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항수 Jan 08. 2018

학교를 둘러싼 목소리들

학교라는 사회: 학교제도와 정책

1. 들어가며


시대마다 일상 같은 존재가 있다. 예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특별하지는 않지만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무언가 말이다. 중세의 유럽에는 교회가 그런 존재였다면, 현대의 대다수 국가에서는 학교가 그렇다. 한국에서 학교생활이 일상이 된 건 고작 6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이는 초등학교 취학률을 기준으로 했을 때이고 고등학교 졸업률을 기준으로 한다면 훨씬 짧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가 학교 없는 삶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학교는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지지 않았다. 그 사회의 경제구조, 문화, 시대정신, 집단기억 등이 씨줄과 날줄로 만난 결과다. 초창기 학교의 모습과 지금의 그것은 다르고, 앞으로도 계속 변화할 것이다. 따라서 학교를 보면 사회를 읽을 수 있고, 사회를 보면 학교가 어떤 모습일지 예측할 수 있다.

학교는 사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 안은 구성원들의 고유한 삶으로 채워진다. 각각의 삶은 학교의 독특한 질서 안에 자리한다. 학교 생태계의 한 축은 제도와 정책이다. 다른 한 축은 문화다. 둘은 서로 영향을 미친다. 이 글은 학교를 구성하는 제도와 정책에 초점을 맞춘다. 그 안에 담긴 여러 담론 사이의 알력다툼을 읽어내려 한다.


학교제도와 정책을 살피기 전에 주의할 점이 있다. 어떤 제도나 정책이든 처음 수립될 당시의 상황적 배경이 있다. 그 제도와 정책이 현재와 맞지 않더라도, 심지어 당시 상황에서도 의도한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했더라도 한 번 정착되면 바꾸기 쉽지 않다. 단일한 제도와 정책이더라도 사회의 여러 분야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e)이라고 한다. 이는 개인의 습관과 비슷하다. 습관은 개인의 삶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습관 중 대다수가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살아가다보니 만들어진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의식적으로 습관을 바꾸기란 어렵다. 지금 이 순간도 몸에 밴 습관이 내 일상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제도와 정책도 이와 비슷하다. 세 살 적 버릇이 여든 간다는 말이 습관 형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제도와 정책의 수립과정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수립과정만큼 중요한 게 실행과정이다. 법치사회에서 제도와 정책은 법령이나 조례처럼 글로 쓰인다. 그러나 글 자체는 여러 차례 옮겨 써도 변하지 않지만 해석은 읽는 이에 따라 달라진다. 글쓴이가 의도대로 독자를 설득하지 못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는 것처럼 제도와 정책 역시 수립 의도와 맞지 않게 해석될 수 있다. 하나의 제도와 정책이더라도 수많은 가치관들의 충돌과 합의 끝에 나온 만큼 해석이 다양해질 여지가 많다. 이는 명문화된 제도와 정책이더라도 실행하는 이들의 가치관에 따라 실현되는 양상이 달라짐을 뜻한다. 결국 제도와 정책은 수립과정뿐만 아니라 실행과정에서도 여러 담론 사이의 알력다툼이 존재한다. 이처럼 학교는 평범한 일상의 반복으로 나타나지만 그 과정에는 보이지 않지만 치열한 싸움이 무수히 존재한다. 따라서 학교를 고정된 사물이 아니라 생동하는 생태계로 봐야 한다.


2. 세 개의 축


학교의 기능은 크게 변화와 선발로 나눌 수 있다. 학교는 기본적으로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따라서 학생의 바람직한 변화를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선발의 기능도 맡는다. 학생을 평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 진로를 결정한다. 학교제도와 정책은 결국 학생의 바람직한 변화란 무엇인가, 어떤 기준으로 학생을 선발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제도와 정책이 수립되고 실행되는 과정까지 고려해야 학교를 둘러싼 사회구조가 좀 더 명확히 보인다.


가. 변화: 가치 충돌


학교가 생긴 이래, 학생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 방향은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반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다. 학교의 교육방향을 결정하는 세 가지 기준이 있다. 첫째는 국가의 필요다. 국가 체제로 움직이는 현대사회에서는 국가의 성장 동력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국가가 운영하는 학교는 국가가 설정한 인재상에 맞춰 교육한다. 문제는 이 인재상이 고정불변이 아니요, 단일하지도 않다는 점이다. 산업혁명 직후에는 매뉴얼을 읽고 그에 따라 일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시대의 빠른 변화를 파악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하다. 이처럼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사회의 제반 조건이 변화하기 때문에 국가가 추구하는 인재상도 변한다.


