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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가은 Aug 31. 2019

만들고 무너뜨리고 또 다시 쌓아 올리는 우리들의 집

영화 ‘우리집’의 고군분투 촬영현장의 나머지 이야기들



안녕하세요. 영화를 만드는 윤가은입니다. 

2019년 8월 22일 개봉한 영화 <우리집>의 제작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연장된 4화에서는 <우리집> 촬영 현장의 나머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영화를 보신 후 (혹시 모를 스포를 위해?) 이 제작기를 읽으시면 좀 더 재미있을 지도 몰라요! 

그럼 부디, 즐거운 감상이 되시길 바랍니다-! 








1. 사라지는 배역들, 쌓여가는 미안함


태풍 이야기를 하긴 해야되는데....... 지금 밖에 천둥번개가 치고 비도 오고 갑자기 그 때 생각이 나서 정신이 혼미해진다. 잠깐 쉬어갈 겸 시나리오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잠깐. 이게 쉬어갈 이야기는 아닌데?)


사실 내게 <우리집>은 들여다보면 볼수록, 손을 대면 댈수록, 어렵고 복잡한 지점들이 계속 발견되는 이상한 작품이었다. 물론 시나리오를 수정할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해 더 전전긍긍했던 까닭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전작에 비해 처리할 정보도 많고 나름 여러 사건들이 서로 얽혀야 해서 더 어렵게 느껴진 것도 같다. 한 영화 안에서 두 가족의 문제를 함께 소화하는 게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작업이라는 걸 왜 쓰기 시작할 땐 전혀 알지 못했을까. 수정을 거듭하다보니, 각기 다른 두 가족에 대한 정보가 어느 타이밍에 얼마만큼 드러날 것인지를 조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고, 아이들이 각자의 가족 안에서 겪는 개별 사건들이 점층적으로 커지면서 서로간에 상호작용을 하도록 구조를 세워야 했다. 또 그 모든 요소들이 결국 감정적인 드라마 안에서 소화되어야 했는데, 내 단순한 머리가 이 오만 요소를 한꺼번에 소화하느라 계속 버퍼링이 왔다가 다운 됐다가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그렇게 프리 내내 열심히 피드백을 묻고 반영하려 애쓰며 밤낮없이 수정했다. 그리고 결국 10고가 넘는 수정을 한 뒤에야 현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도 그만하면 꽤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구조로 수정이 되었다고, 나름 선방했다고 내심 속으로 자부하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찍다보니 더 집중해야 할 이야기와 쳐내야 할 이야기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앞으로 절대 전면적인 수정은 없을 거라 생각했던 현장에서도, 매일 끝없는 현타와 멘붕을 겪으며 시나리오 전쟁을 치뤄야 했다. (언제 끝나?) 


+ 시나리오에 있었고 심지어 이렇게 열심히 찍었지만 결국 편집하는 과정에서 삭제된 장면. 사실 시나리오에선 하나에겐 지수(설시연 배우)라는 절친이 있었고, 지수 역시 또 다른 가족의 문제로 고민하는 친구였다. 시연이가 정말 좋은 연기를 해줬고 둘의 케미도 좋았지만, 삼총사의 이야기에 집중하다보니 결국 눈물을 머금고 삭제하게 됐다. (그냥 날 죽여2) 



도대체!!!! 시나리오!!!!!!! 


도대체 언제가 되야 시나리오를 잘 쓸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최소한 촬영 전까지는 어떻든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있어야 되는 게 아닐까! (사실 촬영 후에도 ‘편집’과 ‘믹싱’이라는 최종 수정이 또 남는다. 네버엔딩스토리~) 이번 작품도 결국, 직접 쓴 시나리오조차 그 정체를 처음부터 명확히 알아채기는 참 힘들다는 걸 여실히 깨닫는 과정이 되었다. 끝없이 다양한 의견을 묻고, 듣고, 소화하면서 이야기를 계속 재구성하는 과정 속에서, 또 그렇게 구성된 텍스트를 배우와 제작진들과 함께 실제 영상으로 구현하는 작업 속에서, 비로소 작품의 진짜 정체를 발견할 수 있다는 걸 다시금 처절하게 느끼는 경험이었다. (근데 사실 나만 이럴 수도 있다는 거)   



+ [우리들]의 조명감독님이셨던 이시현기사님께서 어렵게 연결해주신 편의점 장면도 역시 편집 때 삭제됐다. (난 정말 왜 이럴까) 그런데 우리 배우들이 시현기사님(일명 ‘앨리스 언니’)을 너무 좋아해, 언니는 이후에도 끝없이 우리 현장에 불려와야 했다. 


