년 6월 27일, 안토니오 데 멘도자의 후원을 받은 까브리요는 현재 '아이티' 의 나비다드 (Navidad) 북쪽을 시작으로 뉴스페인의 해안을 찾아 떠났다.
1542년 9월 28일, 까브리요의 소함대는 "닫혔지만 아주 좋은 항구" 라고 묘사된 항구에 도착했다. 해변가
엔 많은 나무들이 언덕과 계곡에 가득했다. 까브리요는 은빛 해안에 도착하자 이 지역을 샌 미겔 (San Mig
uel) 이라 불렀고, 후에 이곳은 지금의 샌 디에고 (San Diego) 가 되었다. 그는 폭풍을 피하기 위해 샌 미겔에서 6일을 머물고 난 뒤, 다시 항해를 시작하였다.
탐험대는 섬들을 발견하였는데 까브리요는 그의 배였던 샌 살바도르(San Salvador)와 라 빅토리아(La Victoria)의 이름을 따 산타 카탈리나 (Santa Catalina) 와 샌 클레멘테 (San Clamente) 라 불렀다. 원정은 육지를 향해 떠난지 하루만에 지금의 샌 페드로 만 (San Pedro Bay) 에 들어섰다. 항해일지에 따르면 수평선이 안개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까브리요는 이 곳을 '안개의 만' 이라는 뜻의 '바히아 데 로스 퓨모스(Bahia de Los Fumos)' 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바로 지금의 로스 엔젤레스 (Los Angeles) 가 되었다.
그의 항해는 순조롭지 않았다. 샌 페드로만을 지나 11월 일행은 물을 얻기 위하여 현재 캘리포니아 산타 바바라 인근의 채널섬 (Channel Islands) 의 하나인 아일라 데라 포세션(Isla de la Posesion) 이라고 불리는 섬에 도착하였다.
한 설명에 따르면 까브리요가 자신의 일행이 츄마시 (Chumash) 인디안들과 싸움에 말려들자 그들을 도와주러 가는 길에 배에서 뛰어내리다가 다리가 부러졌다고 한다. 하지만, 또 다른 기록에서는 까브리요가 라 포세션의 답사를 가던 길에 사고로 팔이 부러졌다고 하며, 다른 정설은 까브리요가 이끄는 탐험선이 산타 카탈리나 섬에 정박하여 샌 살바도르의 수리를 하던 중 퉁바족과의 싸움에서 부상을 당하여 며칠 후 괴저로 사망한 까브리요를 그의 두번째 사령관이 채널섬 중 한곳인 샌 미겔섬에 매장을 했다고 한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복잡한 문제들이 생겨 1543년 1월 3일, 까브리요는 항해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였고, 사망의 사유는 사고 당시 바로 치료하지 못하여 생긴 병균의 감염이라고 추측한다고 한다.
까브리요가 죽자 함께 항해를 하던 까브리요의 부하인 바툴로메 데 페레(Bartolome de Ferrer)는 까브리요의 유언을 받들어 연안지대를 찾아 북쪽으로 떠난다.
얼마나 멀리 갔었는지는 모르지만 오레곤주의 로그 (Rogue River) 강 지역까지 도착한 것 같다고 한다.
(지명이 없어서 후에 지은 지명으로 추측컨대,)
3월, 항해를 떠났던 배 3척 중 하나인 '라 빅토리아'는 폭풍에 휩싸여 사라졌고 3주 후에 페레와 탐험대는 원정을 포기하고 1543년 4월 14일 나비다드로 다시 돌아왔다.