그러나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같은 시대에도 인재상은 단일하지 않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산업혁명 직후에도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고 새로운 사업을 일군 사람이 경제성장의 선봉대였다. 그렇지만 산업분야가 다양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그런 사람은 소수로 충분했다. 오히려 부족한 건 어느 정도의 문해력과 산술 능력을 가진 노동자였다. 이런 이유로 당시 학교교육의 초점은 3Rs에 맞춰졌다. 그리고 소수의 엘리트는 적어도 공교육의 주요 대상은 아니었다. 현대에도 국가의 인재상은 단일하지 않다. 현대사회는 변화가 너무 빠른 나머지 어느 분야에서 거대한 가치가 창출될지 예상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국가는 폭넓은 분야를 알고 이를 창의적으로 연결 지을 수 있는 인재를 요구한다. 또한 인류의 지식이 워낙 방대해졌을 뿐만 아니라 확장되는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고 있기 때문에 개인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국가는 개인 차원의 능력과 더불어 상호 연결된 집단의 일원으로서 일할 능력을 요구한다. 동시에 여전히 매뉴얼에 따라 동일한 업무를 반복적으로 해야 하는 일자리가 많다. 국가는 자신의 직장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서도 묵묵히 살아낼 사람도 필요하다. 이처럼 국가는 언제나 다양한 종류의 인력을 요구한다. 학생을 대상화-도구화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비판의 입장에 선 이들은 학교교육이 특정 계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현실을 국가의 필요로 포장했을 뿐이라고 폭로한다. 더불어 학교가 시민의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키지 않고 지금 사회를 재생산하는 역할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는 시민의 자질이다. 국가라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필요한 자질은 단지 경제적인 측면만 있지 않다. 시민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변화시킬 책임이 있다. 질서의 유지와 변화 중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교육은 달라진다. 질서는 우리의 행위와 사고를 강제하지만 자유를 제공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교통신호는 통행자의 이동을 제약하지만, 통행자가 교통 환경에 덜 집중해도 안전할 수 있게 해준다. 이처럼 기존의 제도와 정책은 시민의 행위와 사고를 제약하지만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최소화하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보존한 여력을 다른 분야에 투입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다. 그러나 같은 질서 안에서도 누군가는 이익을 보는 반면 다른 이는 손해를 본다. 지금의 질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어떻게 바꿔나가야 할 것인가를 사유하고 실천하도록 환경을 만드는 것도 교육이다. 하지만 질서를 바라보는 관점 역시 계속 변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여러 개가 공존한다. 결국 이 역시 학교교육을 둘러싼 갈등의 원인이 된다.


한편, 한국은 해방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도 독재정권의 정치적 핍박을 겪었다. 시민은 언제나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데 그들의 목소리는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상황에서 정치교육은 시행될 수 없었다. 독재정권이 무너진 이후에도 40년 정도의 세월 동안 제도와 정책, 그리고 관습에 스며든 비민주적 요소는 여전히 공고하다. 학교에서 시민의 자질을 높이는 교육하기 위해서는 학교 구성원이 참여하는 자치제도부터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하지만 그 실현까지는 아직 요원해 보인다. 관리자도 교사도 학생도 정책입안자도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민주주의를 그리는 상황이다. 지금도 학교의 민주화는 정책이나 제도를 수립할 때 우선순위가 아니다. 시민의 여러 정의(Definition)와 시민교육의 중요도를 두고 학교는 갈팡질팡하고 있다.


마지막 기준은 개인의 성장이다. 즉 개인이 가진 가능성을 최대한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얼 가능성으로 볼지, 어떤 능력이나 태도를 보다 높이 평가할지는 언제나 논란거리다. 앞의 두 가지 사회적 기준과 분리하여 판단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능력을 수치화할 수는 없지만, 어떤 학생의 신체유연성은 90점, 언어논리성은 83점이라고 하자. 학교는 인적자원관리 관점에서 이 학생은 언어논리성을 높이는 편이 좋다고 판단할 수 있다. 관련 산업이 국가총생산을 높이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또 성실한 태도는 누군가에게는 높이 평가받지만, 다른 쪽에서는 성찰하지 않는 성실은 악(惡)이 된다고 보기도 한다. 이처럼 개인의 성장은 흔한 수사지만 무엇이 진정한 성장인지를 결정하기란 쉽지 않다. 이 역시도 절대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셈이다.