물론 시나리오의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건 작품엔 무지 좋은 일이다. 이야기의 구조와 디테일도 끝까지 붙들고 만지면 결국 더 튼튼하고 섬세해진다. 다만 이 모든 과정이 부디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마무리 되기만을 늘 바라옵고 원하올 뿐이다. 


촬영 중의 시나리오 수정은 절대 감독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프러덕션 전체가 함께 유연하게 고민하며 한 몸으로 움직여줘야만 가능한 일이다.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거나 어렵게 헌팅을 마친 장소가 사라지는 일 등의 뒷처리도 만만치 않지만, 갑자기 소품이 추가되거나 사용법이 바뀌는 등의 작은 수정도 관련된 수많은 스탭들의 계획과 노력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미 공들여 캐스팅한 배우들의 촬영 분량이 대폭 줄거나 없어질 때의 난감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특히 이런 저예산의 작은 영화에서, 작은 분량임에도 마음을 모아 함께 하기로 결정한 좋은 배우분들께 이런 뜬금없는 비보를 전하는 일은, 프러덕션 내에서도 가장 민망하고 죄송스러운 일 중 하나다. 영화를 하며 늘 겪게 되고 절대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소식을 전하는 프러덕션과 들어야 하는 배우들 모두 상처를 받게 된다. 특히 이번 경우는 내가 시나리오의 정체를 뒤늦게 알아 일어난 참사였기 때문에, 너무 창피하고 송구스럽기 짝이 없었다.   


+ 유미엄마역의 김수연 배우님과 유미아빠역의 김경환 배우님. 두 분은 무더웠던 유미집 현장에 간식을 잔뜩 사들고 놀러 오시기도 했다. 두 분을 정말 좋아했던 시아와 예림이가 촬영 준비 중 두 분을 보고 “우리 엄마아빠 왔다!”며 반갑게 소리를 지르며 뛰쳐 나간 기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어딘지 모르게 서로가 닮은 유미네 가족! <유미외전>을 찍어야 하나.... 


특히 유미의 부모님으로 캐스팅 되었던 김경환, 김수연 배우님께는 지금까지도 고맙고 죄송한 마음이다. 사실 촬영 중반까지는 유미 부모가 등장하는 클라이막스 장면이 살아 있었다. 긴 여행 끝에 돌아온 유미가 마침내 부모를 만나 마음을 터놓게 되는 매우 감정적이고 중요한 장면이었다. 그래서 프리 기간 동안, 오랜 고민 끝에 너무나 훌륭한 두 배우님을 만나게 되었고, 같이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고, 유미유진 자매와 친해지는 시간도 미리 가졌다. 하지만 촬영이 진행되면서 이야기가 가야할 방향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고, 어른들의 개입 없이 아이들끼리 서로 손잡고 힘이 되어주는 엔딩으로 더 마음이 흘렀다. 결국 제작진과의 깊은 논의 끝에 이 클라이막스 장면을 삭제하고 새로 쓰기로 결정했다. 전체 영화의 3분의 2가 되는 분량을 찍은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마지막 지방촬영을 위해 충남으로 향하는 연출부 차 안에서, 노트북을 펼치고 머리를 쥐어 뜯으며 두 배우분께 긴 메일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의 수정에 이르기까지의 상세과정을 구구절절 담은, 사실 반성문에 가까운 사죄의 편지였다. 그런데 배우분들께서 메일을 보시고는 그날 밤 바로 연락을 주셨다. 가장 중요한 장면이 수정되면서 역할 자체가 사라져버린 이 상황이 분명 황당하고 당황스러우셨을텐데, 너무나도 따뜻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수정된 방향을 깊이 이해하고 지지해주셨다. 두 분은 나를 위로해주시며 앞으로의 남은 촬영도 진심으로 응원해주셨는데, 이런 두 분의 마음이 너무 고맙고 죄송해 결국 늦은 밤 숙소에서 혼자 펑펑 울어버렸다. 어디에서 또 이런 분들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고, 더 좋은 인연으로 반드시 같이 해야지 굳게 마음 먹은, 너무나 고마운 날이기도 했다.


