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항수 Feb 01. 2016

인성? 시민성!

인성교육을 넘어 시민성교육으로

환상을 깨고자 무작정 떠나다

막연한 동경. 시민들이 서로를 도우며 살고 인간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나라. 북유럽은 내게 그런 곳이었다. 다양한 색깔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협동조합 등의 공동체가 생동하는 모습을 책과 영상으로 접하며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다. 상상하는 대로 지상 위의 낙원 같은 모습일지, 아니면 부풀려진 환상에 불과한지 알고 싶었다.

항공권을 예매한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4월 첫날, 만우절이었다. 거짓말처럼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때는 의욕에 불타오르며 최대한 길게 다녀오자고 생각했다. 6월 중순에 출발하여 8월 말에 돌아오도록 여정을 잡았다. 웬걸, 떠나기 전에 영어와 북유럽에 대해 공부하고 가야겠다는 결심도 금세 흐지부지되고 출국 전날까지도 과제를 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결국 항공권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다. 출발을 미루고 싶었지만 변경하기에는 수수료가 발목을 잡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무작정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래도 원칙을 하나 세웠다. 유명한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그곳의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의 삶을 바라보자고.

호기로운 시작과 달리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여유가 싹 사라졌다. 당장 숙소까지 가는 길도 모르겠고, 연락도 할 수 없었다. 고생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다음날 일정과 숙소조차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전혀 모르는 세상에 혼자 던져진 기분이었다. 되지도 않는 영어를 쓰며 눈치껏 하루살이처럼 하루를 살아내기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처음 일주일은 어쩔 줄 몰라 큰 도시의 호스텔을 전전했다. 그러다 보니 보이는 것은 책에서도 볼 수 있던 장소와 풍경이요, 만나는 이는 관광객이었다. 6월임에도 쌀쌀한 날씨와 추적추적 내리는 비, 그리고 혼자라는 외로움에 금세 몸도 마음도 지쳐버렸다. 그때 내 손을 잡아주는 낯선 이가 있었다.

며칠째 여행 SNS를 통해 잠자리를 알아봤지만 매번 허탕이었다. 영어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똑같은 문장을 여기저기 기계적으로 보낸 탓이었다. 정말 원했던 것은 잠자리가 아니라 사람과의 만남이었는데. 마음을 가다듬고 한 청년에게 단어 하나하나에 진심을 담아 요청을 보냈다.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그에게서 답장이 왔다. 며칠간 자신의 집에서 지내라고 했다. 괜스레 눈물이 났다.

그의 집에서 5일이나 머물며 편히 쉬었다. 함께 비빔밥도 만들어 먹고, 서로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떠나기 전 그에게 물어보았다. 왜 나를 받아주었냐고. 그가 답하길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고 했다. 그 후로 여행을 마칠 때까지 대부분을 사람들과 어울리며 보냈다. 목적지 없이 발길이 닿는 대로, 초대해주는 대로 떠돌아다녔다. 다양한 삶의 모습에 매일이 새로웠다. 자그마한 배를 타고 이틀 밤을 보내기도 했고, 학교에서 수업을 하기도 했다. 팔순이 지났는데도 공부에 매진하고 계시는 노인의 삶에서 사그라들지 않는 열정을 보았고, 어린 나이에 입양되어 내가 한글로 된 입양서류를 읽어주기 전까지 자신의 고향과 부모님의 성함도 몰랐던 이의 그리움도 보았다. 인연인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흘러가는 대로 72일을 보냈다. 


노르웨이에서 만난 친구들과 음악을 즐기다


그들의 삶을 느끼다

항공권에 적힌 출발과 끝을 제외하고는 정해진 여정 없이 상황에 맞춰서 움직였다. 독일에서 시작해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를 거쳐 핀란드가 마지막이었다. 모두 복지와 시민성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나라다. 그러나 내 머릿속의 환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첫날밤부터 길가에서 싸우는 소리에 잠을 깼고, 걸어가며 담배를 태우거나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지하철은 어둡고 지저분했으며 에스컬레이터는 고장 난 채로 서 있었다. 여전히 기피 직업이 있고 재산 크기에 따라 할 수 있는 일도 달랐다. 가정폭력이 존재했고 성소수자 차별도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제야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도 사람 사는 세상이구나. 온갖 모습의 삶이 한데 뒤엉켜 있으니 갈등이 존재하고 고쳐야 할 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때부터 그들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고, 이전보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우리와 달리 여기저기에서 묻어나오는 여유로움이었다. 도시 한복판에서도 녹지가 가까이 있고, 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주변을 채웠다. 햇살 아래 뛰노는 아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고 유모차를 끌고 가는 남성도 종종 보였다. 늦은 어둠이 찾아와도 불야성 같은 곳은 찾기 어렵고 대신 집집마다 불이 켜졌다. 좋게 보면 여백이 있는 삶이고 속도와 편리함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답답하고 지루한 환경이다. 

