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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항수 Feb 16. 2016

믿는 만큼 아이들은 성장한다

2014. 03. 04.

교실에 들어오는 아이마다 안부를 물었다.

"잘 잤니? 아침은 먹었어?"

대부분의 아이들이 아침을 먹고 왔다.

지각한 네 명의 아이들은 아침을 먹지 않았다고 했다.

조용히 복도로 나오라고 했다.

그리고 학년 협의실로 데려가 참쌀 도넛을 하나씩 주었다.

긴장했던 아이들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첫 '하루열기'를 가졌다.

이번 주는 시범 삼아 내가 '하루선생님'을 하기로 했다.

오늘의 주제는 우리 반과 함께할 친구들 소개.

각종 기기와 장비들을 꺼내며 설명했다.

에그, 캠코더, 삼각대, 디지털카메라, 고릴라 삼각대, 스캐너, 외장하드, 애플TV, 아이폰, 노트북...

하나를 꺼낼 때마다 아이들은 무얼까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며 신기해했다.

이 친구들을 이용하여 우리가 정말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다고 하니 눈이 동그래졌다.


수업을 시작하며 아이들에게 넌지시 물었다.

"어제 누군가 '우리는 하루 종일 놀았다'라고 했다면서?"

몇몇 아이들이 당황해하였다.

"너희들이 어제 한 게 다 공부야. 선생님은 진짜 공부는 그런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어제 뭘 배웠냐고 물어봤더니 선생님 이름, 누리보듬의 뜻, 권리와 책임 등이라고 대답했다.

"이것 봐. 너희들은 참 잘 배웠어. 그럼 이번 시간에는  그중에서 권리와 책임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지금껏 어른들이 너희에게 무얼 강조했을까? 그렇지, 책임이지. 평소에 이런 것까지는 굳이 선생님에게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생각했던 것들을 말해볼래?"

짧은 침묵이 지나고 한 아이가 대답했다.

"화장실 가는 거요."

"맞아. 화장실 가는데 허락받으려면 부끄럽지? 손 들기도 그렇고."

"네. 민망해요."

이내 여러 대답이 나왔다.

"쉬는 시간에 노는 거요."

"보건실 가는데 꾀병이라고 의심해요."

"간식 먹는 거요."

한 번 나온 불만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그래, 어른들도 너희들처럼 수업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어른들은 허락을 받을까? 안 그래. 그렇다면 왜 어른들은 그렇게 하면서 너희들은 그렇지 못하게 할까?"

곰곰이 생각하는 아이들 사이로 대답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책임을 못 지켜서요?"

"응.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그런데 선생님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너희들도 충분히 할 수 있어. 화장실? 마음대로 가렴. 권리가 생겼으니 뭐가 생기겠니? 그래, 책임. 어떤 책임이 있을까?"

"조용히 가는 거요."

"남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하는 거요."

"맞아요. 그리고 아무 때나 가도 되지만, 가능하면 쉬는 시간에 가는 것도 너희들의 책임이지."

이런 식으로 앞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권리와 책임으로 정리했다.


자잘한 규칙이 따로 정하지 않았다.

권리와 책임에 따라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어른들처럼, 아이들 역시 가능하다.


시간이 십 분 정도 남아 즐겁게 '주인공을 찾아라' 놀이를 했다.

대형을 바꾸는 것도, 노는 것도 벌써 익숙해졌나 보다.

아직까지는 남녀가 편하게 섞이지 못하는데 차차 적응하겠지.


이어진 시간에는 '괴롭힘'에 대한 시간을 가졌다.

자신이 겪었거나 주변에서 본 것을 간단히 말해보라고 했더니 제법 나왔다.

이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게 했는데

아이들은 힘들었던 기억을 되살리며 힘들어했다.

심지어 감정이 북받쳐 울음을 터뜨린 아이도 있었다.

그리고 '지하철 폭행사건', '방관자 효과' 동영상을 보고 느낌을 나눴다.

아이들은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본 듯  경악해했다.

다음 시간에는 희망을 찾아보자며 중간놀이를 가졌다.



당분간은 중간놀이 시간에는 무조건 아이들을 밖으로 보내려 한다.

밖에서 뛰어노는 습관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아이들이 다 나가고, 아직까지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Y를 달랬다.

지금까지 따돌림당한 기억이 물밀 듯이 그를 덮친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중간놀이가 끝나고 함께 '3의 법칙' 영상을 봤다.