 + 영화 초반에 하나가 바라보는 여행가는 가족은 사실 유미네 가족이다. 하나는 유미 부모가 도배일을 하러 짐을 싸들고 가는 길을 삼촌과 유미와 유진이 배웅하는 뒷모습을 본 것. 튜브를 들고 있는 유미 삼촌(이태용 배우님)의 분량도 촬영 도중 삭제 되어 결국 삼촌과 부모님은 이 장면에만 등장하게 되었다.


+ 하나의 학교 친구들로 나온 (왼쪽부터) 김소은, 황시연, 설시연 배우. 리허설 초반 워크샵부터 함께 했고, 학교와 분식집 장면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즉흥극으로 만들어진 대사들이 빛나는 분식집 수다 장면이 있었는데, 이 또한 편집 때 울면서 삭제. 언젠가 공개할 날이 오면 좋겠다. 



어디 이것 뿐인가. 함께 고생하며 촬영은 마쳤지만 편집 때 흐름상 어쩔 수 없이 삭제해야 했던 장면에 출연하신 멋진 배우분들도 너무나 많다. 편의점 알바생으로 함께 해주신 정수지 배우님, 유미유진의 재밌는 삼촌으로 나와주신 이태용 배우님. 또 하나의 학교 친구들로 나온 설시연, 김소은, 황시연 어린이 배우님까지! 모두가 무더운 촬영장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해주신 분들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이런 배우분들을 담아내기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바쳐 움직여주신 스탭분들이 있었다. 


+ 대역죄인의 참회 현장? 은 아니고 헌팅중이었던 것 같은데, 나 왜 우리 스탭들한테 혼나는 거 같지....? 제가 잘못했어요. 앞으로는 진짜 잘 할게요. (매번 하는 소리지만 제대로 지킨 적이 없음)


아직도 가끔 이분들과 함께했던 현장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꿈을 꾼다. 그 장면들만 모아도 진짜 멋진 영화가 한 편 나올 것 같고, 나는 왠지 천국에는 못갈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정말이지 만감이 교차한다. 




2. 태풍이여, 오라!


프러덕션 내내 가장 마음을 졸였지만 정작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을 때가 있었다. 총 40회차의 촬영 중 20회차가 지나간 무렵, 무지막지한 비를 동반한 태풍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 (좌) 물놀이 장면 찍던 날의 반짝이던 하늘과 스탭들. (우) 태풍 소식에 긴장한 날의 침울한 하늘과 스탭들. 단 몇 일 차이로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해가 걷히고 세기말의 하늘이 되었다. 날씨 어플만 십수개를 깔아서 실시간으로 체크하던 나날들.


태풍이 온다는 소식에 제일 놀란 건 미술팀이었다. 유미집은 내외부를 분리해서 찍었는데, 외부의 옥탑 마당이 실은 풍경이 좋은 빌라 옥상을 섭외해 가벽을 세워 만든 세트였기 때문이었다. 그 많은 화분과 소품들은 다 어디에 숨겨둘 것인지는 둘째 치고, 옥탑 가벽과 커다란 평상이 비바람에 두드려 맞아 망가질까봐 초비상이 걸렸다. 무더위를 겨우 관통해 왔더니 이젠 태풍이라니.... 우리는 옥탑 가벽과 평상이 태풍에 날아가 마치 오즈의 마법사처럼  성북구의 하늘을 떠도는 어이없는 상상을 하며 웃다가, 또 그것들이 어딘가에 난데없이 떨어져 아찔한 사고를 일으키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쓰며 기겁을 했다가, 정말이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 (좌) 우리가 섭외한 옥상. (우) 미술팀이 만들어낸 옥탑 마당. 미술팀의 피땀 흘린 정성과 노력으로 집이 한 채 뚝딱 나왔다. 저 한 땀 한 땀 공들여 지은 집이 통째로 떠올라 태풍과 함께 하늘을 떠돌 상상을 하니 간이 타들어갔다. 


태풍이 서울을 관통하는 날, 나와 세훈피디는 모두 함께 옥상에서 가벽을 붙잡고 비바람 맞으며 밤을 새야 하는 건지, 아니 그런다고 과연 지켜질 수 있는 건지, 그걸 지킬 사람들은 또 무사할 지, 노심초사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의 숙련된 미술팀은 여러 가지 고민과 논의 끝에 옥탑세트를 단단히 고정하는 방향으로 결정했고, 휴차에 쉬지도 못한 채 더블 트리플로 안전장치를 해주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 밤은 모두가 잠을 이룰 수 없었지만, 다행히 옥탑 세트는 안전하게 지켜질 수 있었고 덕분에 촬영은 무사히 진행될 수 있었다.  


