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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항수 Nov 22. 2017

학급이라는 작은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사회학적 관점으로 학급 바라보기

올해에는 딱 한 번만 강의를 나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지금은 나눔보다는 내실을 다질 때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학원에서 연구한 내용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 삶에 뿌리내릴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내게 딱 맞는 제안이 들어왔다. 제주의 저경력 교사들이 1년 동안 함께 공부하는 프로젝트에 11월 강사로 참여하게 됐다. 주제는 ‘학급이라는 작은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질까’로 정했다. 


교사들에게 사회학적 안목을 길러주기. 이것이 목적이었다. 참여자들이 두 가지 관점으로 학급을 바라보도록 안내했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사회 안에서 학급은 어떻게 영향을 받는가. 학급 안에서 사회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여섯 시간 안에 이런 내용을 모두 다룰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웬걸. 밑에 후기에 나타난 것처럼 선생님들은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게 소화했다. 국내 최초 시도(라 알고 있다)인 주제라 아직 부족한 면이 보인다. 조금 더 보완한다면 교육계에 사회학적 관점을 확산시키는 괜찮은 워크샵이 될 것이다.


앞으로 이 주제로 워크샵을 원하는 곳이 있다면 장소를 불문하고 다녀야겠다. 사회학적 안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언제든 불러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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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급이라는 사회를 바라보는 두 가지 렌즈


교실에서 우리는 학급이라는 사회를 만난다. 지항수 선생님과 학급을 망원경과 현미경으로 살펴보았다.


학급을 망원경으로 살펴본다는 것은, 학급에 미치는 수많은 영향들을 학급 밖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학급은 결코 홀로 서있지 않다. 이 학급이 속한 학교, 학교가 속한 마을, 마을이 속한 지역, 지역이 속한 국가, 국가들이 속한 세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현상들이 학급에 영향을 준다. 우리는 모둠별로 우리의 학급에 영향을 주는 수많은 요인들을 브레인스토밍으로 쏟아냈다. 학부모의 경제력, 최저임금, 교장/감의 교육정책, 동료교원과의 관계, 학교의 위치, 학급 인원수.... 그리고나서 학급, 학교, 마을, 지역, 국가, 세계의 수준으로 생각들을 분류하였다. 다른 모둠의 생각도 알기 위해 탐사를 떠나기도 했다. 각 모둠에서 한 명씩 남아 탐사를 도왔다. 이렇게 나누고 나서 소감을나누었다. 우리는 약간의 슬픔을 느꼈다. 우리를 가두는 틀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을 살아가는 학급에는 우리가 어쩔 도리가 없을 것 같은 거대한 틀이 있었다. 이 즈음에서 선생님이 "교통체계"라는 틀을 예로 드셨다. 도로와 신호등은 어찌보면 우리가 자유롭게 가는 것을 막는 것 같지만 덕분에 안전하고도 효율적으로 목적지까지 갈 수 있도록 돕는다고 말이다.

그때는 선생님의 이 말을 말 그대로만 이해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았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가 전지에 덕지덕지 붙였던 그 수많은 틀이 우리를 도와주기도 한다는 뜻 같다. 답답하게만 여길 것인지, 아니면 그 틀을 '이용'할 것인지 그 판단의 지점에 교사의 전문성이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국가수준 교육과정에서 때로 공감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교육과정이 없는 상태로 학교에 내던져진다면 우리는 헤매는 시간이 훨씬 길었을지도 모른다.


한단계 더 나아가 우리는 관련지을 수 있는 요인끼리 묶어 이름을 지어주기로 하였다. A, B, C오빠가 모인 우리 '다다익선' 모둠은 최저임금-수능-평가-학부모의 경제력 등을 모아 '경쟁'이라고 이름 붙였다. 'WABA-질병-..' 등을 모아 '생명·건강', 그리고 '교육과정-PISA-..' 등을 모아 '시스템'이라고 하였다. 정말 재미있었던 점은 세 모둠에서 찾은 이름들이 정말 개성 넘쳤다는 점이다. 우리 모둠은 갈등론, 한 모둠에서는 기능론, 다른 한팀은 중도의성격을 띤 이름들을 가져왔다. 우리에게 당연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당연한 게 아니라는 것을 눈으로 몸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었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안다는 것, 그리고 그 다른 생각이 내 친구들에게서 나오면 더 재미있는 것 같다.