학교는 언제나 학생의 바람직한 변화를 목표로 한다. 그러나 무엇이 바람직한지는 제대로 말을 못한다. 자신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나. 선발: 기회 경쟁


학교의 두 번째 기능인 선발은 학교의 기원에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부모의 지위를 물려받는 게 당연시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한정된 자원을 분배할 기준이 마땅치 않다. 표면적으로나마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가치가 현대 사회의 주요 원칙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원칙을 깨지 않으면서 공평한 기준은 뭘까. 개인의 노력이다. 학교라는 조건은 평등하니 학생의 노력에 따라 보상을 다르게 하자. 이것이 학교가 선발 기능을 맡게 된 배경이다.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지금 사회를 관통하는 관념이다. 개인은 능력과 노력에 따라 더 나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이를 능력주의(Meritocracy)라고 한다.


이제 학교는 단순히 바람직한 변화를 위한 장소가 아니다. 더 나은 보상을 위해 경쟁하는 장이 되었다. 그러나 경쟁에는 기준과 과정, 결과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자신에게 유리한 규칙을 위해 사람들은 목소리를 드높이게 된다. 이러한 투쟁은 선발의 기준과 과정, 결과를 가리지 않는다.


우선 선발의 결과는 표면적으로는 크게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다수의 사람들이 능력주의를 믿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은 학교에서 좋은 성취를 보인 학생이 더 나은 자원을 얻고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결과를 어떻게 다르게 할 것인가는 의견이 갈리게 된다. 단순히 진학에 차이를 둘 것인가 아니면 취업을 비롯한 이후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게 할 것인가. 이런 관점의 차이는 대학 조건(지방대 살리기 등)이나 평가 결과 기록에 대한 제도와 정책을 변하게 한다. 결과에 따른 보상 차이가 클수록, 달리 표현하자면 계층 간 사회경제적 지위 차가 클수록 교사와 학생은 교육에 몰입하기가 어렵다. 교육 중인 현재보다는 결과가 나올 미래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상의 차이는 교육계에서 단독으로 제한하기 어렵다. 결국 양질의 일자리가 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선발 결과의 차이가 커지면 사람들은 선발 기준에도 민감해진다. 선발 기준은 대학과정에 도움이 되는 영역으로 하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기준이 복잡하고 다양해질수록 여러 영역을 준비하기 어려운 입장에 놓인 사람은 불공평하다고 느낀다. 학생의 능력보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기준을 단순화하면 과정이 복잡해진다. 한편, 가정환경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 기준을 달리한 지역균형·기회균등 전형 역시 능력주의에 맞지 않다고 공격받는다. 이는 선발 기준을 둘러싼 갈등이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선발 기준과 결과는 과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선발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될수록 과정에서 객관성을 중시하게 된다. 객관성을 높이는 방법은 정량평가뿐이다. 정성평가는 결국 평가자의 판단이 개입된다. 두꺼운 학생생활기록부 작성 지침에 따라 글자 수를 세어 가며 NEIS에 정보를 입력하더라도 평가자의 주관을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평가에 대한 불신이 높아질수록 선발 과정은 하나로 수렴된다. 대학수학능력시험과 같은 선다형 평가다. 최근 들어 대입 평가를 수능으로 단일화하자는 의견이 다시 나오고 있다. 이는 선발의 기준과 과정에 대한 불신의 표출이다. 더 나아가 선발 결과가 학생의 나중 삶의 질을 크게 좌우한다는 현실 인식 때문이다.


선발 경쟁이 과열될수록 선발 준비를 시작하는 시기는 점점 앞당겨진다. 이는 단지 선행학습과 같은 개인의 노력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자식의 성공을 바라는 학부모 그리고 눈에 보이는 성과를 바라는 정책가와 행정가들이 힘을 모아 초·중등교육을 흔들어댄다. 최근 초등학교의 담임 평가제나 중학교의 자유학기제 등이 시행될 때 학생의 바람직한 변화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선발 준비에 소홀해지지 않을까 우려를 표한 이들이 많았다.


이처럼 사회 구성원이 학생의 변화와 선발을 바라보는 관점은 학교제도와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학교교육이 자신의 계층에 유리하도록 사회적 압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구성원이 동등한 힘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학교는 어느 집단에게 더 유리하게 기능할 수밖에 없다.


다. 운영: 권력 투쟁


학교제도와 정책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학교의 기능뿐만 아니라 학교의 운영 방식도 살펴야 한다. 학교의 기능이 제도와 정책의 내용을 결정한다면 운영 방식은 형식을 결정한다. 같은 내용이더라도 형식에 따라 전혀 다른 글이 되는 것처럼 제도와 정책은 운영 방식에 큰 영향을 받는다.