+ 그래도 태풍이 오기 전, 맑은 하늘 아래에서 기적적으로 찍을 수 있었던 노을 장면. 더위 때문에 폭풍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결국 찍지 못한 장면은 없었던 걸 보면, 그래도 날씨의 신은 우리 편이었던 것 같다. 그나저나 우리 촬감님, 비캠기사님 다 무릎 나가셨겠네. 최고 붐맨 금열이는 촬영 내내 저 자세 그대로 장장 삼십분을 버텨주었다. (계속 날죽여 시리즈)




3. 밤을 낮으로 만드는 기적 속에서 


태풍이 지나가고 옥탑 마당씬들을 무사히 소화한 뒤에는 하나집 내부의 촬영이 진행되었다. 하나집은 다행히 공간이 넓고 실내에 에어컨을 작동할 수 있어 전보다는 쾌적한 공간에서 보다 편하게 촬영을 준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집 장면이 대부분 밤 장면이었기 때문에 프리때부터 논의한 사안이 있었다. [우리들] 때와 마찬가지로 밤 장면을 낮에 촬영할 수 있는 방법들을 마련하기로 한 것이다. 성인배우들에게도 밤을 새워 중요한 장면을 연기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아직 10대인 나연과 지호가 촬영을 위해 몇 날 며칠을 낮밤이 뒤바뀐 채 생활하는 건 무리라는 판단 아래 내린 결정이었다.


+ 낮에 찍어도 졸릴 땐 자야 한다! 피곤해 스르르 잠든 지호에게 장난치는 주원선배님과 다해기사님.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기록하는 나연이. 한동안 나연과 지호가 서로 잠든 모습을 도촬하고 폭로하는 장난이 유행했는데 아무래도 지호가 진 것 같다. 잠든 지호를 찍은 사진을 제보(?) 받은 것만 7장이 넘는다. 지호야, 무슨 일이야.....? 


결국 정익중 조명감독님과 팀원분들은 급하게 휴차를 반납하고 하나집을 꽁꽁 싸매는 작업에 들어갔다. (우리팀은 맨날 돌아가며 쉬지도 못하고 ㅠㅠ) 촬영, 조명팀은 휴차 내내 빛이 새어 들어올 수 있는 모든 창에 암막과 실크천 등을 여러 겹 설치하고, 2층 창 밖에 조명을 설치해 직접 광량을 조절하며 장면에 필요한 시간대를 연출해보는 테스트 촬영을 진행했다. 다행히 실험은 성공적이었고, 덕분에 이후 모든 밤촬영은 편안한 낮 시간대에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하지만 조명팀의 고난기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 한낮의 푸르른 하늘을 뒤로 한 채 암막천으로 창을 막고 조명을 쳐야 하는 이런 영화적 상황이라니. 가장 자연스러운 연기를 위해 이런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연출해야 하는 게 가끔은 좀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 물론 실내에도 조명이 필요하다. 매일 집에서 보는 듯한 지극히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빛을 만들기 위해 최소 30분에서 많게는 2시간이 넘는 세밀한 조명 셋업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매 현장마다 새롭게 인식하고 깜짝 놀라게 된다. 


사실 이런 불편하고 힘든 촬영을 감행하는 게 제작적으로 꼭 효율적인 선택은 아니었을 수 있다. 실제 창문용 천을 제작하고, 조명기를 풀가동 시켜줄 발전차를 섭외하느라 제작비도 더 지출하게 되었고, 각각의 제작팀원들도 이런  상황을 처리하느라, 또 불편을 겪는 동네 주민들을 설득하느라 쉼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하지만 모두가 한 마음으로 이런 어려운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건, 역시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어린이, 청소년 배우들이고, 그들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지켜 최선의 연기를 펼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영화에도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국 그런 마음이 통한 건지 배우들은 정말 기대했던 이상의 연기를 보여주어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렇게 많은 변수와 오류와 문제들이 끝없이 발생해 계속 넘어지는 곳이 현장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놓지 않고 함께 해결하려 달려들면 때때로 기적이 찾아오는 곳이 현장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마침내 진심은 통하고야 만다는 낭만적인 믿음을 자꾸만 공고히 하게 되는 곳도 결국엔 현장이라는 것이 나는 여전히 놀랍고 새롭다.  