선생님은 우리의 결과물에 몹시 놀라기도 하시면서 굉장히 떨리고 기쁘다고 하셨다. 이렇게까지 우리가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너무나, 아니 우리 모두 너무나 힘들이지 않고 해냈기 때문에(그렇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선생님이 놀라시는 모습이 떨떠름하고 어리둥절했지만 우리가 잘해냈다는 것은 어쨌든 기쁜 일이었다.


오전까지는 새로운 것을 배웠다기보다 우리가 알고 있던 것의 재조명이어서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오후부터 머리를 싸매기 시작했다. 현미경으로 우리 학급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살펴보았다. 학급만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그 많은 틀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학급 안의 구성원들이 어떻게(교사-학생, 학생-학생) 상호작용할까?


고프만이라는 새로운 학자의 이론을 접하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 모두는 자아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둘째, 자아이미지는 타인에 의해 완성된다.


여기서부터 혼란이 온다. 우리는 '자아'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고 그 '자아'는 내 통제하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아이미지'는 그게 아니라, 내가 바라는 A라는 자아이미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A라는 자아이미지를 '연출'하더라도 타인이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자아이미지의 연출에 대해 얘기하면서 우리는 3월 첫날, 혹은 교사로서의 첫날 얘기를 꺼내본다. '만만해 보이지 않기'위해, '덜 권위적'으로 보이기 위해, '허용적'으로 보이기 위해, '친근하게' 보이기 위해 우리가 그 날 입었던 옷, 했던 말과 행동, 구성하고 펼쳤던 활동들이 있었다. 쓰다보니 교생이었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는 교수학습과정안이 정말 대본같았다. 나는 아이들 앞에서 '진짜 교사'처럼 보이기 위해 그 대본을 숙지(!?)하고 교실이라는 무대에서 나의 자아이미지를 연출한 셈이다. 아이들도 나를 바라보며 내가 의도하는 그 자아이미지를 가져주길 원하면서 말이다.


이제는 반대로 학생의 입장에서 그들이 연출하려고 한 자기이미지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예를 들어 엉뚱한 대답을 하는 학생이 있다고 하자. 아이들은 그 아이의 엉뚱한 대답에 웃곤 한다. 그 학생은 항상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그런 행동을 한다. 선생님의 지적도 그때뿐이다. 이 학생이 연출하려고 했던 자기이미지는 무엇이었을까? 재미있는-? 재치있는-? 선생님을 어쩔 수 없게 하는-? 유쾌한-? 이 부분에 대해 얘기할 때에는 PDC에서 배웠던 네 가지 잘못된 신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이 자기이미지가 학급이라는 사회를 움직이는 데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우리 사회가 계속 변화하는 것처럼, 학급도 3월 2일에 만나는 그 순간부터 헤어지는 순간까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변해간다. 그 변화의 패턴을 '구성-위기-재구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뭔가 정-반-합 같다.) 구성은 자기 이미지가 굳어진 고착의 상태라고 이해하였다. 우리가 학생이었을 때를 돌아보면 '조용한 아이', '활발한 아이', '까불이', '흥분을 잘하는 아이' 등 그 아이를 떠올리면 연결되는 이미지가 있었다. 이미지가 정해져 있어서 우리는 그 아이의 말과 행동이 어느 정도 예상되고 불안하지 않다. 위기는 이 상태가 깨지고 금이가는 상태다. 위기의 모습은 소외, 배제, 낙인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소외, 배제, 낙인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느낌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맥락에서 튀어나왔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위반'이라는 용어가 기억난다. 위반은 나에게 부여된 자아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행하는 것이다. 위반은 타인에게 불편함, 당혹감을 준다. 조용하던 학생이 활기차게 변하거나 반대로 활기차던 아이가 조용하게 변할 때 우리는 어색함을 느낀다.