하루는 친구가 약간 피곤이 섞인 표정으로 퇴근을 했다. 저녁식사에 다른 친구들을 초대한 상황이라 급한 마음에 그에게 재료를 사러 가자고 했다. 그는 휴식이 필요하다고 하더니 눈을 감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잠시 후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며 두세 곡을 연주했다. 어느새 얼굴이 밝아진 그가 이제 됐다며 나가자고 말했다. 자신의 기분이 어떤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좋게 유지하는지 알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놀라울 따름이었다. 여행 동안 함께 지냈던 사람들 모두 한 가지 이상의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컴퓨터 게임에 푹 빠진 청년조차도 산책을 즐기곤 했다. 그들은 일상에서 쉼표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코펜하겐(Copenhagen: 덴마크의 수도)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떠올리게 하는 파키스탄 친구를 만났다. 그는 늘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가 내게 말했다. ‘행복은 순간이야. 어제 맛있는 음식을 먹어 행복했다고 해서 오늘 또 먹는다고 그만큼 행복하지는 않아. 하지만 만족은 길어. 순간의 즐거움이 아니라 이 상태를 유지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 그게 만족이야. 덴마크인들은 행복한 웃음을 짓지는 않지만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어.’ 그런 이유로 그는 그곳에서 계속 살고 싶다고 했다.

그들은 여유로웠고 자신의 삶에 만족했으며 당당했다.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찾아 먹더라도 눈을 반짝이는 시간을 누리고 있었다. 누구나 걱정과 불안은 있었으나 삶을 집어삼켜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자신이 가치를 두는 데에 좀 더 집중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희로애락이 적절히 섞인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화목한 삶을 살아가는 가족과 함께 만두를 빚다


개인을 넘어 사회의 일부로서

처음으로 버스를 타던 날, 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2층 버스나 2단 버스도 신기했지만 무엇보다도 놀랐던 건 정류장에 정차할 때 버스가 오른편으로 기우뚱한다는 점이었다. 혹시나 착각했을까 봐 내려서도 살펴봤지만 분명히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휠체어나 유모차,  어린아이들을 위한 배려일 테다. 건널목도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턱이 높은 곳, 아예 없는 곳, 자전거 도로로.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배려를 마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그들은 배려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었다. 한 번은 다리 근육에 장애가 있는 친구와 함께 시내를 돌아다니며 축제를 즐겼던 적이 있다. 그의 오랜 친구가 차로 마중을 나왔지만 그 이상의 도움은 없었다. 더딘 걸음에 뒤처지더라도 가끔 핀잔을 주며 기다릴 뿐이지 부축해주지 않았다. 둘은 동등한 관계였다.

친구를 많이 두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는 그들이지만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다. 우연히 뚜르꾸(Turku: 핀란드의 항구도시)에서 몇 년째 지낸 한국인과 술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가 지갑을 두고 왔다고 했다. 깜짝 놀란 내가 얼른 돌아가자고 했는데 그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비슷한 상황을 겪을 때마다 매번 큰 어려움 없이 찾았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지갑은 식당 주인의 품에 있었다. 화장실에서 지갑을 발견한 손님이 맡겨두었다고 했다. 지폐 한 장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여행객과 이민자가 늘면서 조심하는 경향이 생겼지만 여전히 문을 잠그지 않고 다니거나 길에 떨어진 물건이 그대로 있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북유럽에 대해 널리 알려진 것 중 하나는 높은 세율이다. 마케팅을 공부하는 친구와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대학 졸업을 앞둔 그녀는 고소득의 직장에 취업할 거라 했다. 돈을 많이 버는 만큼 수입의 절반 가까운 액수를 세금으로 내야 했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사회로부터 혜택을 받았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 자신도 사회에 공헌해야 한다고 했다. 다른 이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많이 가진 자가 더 내고, 적게 가진 자가 덜 낸다는 재분배의 관점이 아니라 사회에서 살아가는 시민의 책임이라 여기고 있었다. 개인의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들이지만, 사회가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베를린에서 만난 시위 현장.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경찰들이 도와주기도 한다


인성시민성!