+ 성인 스탭분들 사이에 동그마니 놓여있는 나연배우. 하나가 유미유진 자매와 한 화면에 담길 땐 늘 씩씩하고 듬직한 큰언니처럼 보였는데,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할 때는 정말 작고 연약한 아이처럼 보이기도 하는 게 신기했다. 


사실 하나집에서의 진짜 아찔한 순간들은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찾아왔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큰 태풍이 지나간 뒤 연일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7-8월의 강렬한 햇빛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장대비가 쏟아지거나 견딜 수 있을만큼 내리거나 사이를 오가는 날씨가 이어지며, 아무튼 매일 매일 비가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위험한 스탭은 창밖에 매달린 조명을 끝없이 조정해야 하는 조명 팀원들 - 현민과 정훈이었다. 둘 다 진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때로는 비 맞은 조명 때문에 혹시라도 감전 사고가 날까봐 촬영 중단을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명감독님이 워낙 세심하게 살피며 지시하셨고, 팀원들도 다들 베테랑에 잘하는 친구들이라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다. 걱정이 되어 괜찮냐고 물어도, 둘 다 현장에서 이미 수십번 겪은 일이란 표정으로 그저 웃어 넘겼다. 하지만 비가 그렇게 왔는데! 모르긴 몰라도 수십, 아니 수백번은 전기가 찌릿찌릿 온몸을 통과해 식은 땀 흘리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 그나마 비가 오지 않아 사진이라도 찍을 수 있었던 날. 조명 세팅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조명팀의 정훈과 현민. 안방  장면을 찍을 땐 둘 중 한 명은 꼭 저 베란다도 창틀도 아닌 애매한 공간에 쭈그려 앉아 조명기를 붙들고 있어야 했다. 촬영이 길어지면 너무 미안해서 창쪽은 아예 쳐다도 못보는 때가 허다했다. 하.... 대체 영화 뭘까.


이런 팀원 한 명, 한 명의 노력과 정성이 모여 하나집의 촬영은 큰 무리없이 안전하게, 전보다 훨씬 여유있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중요한 무언가를 위해, 또 다른 무언가를 희생해야 하는 저예산 영화의 프러덕션 환경을 어떻게 바꿔 나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균형과 조화 속에서 모두를 희생하거나 소외시키지 않는 현장을 만들 수 있을지는 정말 고민이 많다. 




4.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우리는 우리집을 만든다!


이후 삼총사의 뜻밖의 가출 여행과 엔딩을 남겨둔 마지막 촬영분은 매일매일이 날씨와의 전쟁이었다. 비를 피해 간신히 찍거나, 빗속에서 어쩔 수 없이 찍거나. 언제나 비와 함께 한 촬영이 마지막 회차까지 이어졌다. 계속되는 비의 여파로 도저히 촬영을 진행할 수 없어, 중간에 서울에 비가 안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올라와 클라이막스를 찍고 바로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는 무리한 진행도 감행해야 했다. 거기에 어린이 배우들도 개학을 한 뒤라 이런 저런 학교 일정을 소화해야했고, 다른 촬영을 병행하는 친구도 있어 스케줄까지 무척 빡빡해졌다. 


+ 굴다리씬 촬영 중 비가 너무 많이 내려 잠시 쉬고 있는 스탭들. 이 날은 거의 10분 간격으로 비가 내렸다 갰다를 반복했다. 알맞은 날씨를 기다렸다 찍을 여유가 없어 결국 원래의 우중충한 날씨 설정과 갑자기 비가 오는 설정으로 모두 찍었다. 워낙 시간이 없어 더 찍고 싶은 컷들이 있었지만 꾹 참고 마무리해야 했다. 입을 앙 다문 시아의 얼굴이 그 때의 내 마음 같네. 


이렇게 뒤죽박죽 진행되는 후반 촬영 일정을 감당하느라 제작팀원인 주연과 윤주가 별별 고생을 다했는데, 여기에 의상과 분장을 도맡았던 연출부 유진이가 병가로 쉬어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까지 발생해, 안 그래도 촬영 내내 너무 많은 일들을 책임지고 해내던 연출 팀원들(정말이지 모두가 영화 속 ‘하나’였다.)의 이른바 ‘돌려막기’가 더 이상 불가능해지는 시점이 찾아왔다. 