한국의 학교교육은 국가를 중심으로 운영된다. 따라서 학교를 둘러싼 제도와 정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료제와 관료주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현재 관료제와 관료주의는 동일한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지만 엄밀히 따지면 둘은 분리된다. 관료제는 조직을 구성하고 운영하는 방식 중 하나로 문서와 절차를 중시한다. 관료주의는 관료제가 지배하고 있는 국가의 기관에서 나타나는 의식형태다.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관료제의 장점은 신속성과 합리성이다. 반대로 단점은 보수주의, 형식주의, 파벌주의 등으로 나타나는 관료주의다. 한국의 관료제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단점인 관료주의에 쉽게 동의하겠지만, 장점에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 어려울 것이다. 이는 한국의 관료제가 기형적으로 운영되어왔기 때문이다. 즉 관료제의 문서와 절차가 헌법이나 법과 맞지 않거나 공무원들이 문서와 정해진 절차에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관료제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건 비단 한국의 문제만이 아니다. 흔히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되는 국가 대부분의 현실이다. 사회가 불안정할수록 관료제는 힘을 잃기가 쉽다. 관료제의 동력인 공무원이 자신의 이익을 챙기거나 보신하는데 집중하기 때문이다. 공무원의 처우가 상당히 개선된 지금의 한국에서도 관료제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이유는 관료주의로 인해 공무원 업무 문화가 크게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료제를 실시함으로써 한국의 학교교육 환경은 급격히 변했다. 실제로 초등학교 취학률은 한국전쟁 후 수년 만에 90%를 넘었고 교사 수도 금세 늘릴 수 있었다. 이는 관료제가 아니라면 달성하기 어려운 성취다. 문제는 관료제와 교육이 그리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라는 점이다. 관료제의 합리성은 교육의 예술성을 막기 쉽다. 관료제의 특성상 공무원인 교사의 교육활동도 문서와 절차에 따라야 한다고 본다. 교육부는 교사를 대상화, 도구화, 수단화하게 되고 그 결과 교사 집단은 무기력을 느끼게 된다. 무기력이 장기화되면 교사는 수동적이고 보수적으로 되는데 이는 교육 장면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학생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교육부는 학생의 현황을 수치화하고 관리한다. 최근에는 신체를 넘어 정서까지 관리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교사와 학생의 상태가 문서와 절차에 맞지 않을 때 교육부는 더 많은 문서와 절차를 만들어낸다. 악순환인 셈이다.


자원의 효율적인 사용을 위해 관료제는 필요한데 교육과 맞지 않는다. 대부분의 국가가 가진 딜레마다. 학교에 자원을 배분하고 자율성을 부여하면 된다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신뢰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어렵다. 학교를 좌우하는 목소리가 다양한 만큼 학교가 자율화가 된다면 교육이 어떻게 될지 국가가 예측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다수의 학교가 선발 준비에만 집중한다거나 이주민처럼 특정 집단이 배제될 수 있다. 이는 또 다른 갈등의 시작이 된다.


국가와 학교 간 관계만큼 중요한 건 학교 안에서 권력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이다. 지금까지 학교의 최고 권력자는 관리자였고, 다른 구성원들의 권력은 미미했다. 이는 관료주의의 심화를 야기했다. 구성원들이 서로 협력하면서 경우에 따라 견제가 가능한 구조를 만들 필요가 있다.


결국 학교의 운영 방식은 학교 구성원에게 자율권을 얼마나 주느냐와 연결된다. 국가적 관료제와 지역-학교 자치, 그 사이 어딘가의 황금률을 찾는 과정이다. 어찌 보면 현대 민주주의의 딜레마와도 비슷하다. 대의 민주주의와 직접 민주주의 모두 완벽한 답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3. 나오며


지금까지 학교를 둘러싼 수많은 목소리들의 다툼을 간략하게나마 스케치해보았다. 이처럼 학교제도와 정책은 수많은 담론이 치열하게 싸운 결과다. 그것은 학교를 움직이는 질서가 된다. 학교는 여기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리고 질서는 습관처럼 바꾸기가 어렵다.


학교를 변화시키려는 사람이라면 학교를 둘러싼 사회구조를 파악할수록 위축되기 쉽다. 과연 학교가 바뀔까 하며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결국 정책과 제도는 사람이 만든다는 점이다. 더 많은 이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방향으로 사회는 변화한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학교를 바꾸고 싶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누군가도 함께 외칠 것이다. 그럴 때 학교는 조금씩이나마 그 방향으로 선회한다.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는 그람시(Gramsci)의 말처럼 앞이 깜깜해도 나아갈 때 길은 열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학급이라는 작은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