여행을 떠나며 가슴에 품은 물음이 하나 있다. 시민들이 지닌 가치가 사회를 만든 것일까, 아니면 사회가 개인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도록 영향을 줬을까. 여행을 다녀온 지금도 답을 찾지는 못했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질문이니까. 그러나 닭이 달걀을 낳고, 달걀을 깨고 병아리가 나오는 과정이 너무나 당연해 보이지만 일련의 고통인 것처럼, 그들이 만들어내는 선순환 관계 역시 여러 갈등과 조정을 겪으며 이뤄지고 있었다.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 반대하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지혜를 모은다. 자신과 다른 이의 삶이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기에 그들은 함께 고민하고 논쟁하며 행동한다.

일 년 전, 논란 끝에 인성교육진흥법이 제정되었다. 인성교육진흥법 전문을 살펴보면 교육부가 인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학교’에서 인성교육의 ‘전문가’가 ‘인증된 인성교육프로그램’으로 학생을 가르친다면 ‘인간다운 성품’을 지닌 사람으로 자란다고 믿나 보다. 비단 교육부의 의견만은 아닌 것 같다. 학교폭력이나 학생 범죄와 관련된 기사를 보면 ‘요즘 애들은 인성교육을 덜 받아서 그래’라는 반응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인성을 강조하는 것은 문제의 원인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꼴이다. 인성이 나쁜 누군가 때문에 문제가 생기니 이를 예방하자는 취지다. 지금껏 우리는 사회보다는 개인의 책임을 강조해왔다. 고소득의 직장을 얻거나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개인의 노력에 달린 일이요, 가난하고 힘든 형편을 개인의 실패라고 치부했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나 지역사회 환경, 주변의 인식 등의 영향에는 애써 눈을 돌렸다. 수저계급론, 헬조선론 등 사회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는 지금, 인성교육의 강조는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와 반대로 시민성이란 나와 타인, 그리고 사회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실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교육부가 주장하는 인성교육이 개개인에 초점을 맞춘다면 시민성교육은 사회에 속한 존재에 초점을 맞춘다. 인성교육의 방법이 주어진 프로그램을 이수하는 것이라면 시민성교육은 내가 속한 세상의 맥락에 대한 이해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실천이 핵심이다.

거창하게 표현했지만 실제는 어렵지 않다. 그저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주변에 이상하거나 옳지 않다고 여겨지는 점이 있다면 바꾸려는 시도를 해보게 하면 된다. 따로 시간이나 노력을 들일 필요 없이 일상에서 행해지면 된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럴 때야 비로소 시민이 책에 박제된 유물이 아닌 실제의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니까. 그저 비어 있는 시간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 그게 대한민국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가.


손을 마주 잡은 부모님의 뒤를 따라 함께 걸어가는 커플. 자식은 부모의 삶을 닮는다


교육을 넘어 사회의 변화로

얼마 전에 종영한 ‘응답하라 1988’의 인기는 대단했다. 케이블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할 정도였으니. 배우들의 명연기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소품들도 열풍에  한몫했겠지만, 최대 공신은 ‘골목’일 것이다. 옆집을 제 집 마냥 다니며 함께 밥을 먹고, 다른 가족의 일을 제 일 마냥 걱정하던 그 시절의 풍경은 어렵고 모순적인 시대 상황을 가리기에 충분했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마을공동체의 모습은 모든 것이 조각조각 나뉜 지금의 우리에게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많은 이들이 ‘정’에 대한 갈증을 점점 느끼나 보다.

골목이 사라진 아파트를 중심으로 우리네 삶을 돌이켜 본 다큐멘터리에서 섬뜩함을 느낀 장면이 있다. 살고 싶은 집을 그려보라는 말에 한 아이는 CCTV가 가득 달린 집을, 다른 아이는 경호원이 문 앞을 지키는 모습을 그렸다. 단절된 세상에서 운 좋게 살아남는 것이 요즘 아이들이 그릴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일 수도 있겠다. 빌딩 주인이 되어 세를 주며 사는 것이 꿈이라는 아이들의 말처럼.

그들은 우리가 경험했던 공동체의 따스함을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신의 경험 이상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개인이 돈을 벌어 자식에게 물려줄 수는 있지만, 따스하고 신뢰가 넘치는 사회를 물려줄 수는 없다. 그런 사회에서 홀로 행복하게 살더라도 만족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개인의 성공보다 사회 변화를 꿈꾸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다.

최상의 교육은 모범이 되는 삶이다. 아이가 자라면 어느새 부모와 닮아지는 것처럼 일상에서 마주하는 세상은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최상의 시민성교육은 시민들이 살아가는 사회다. 여행에서 본 그곳은 사회가 하나의 거대한 배움터였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을 지라도. 서로 도우며 살고 인간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회, 나의 환상이 이 땅에서 이뤄지기를 바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