사람들이 모여 무거운 지하철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의 표정은 밝아졌다.

영상을 본 느낌을 공유하게 하자

"우리도 힘을 합치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등의 반응이 나왔다.


그때 첫 번째 약속을 제시했다.

'우리는 괴롭힘 상황에서 서로를 도울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힘들게 하지 않고, 어려울 때는 도와줄 것이다.

그럴 수 있다.


첫 번째 약속을  마무리하고 어제 정하지 못한 것들을 정했다.

신발장 위치, 이동할 때 줄 서는 방법, 역할 분담.

어제보다는 회의 진행이 빨랐다.

이번 주를 잘 넘기면 다음 주부터는 아이들에게 넘겨도 될  듯하다.


오후에는 몸을 깨우는 시간을 가졌다.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고 첫 번째 요가 자세를 배웠다.

나이는 어린데 벌써 몸이 굳은 아이들이 많았다.

더 많이 아이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해야겠다.


어느 정도 몸이 풀어지자 아이들의 가장 큰 관심사인

자리 변경에 대하여 회의를 했다.

역시, 해마다 이 주제는 쉽지 않다.

결국 3월은 제비뽑기, 4월은 마음대로 앉아보는 걸로  일단락됐다.

아이들의 의견에 따라 곧장 제비를 뽑고 자리를 옮겼다.

표정이 밝은 아이보다는 어두운 경우가 많았지만

그 전에 충분히 논의가 된 상황이라 불만이 나오진 않았다.



하루닫기를 하며 수업을 마쳤다.

처음으로 하는 거라 칭찬이나 사과가 자연스럽게 나오진 않았다.

그러나 Y의 진심 어린 감사의 말을 들은 K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것을 보니 차차 자리가 잡힐  듯하다.


하루 동안 아이들이 권리와 책임에 제법 익숙해졌다.

5교시까지는 수업 시작 시간을 지키지 못하더니 6교시가 시작할 때는 서로 시간이 되어간다고 말해주었다.

끝나고 바둑알과 장기알을 갖고 논 친구들은 남아서 교실 바닥에 떨어진 알들을 줍고 갔다.

그렇게 아이들은 스스로 선택을 해나갈 것이다.

그렇게 성장할 것이다.




여전히 학교는 권리보다는 책임이 강조되는 곳이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은 가득하지만,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은 드물다.

무한한 선택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릴 때부터 제한된 선택만을 하며 살도록 길들여진다.


아이에게 적절한 규칙과 제한이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자립할 수도 없을 만큼 과도한 보호와 규제가 문제라는 뜻이다.

시행착오를 겪을 기회를 잃은 아이들은 자라서도 정해진 길 이외는 눈을 돌리기도 겁이 난다.


서로에 대한 존중이 바탕이 된다면, 권리와 책임은 절로 지켜진다.

아이들을 믿고 존중한다면, 그들 역시 서로 존중하며 금세 성장할 것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권리와 함께 책임도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분야 별로(예를 들어 화장실 가기나 간식 먹기 같은) 몇몇 아이들은 지키지 않는다.

지키려고 노력하면서도 안 되는 경우도 있고.


이에 낙담할 필요는 없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어떤 사람이든지 모든 책임을 제대로 지킬 수는 없다.

약속 시간보다 자주 늦는 사람도 있고, 다른 이에게 실례되는 항동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 아이도 그러는 게 당연하다.


기준을 낮추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과한 경우에는 개입을 해야 한다.

따로 약속을 하거나 아이들과 함께 회의를 하면 나아진다.




해가 갈수록 상처를 지닌 아이들이 늘어남을 온몸으로 느낀다.

친구들로 인해, 어른들로 인해 이곳저곳에 박힌 가시는 아이를 고슴도치로 만든다.

남들에게 가까이 가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는 존재.

이미 낮아질 대로 낮아진 자존감 때문에 본인도  힘들어하고, 주변도 불편하다.

이런 상황이 가장 난감하다.


Y가 그런 아이였다.

1학년 때부터 계속된 따돌림과 불안정한 가정 환경은 아이에게서 자존감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다행히 함께 지낸 후부터 조금씩 자신감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5월에 한 사건을 겪은 후, 학년을 마칠 때까지 힘들어한 날이 많았다.

내 조급한 마음에 시도한 갖가지 처방은 오히려 그를 더욱 주눅들게 했다.

다시 이때로 돌아간다면  잘할 수 있을까.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 선생님이 참 부족해서 미안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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