위기를 거쳐 자아이미지가 새롭게 구축되고 지속되면 이것이 재구성이다. 재구성이 곧 다시 구성이 되어 '구성-위기-재구성'의 사이클이 돌아간다.


위반으로 위기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상대는 그대로인데 상대의 자아이미지를 구축하는 '나'의 '해석'이 바뀌어 위기가 오기도 한다. 이와 관련된 사례를 얘기할 때 나는 굉장히 슬펐다. 전형적인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그 아이는 순천에서 문제아로 전교에 소문이 나서 부모님이 일부러 우리 학교로 전학을 시켰다. 나는 그 사실을 3월 학부모 상담 때야 알았다. 나는 전혀 그 아이가 문제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료장학 때 그 아이와 우리반 학생들은 본 선생님들이 '산만하다' '기본 학습 습관이 잡혀 있지 않다'고 (또는 그런 뉘앙스의 말을) 말씀하셨고 나는 그날 이후로 우리반을 볼 때마다 너무나도 짜증났다. 특히 **이가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엉덩이를 뗄 때마다 예민해졌다. 다시 나의 해석을 바꾸기는 힘들었다.


**이처럼, 학급의 구성원들이 환대-상대가 구축한 '나'의 자아이미지가 '나'에게 수용이 되는 상태-받으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첫째, 교사의 해석을 바꾸는 것이다. **이의 경우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인가?(내가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 부분은 교사의 마음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둘째, 아이들이 그 아이에 대한 해석이 바뀔 수 있게 돕는 것이다. 공개적으로 그 아이의 말이나 행동을 교사가 짚어준다든지, 장점을 찾아주는 격려활동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셋째, 학생 스스로의 위반을 돕는 것이다. 만약 **이가 차분한 이미지를 바라고 있다면 그 방법을 일러줄 수도 있을 것이다. 넷째, 상황을 바꾸는 것이다. 돌아다니는 아이가 '산만한' 이미지라면 모두가 돌아다니는 수업을 만들어서 그 아이가 다른 아이와 똑같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섯 번째, 교사의 위반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지 아직 이해가 안된다.


망원경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교사가 해야하는 일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만이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다. 내가 찾은 답은 다음과 같다.


첫째, 외부적인 요인과 틀 안에서 교사는 자유로이 휘젓고 다닐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앞서 말한 교육과정이라는 틀을 이해하고 해체하고 소화하여 내것으로 만든 뒤 이용해먹는(!) 것이다. 뭔가 쓰다보니 의지와 힘이 생긴다. 둘째, 때로는 그 틀을 위반하는 것이다. 오후 수업에서 빌린 느낌으로 다르게 말하자면 고분고분 순응하는 교사의 이미지를 위반하는 것이다. 올바르지 않은 교육정책은 비판하고, 가깝게는 관리자의 틀도 깨는 것이다. 셋째, 학급 내의 상호작용 질서를 이해하고 서로 환대받는 분위기 조성을 위해 그 방법을 찾아 실천한다. 그 방법을 찾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누군가에게는 PDC, 누군가에게는 프로젝트 학습, 누군가에게는 하브루타, 누군가에게는 온책읽기 등 교사의 철학에 따라 아이들의 특성에 따라 HOW는 달라진다.


신선한 경험이었다. 오랜만에 공부한 느낌이다. 당장 나의 교실에서 무슨 활동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새로운 눈을 떴다. 선생님 말씀처럼 한번 이런 렌즈로 바라보았다면 다시 이렇게 안보기가 어렵다는 말이 와닿는다. 당장 오늘 학생과 상담할 때도 '@@이가 친구들에게 연출하고 싶은 자기이미지는 무엇일까'라고 속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수가 끝난 뒤에도 배운 용어가 맴돌고 까먹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2시간에 걸친 정리가 사라지게 될 기억을 돌이킬 때 도움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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