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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항수 Feb 15. 2016

첫 만남,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일 년

2014. 03. 03.

대한민국 교사들에게 엄청난 긴장감을 선사하는 3월의 첫날, 본의 아니게 늦잠으로 시작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하려고 알람을 맞춰두었는데 자는 동안 휴대전화의 배터리가 방전되었다.

눈을 뜨니 6시 40분.

부랴부랴 준비하고 학교에 도착하니 7시 40분이었다.


첫날 만큼은 교실에 가장 먼저 도착하고 싶었는데 이미 3명의 아이들이 와 있었다.

아이들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함께 책상 대형을 바꿨다.

그 사이 몇 명의 아이들이 교실로 들어왔다.

반갑게 맞으며 이름을 묻고 인사를 건넸다.

작년에는 아이들이 처음부터 활발했는데 신기하게도 올해는 아이들이 온 순서대로 차분하게 앉아 자기 할 일을 했다.

다른 아이들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어서 그런가.


모든 자리가 채워지자 내 소개부터 했다.

늘 하던 방식대로.


"선생님 이름은 지항수야.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생님 이름을 지향수 라고 들어.

지향수가 아니고 지항수야. 뭐라고?"

"(웃음) 지항수요."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듣는다?"

조용히 이름 가운데 ㅇ 을 지운다.

"(박장대소) 지하수래. 하하하하."

"그래, 선생님은 지향수도 아니고 지하수도 아니야.

뭐라고?"

"(매우 크게) 지항수요!"


소개가 끝나자 곧장 교실 뒤편을 보게 했다.

환경판에는 지난 금요일에 4기 아이들이 붙여둔 '누리보듬 5기 환영합니다' 라는 문구가 아이들을 반기고 있었다.

'누리보듬'이 무엇인지 설명하려는데 갑자기 스피커에서 교내 방송이 나왔다.

회의가 있으니 모든 선생님들은 교무실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아이들에게 마음 편히 쉬라고 이야기하고 교무실로 갔다.

회의는 계속 길어지고, 교실의 아이들을 생각하며 점점 초조해졌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교실로 날아가는데  남자아이들이 복도의 책상과 의자를 나르고 있었다.

주무관님의 부탁으로 복도에 놓인 것들을 옮기는 것이라고 했다.

남자아이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야 제대로 우리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우선 아이들에게 지난 4기 활동을 엮어 만든 영상을 보여주었다.



보고 나서 생각과 느낌을 공유하게 했다.

"4기의 모습을 보니 우리도 일 년이 행복할 것 같아요."

"부러워요."

"앞으로의 생활이 기대돼요"


아이들에게 '누리보듬'을 풀어 설명해줬다.

'누리'는 세상을, '보듬'은 따스하게 안아주는 것.

'누리보듬'은 너희들이 세상을 따스히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뜻에서 지어주는 이름이라고.


이어 4기 아이들이 5기에게 보내는 한 줄 편지를 보여줬다.

하나씩 읽어볼 때마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피었다.

"우와, 이런 것도 해요?"

"진짜예요?"

"와, 대박!"


이건 4기 아이들의 경험이고, 너희들이 상상하는 모든 것이 이 교실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계속 읽어나가며 아이들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덧 시업식 겸 입학식 시간.

방송 담당이라 예정 시간보다 일찍 아이들을 데리고 강당으로 갔다.

가는 동안에도, 도착해서도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자기들이 알아서 잘했다.


식은 계속 길어져 마치고 나니 두 시간이 지나갔다.

지친 아이들에게 쉬는 시간을 주고 아이들에게 권리와 책임에 대해서 짧게 안내했다.

권리는 '할 수 있는 것,' 책임은 '해야 하는 것'.

"지금까지 어른들이 너희들에게 책임을 강조했을 터라 많은 권리가 생기면 정말 기분이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책임을 잊으면  안 된다.

권리와 책임은 항상 함께하는 것이니."


