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이, 태국
빠이는 치앙마이에서 미니밴을 타고 762개의 고개를 넘어야 도착하는 곳이었고, 멀미에 취약한 나는 탑승 전 멀미약을 챙겨 먹었다. 멀미약 덕분인지 차 안에서는 풍경을 볼 겨를도 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헤드뱅잉을 하며 잠깐잠깐 가늘게 눈을 뜰뿐이었다.
네 시간가량의 헤드뱅잉 끝에 미니밴은 나를 목적지에 내려주었다. 더운 날이라 짧은 반바지에 얇은 마 소재의 흰 셔츠를 입고 흰색 플립플랍을 신고 있었던 나는 비몽사몽 간에 차에서 내려 내 덩치보다 큰 쨍한 파란색의 배낭을 둘러메었다. 산지라 공기가 시원해졌음이 느껴졌다. 당장 오늘 밤을 묵을 숙소부터 찾아 길을 나섰다.
미리 이름을 알아둔 숙소를 찾아 조심스레 들어서면서도 멀미약 기운에 몽롱함이 남아있었던 것 같다. 시간은 네시, 다섯 시쯤 되었을까. 해가 중천에서 서쪽으로 꽤 기울었지만 아직 산등성이를 넘을 때는 아니었다. 새하얀 벽이 햇볕을 받으면 주황색이 되는 그런 볕 좋은 여름날의 늦은 오후. 숙소 대문을 들어서니 넓은 잔디밭이 보였고 방갈로 예닐곱 동이 잔디밭을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나무와 방갈로 사이사이로 주황빛의 볕이 들었고 잔디밭 저쪽 한편 나무 의자에서 딱 한국 사람처럼 보이는 남자가 젬베를 두드리고 있었다. 큰 키에 서글서글한 인상이었고 그을린 피부와 동남아 여행자다운 복장이 그가 꽤 오랜 여행을 해오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음악과 히피의 도시라는 빠이에 도착해서 만난 첫 이미지로서 그는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당연히 시선이 머물렀고, 그는 여리여리한 몸에 제 덩치만 한 배낭을 메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한국 여자를 보고 순간 연주를 멈추었다. 눈이 마주쳤다. 아마 일 이초 남짓의 찰나였겠지만 그 순간은 내 인생을 몇 장면으로 요약한다면 한 꼭지 차지할 강렬한 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영화에서 갑자기 흑백에서 컬러로 장면이 전환되거나 화면 비율이 바뀌는 그런 순간처럼.
동남아 어느 산골 마을, 잔디밭과 방갈로, 더위가 잦아든 여름날 오후, 배낭 메고 여행 중인 내 모습, 젬베 소리, 인연의 시작. 좋아하는 것들, 그래서 나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것들이 한데 모인 장면 이어서일까. 진짜 그 순간에 특별한 기운이 감돌았었는지, 그저 남아있는 멀미약의 몽롱함이 준 착각이었는지, 아니면 시간이 흐른 후 머릿속에서 미화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지금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그것이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