탐험은 800마일 이상의 해안선을 스페인 본토에 선사하였다. 향신료섬들의 항로, 아니안협로, 또는 금을 찾지는 못했지만 까브리요의 업적은 큰 가치로 오래 남았다. 그의 항해는 경계표, 바람, 물의 흐름등을 알려주는 지침이 되어 훗날 탐험대들의 길잡이가 되었고 22년이 지난 후, 스페인과 필리핀을 잇는 동서 횡단의 교역로를 형성하여 마닐라 겔리온을 위한 길을 열었으며 세계 대륙을 연결하였다. 이렇게 스페인의 항해는 식민지의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까브리요는 현 멕시코 위 미서해를 따라 북쪽으로 스페인의 땅을 넓히려 항해하면서도 그 땅들은 이미 누군가에게 정복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재 샌 디에고가 된 항구로 접어들면서 그는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여럿 쿠메에이 (Kumeyaay"Ipay & Tipay") 인디언들이 해안가에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들은 긴 머리를 하고 있었으며 몇몇은 딴 머리와 깃털 밑 조개껍질등으로 장식하였다고 기록했다. 남자들은 수달, 물개, 사슴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망토를 입고 있었으며, 창을 들고 말을 타고 갑옷을 입은 듯한 그림을 그리고, 스페인 군인들의 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 쿠메에이 인디안들은 이미 다른 스페인 군인들에게 땅을 점령당했고, 학살당했다는 것을 항해일지에 적었다.
까브리요는 캘리포니아에서 처음 만난 아메리칸 원주민인 쿠메에이족에게 선물을 주며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는 항해일지에 인디안들이 풍요로워 보였으며 갈대로 만들어진 카누로 먼 바다까지 낚시를 나갔다고 적었다. 샌 디에고 해양 박물관에 남아있는 1857년도 판화가 보여주듯이 쿠메에이 인디안들은 주변 환경을 잘 이용하며 살았다. 그들은 바구니, 도자기, 전복등 패류들을 이용하여 보석을 만들어 이웃들과 거래를 하기도 하였다.
'카브리요 내셔널 모뉴멘트' 는 1913년 '후안 로드리게즈 카브리요( Juan Rodriguez Cabrillo)' 의
항해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
드넓은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서 끝이 보인지 않는 거대한 태평양을 바라보는 그의 동상은 크기도 웅장하다. 뉴멕시코를 떠나 처음 닻을 내린 이곳에 '샌 미겔'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면서 미서부 해안을 처음 발견한 자로 등록이 되는 영광이 주어진 그다. 그의 발견은 탐험 당시 사망으로 인하여 당시에 거의 눈에 띄지 않았으므로 그이름의 명성은 그 시대에는 대단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까브리요는 이제 캘리포니아 해안을 여행한 '최초의 유럽인'으로 기억되며 캘리포니아의 많은 공원, 학교, 건물 및 거리가 그의 이름을 따랐다.
그가 '안개의 만'이라 이름 지었던 로스 엔젤레스 지역의 일부인 롱비치(Long Beach) 와 샌 페드로 (San Pedro) 의 항구는 세계에서 가장 바쁘다고 손꼽히는 항구로 샌 페드로에 그의 이름의 까브리요 해변과 까브리요 해양 수족관 Cabrillo Beach, Cabrillo Marine Aquarium ) 이 있다.
60년 후, 스페인의 탐험가 세바스챤 비스카이노 (Sebastian Viscaino) 가 탐험선을 이끌고 샌 디에고 만으로 상륙해서는 샌 미겔이 아닌 샌 디에고(San Diego)라고 지명을 붙이는데, 배가 상륙한 날짜 가까이에 태어난 성인, 디에고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그가 유럽인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와서 그 시대의 유럽인들처럼 야망이나 야욕으로 정의롭게 살지않은 정복자였어도, 그는 탐험가로써 죽어서 크게 이름을 남긴 건 사실이다.
까브리요 항해 시 플래그쉽이었던 샌 살바도르(San Salvador)
샌 디에고 만 (San Diego Bay)
Naval air Station North Island. 멀리 고층빌딩이 보이는 곳은 샌디에고 다운타운.
해군기지로는 완벽한 조건을 가졌다는 샌디에고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