그러면서 4기가  지난주에 2일에 걸쳐 교실을 치우던 모습을 보여줬다.


"이 아이들도 다른 선생님들이 보기엔 심하다 싶을 정도로 자유롭게 지냈어.

그러나 방학 중에도 나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했단다.

너희들은 4기 아이들의 노력으로 깨끗한 교실을 물려받았어.

그건 권리이지.

그럼 너희들에게 생긴 책임은 무엇이겠니?"

"치우는 거요. 깨끗하게 쓰는 거요."


다음은 아이들이 의사결정의 과정을 접할 차례였다.

처음부터 자리도, 사물함도, 신발장도 정해주지 않았다.

모든 것은 아이들이 선택한다.

나는 그 과정에서 부드럽게 진행될 수 있도록 도울 뿐이다.


사물함을 어떻게  정할지 20분 정도의 회의 끝에 제비뽑기를 우선으로 하고 바꿀 사람끼리 바꾸기로 했다.

회의 동안 아이들이 우려하던 다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으로 아이들은 충분히 행복하게 의사결정을 할 수 있음을 배웠을 것이다.



사물함 정리까지 끝나니 점심시간까지 20분 정도 여유 시간이 있었다.

간단하게 가위바위보를 이용해서 놀았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함박웃음이었다.

그 안에서 규칙의 소중함, 경청의 필요성을 배우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방과 후 선생님을 도울 수 있는지를 물었더니 네댓 명의 아이들이 손을 들었다.

하교시킨 후 함께 교실을 정리하려 했는데 급하게 전 교실에 메신저를 새로 설치해야 했다.

그래서 남은 아이들에게 간단히 정리만 하고 가달라고 부탁했다.


나중에 돌아와 보니 책상에는 쪽지가 놓여 있었고, 모든 자료함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중간에 교실에 들렀을 때 분명히  남자아이만 셋이었는데 놀랄 만한 솜씨였다.



쪽지를 펴보니 '선생님, 저희 갈게요. ^^ -A, B,  C'이라고 쓰여있었다.


그래, 하루 만에 이렇게 지내는 것을 보면 뜻은 이어지나 보다.

앞으로 이 아이들과 만들어갈 삶이 기대된다.




3월 첫날은 아이들과 교사 모두 떨리고 긴장되는 날이다.

누굴 만나게 될까, 앞으로 일 년이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첫인상의 중요성을 누구나 알기에 각자 나름대로의 준비를 하게 된다.


조심해야 할 점은 긴장한 탓에 힘이 너무 들어가지 않는 것.

어떤 운동이든 힘을 뺀 자연스러운 자세가 중요하듯이 만남에도 자연스러움이 중요하다.

의욕이 너무 넘치면 미리 일주일치 계획을 빽빽하게 짜 놓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계획을 세우는 건 좋으나 여백을 남겨야 한다.

시간적 여유, 그리고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여유.


계획을 할 때 여기저기서 본 좋은 활동을 모아두기만 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이 든다.

그보다는 일 년 후 아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길 바라는가, 아이들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았으면 하는가에 중심을 두는 편이 긴 호흡에 어울린다.

이를 도울 수 있는 도구를 하나 만들어보았다.



교사가 잊지 말아야 할 단순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이 일 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아이들과 함께할 날이 일 년이나 있다는 뜻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일주일 또는 한 달만에 다른 사람을 바꿀 수 있다면, 이렇게 긴 시간 교육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변화를 기다리면 된다.


다른 하나는 아이들의 긴 인생 중에 고작 일 년이라는 뜻이다.

교사와 함께하는 동안 아이가 변하지 않더라도 괜찮다.

그저 아이  가슴속에 씨앗을 심어주면 된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는 피어날 것이니.

나와 함께 있을 때, 나로 인해 변해야 한다는 욕심을 내려놓는다면 힘을 뺄 수 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함께 살아가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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