+ 늦은 밤, 숙소 옆 식당에 수저를 빌리러 갔다가 다음 날의 촬영을 준비하는 연출부 친구들과 마주치고 깜짝 놀랐다. 그동안 이 친구들은 내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계획들을 실행하며 불철주야로 달렸을까. 조감독 승욱이 스케줄을 정리하는 동안, 연출부 준희는 촬영용 에그마요 샌드위치를 준비했고, 스크립터 슬기는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그 때, 간간히 현장에 놀러와 (사실 끌려와) 늘 우리를 도와주고 웃겨주던 시현언니가 연출부로 함께 해주시겠다며 직접 손을 들어 주셨다. 세상에! [우리들]의 조명감독님이 [우리집]의 연출부가 되어주시다니! 막내 유진이가 앓아 누웠을 때 함께 집으로 와 손을 따준 하나 언니를 바라보는 유미의 심정이 이랬던 것일까! 이후 언니는 10회차에 가까운 후반 촬영 일정을 모두 함께 해주시며 연출부의 공석을 더블, 트리플로 메꿔주셨다. (크레딧에도 제작지원으로 올라간 앨리스 언니를 찾을 수 있다!) 게다가 [우리들]을 함께 했던 배수찬 동시기사님까지 현장지원으로 찾아와 온갖 궂은 일을 다 맡으며 지방 일정을 함께 소화해주셨기 때문에, 정말이지 어벤져스가 부럽지 않은 기분으로 끝까지 힘을 낼 수 있었다.    


+ 전체 촬영 중 그나마 가장 편한 마음으로 찍었던 장면은 아마 아이들이 버스를 기다리던 해변가 버스정류장 씬일 것이다.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한적한 도로였지만 앨리스 언니가 손을 들고 다녀야 한다고 했더니 배우들이 모두 번쩍 손을 들고 다녔다. <우리들>의 삼총사도 저렇게 언니를 따라다녔었는데..... 앨리스 언니에겐 대체 무슨 비법이 있는 걸까. 


그리고는 더 이상 아무 문제 없이 촬영을 잘 마무리 했다..... 고 말하고 싶지만, 물론 그 뒤에도 모든 것이 수월하게 진행되진 않았다. 이미 헌팅한 로케이션에 문제가 생겨 촬영 중간의 휴차에 새로운 로케이션을 다시 탐색하러 다녔는데, 헤매다 잘못 들어간 길에서 우연히 훨씬 좋은 로케이션을 발견한 일, 밀물 썰물과 또 날씨와 싸우며 막무가내로 진행된 바닷가 장면에서 하나와 유미가 놀라운 연기를 보여준 일, 너무 촉박한 시간 동안 이름 조차 알 수 없는 벌레들의 소굴속에서 진행된 밤 장면이 스탭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으로 탄생한 일 등..... 문제는 계속 계속 생겨났지만 기적도 계속 계속 생겨났다. 


+ 하나, 유미, 유진이 둘러 앉아 고구마를 까먹던 텐트 앞 해변가. 갑자기 펑크난 로케이션을 대신할 곳을 찾아 다니다 우연히 발견한 멋진 장소였지만, 촬영하다 보니 온갖 종류의 벌레들이 어마무시하게 모여드는 벌레지옥이었다. 평소 날파리만 봐도 까무러치는 나를 비롯한 몇몇 스탭들이 이 때만큼은 배우들을 위해 벌레를 맨 손으로 잡아 치우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후반 작업부터 개봉에 이르기까지, 온 세포 하나 하나를 다 바쳐 <우리집>을 함께 완성한 분들이 너무나 많다. 제작기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모두 상세히 기록할 수 없지만 이름만이라도 꼭 담아두고 싶다. 한 프레임 두 프레임 세밀하게 움직이며 가장 자연스럽고 좋은 연기를 골라 영화를 완성시켜준 박세영 편집감독님, 아이들의 숨소리와 작은 대사 하나까지 섬세하게 다듬어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어준 고아영 믹싱감독님과 팀원분들, 사려깊고 생기 넘치는 너무나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주신 연리목 음악감독님, 다채롭고도 분명한 주장의 색감을 만들어주신 김승원 실장님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한편, <우리집>이 더 넓은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도록 후발주자로 함께 달려주신 분들도 정말 많다. (이렇게 주절주절 읊고 있자니 무슨 수상소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감사를 전해야 마음이 좀 편해질 것 같다.) 이 작은 영화를 온전히 믿고 투자를 결정해주신 롯데의 오희성 본부장님과 신한식 팀장님, 그리고 모든 실무를 도맡아 직접 발로 뛰어 주시는 박세준 과장님과 심유신 대리님, 또 마치 마라톤 선수처럼 오랜 기간 지치지 않고 늘 으쌰으쌰 함께 해주신 해외 배급의 화인컷 분들, 그리고 감독인 나보다 더 이 작품을 사랑하며  불철주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움직이시는 불굴의 마케팅팀 최유리 팀장님과 조성경님과 지앤이 온라인팀, 그 밖에도 도무지 하나만 고를 수 없는 세상 멋진 포스터들을 만들어주신 길티 플레져와 보기만 해도 눈물 나는 아름다운 예고편을 만들어주신 비디오브라더스까지..... 이런 놀라운 분들 덕분에 드디어 개봉도 하고 관객분들도 만날 수 있게 된 요즘이 정말 기쁘다.   


이렇게 우리들은 우리집을 만들었다. 이 모든 과정이 그저 한 순간의 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대체 어떤 마음으로  이 모든 순간들을 지나올 수 있었는지 아직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차마 어디에도 풀어놓을 수 없을 너무나 괴롭고 외롭고 아픈 순간들도 많았지만, 돌이켜보면 또 이만한 행운이 없고 그저 미안함과 감사한 마음만 남을 뿐이다. 영화를 만든다는 건 참 이상하지만 아름다운 일이다. 이렇게 또 좋아하는 사람들과 또 하나의 영화를 함께 만들 수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다. 




- 끝-







제작기를 쓰는 내내 <우리집>을 붙잡고 달려온 지난 3년이 주마등처럼 떠올라 

마음이 복잡해지기도 하고, 함께 했던 친구들이 그리워지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꼼꼼한 계획을 세워도 절대 뜻대로 풀리지 않는 작업,

직접 부딪히고 와장창 깨지는 과정에서야 비로소 배우고 깨닫게 되는 작업,

하지만 그런 도돌이표 같은 고난들 사이에서 때때로 기적을 만나기도 하는 놀라운 작업,

그런 작업이 바로 영화 만드는 일이라는 걸 저도 이 글을 쓰며 다시 한 번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작품을 온전히 흡족한 마음으로 칭찬하며 바라볼 수 있는 감독이 과연 세상에 있을까 싶습니다. 

저 역시 그렇고, 그래서 제가 만든 영화 앞에선 늘 한없이 부끄럽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관객분들과 만나는 이 순간들이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새로운 시선으로 영화 속에 숨겨진 가치를 발견해주시는 분들을 만나면서,

전혀 생각지 못했던 영화의 장단점과 의미와 감동을 찾고 나눠주시는 분들을 만나면서

영화가 비로소 완성되어 자신만의 날개를 달고 떠나가는 느낌이 듭니다. 


지난 3년간 품어온 저의 수많은 고민과 감정들을 여기에 모두 담아낼 순 없지만,

이 제작기를 통해서 꼭 전달하고 싶었던 한 가지가 있어요.


영화는 절대 감독 혼자 만드는 게 아니라는 것.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힘을 모아 마음을 모아 함께 만들어가는 작업이라는 것.

정말 많은 사람들의 치열한 고민과 정성 속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사고들을 총력으로 해결하면서, 

극장에서 오롯이 관객분들을 만날 90분을 위해 이 길고 험난한 여정을 헤쳐나가는 작업.

그게 바로 영화라는 걸 이 자리를 빌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우리집>의 제작 과정이 다른 영화팀들에 특별히 더 어렵고 힘든 현장은 아니랍니다. (더위는 제외)

모든 현장이 저희처럼, 아니 때론 저희보다 더 어려운 상황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진심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나와 유미와 유진이가 자신들의 집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처럼,

또 우리가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일어나 큰 숨을 들이마시며 다시 살아보려 힘차게 노력하는 것처럼요.  


부디 이 <우리집>을 만들어 온 지난 3년 간의 우당탕탕 여정이

보시는 분들께 즐겁고 행복한 감상이 되셨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 영화 아직 안 보신 분들 계시다면 꼭 극장에서 봐주셔요! 

감사합니다!






 +

우리벤져스 스탭분들이 최근 재밌는 현장 사진을 너무 많이 보내주셔서,

(혹시 궁금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사진으로 구성된 제작기를 마지막으로 띄워볼까 생각중인데 어떨까요?

이거.... 누군가는 보고계신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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