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수를 위한 변명
<서브스턴스(2024)>
코랄리 파르쟈 감독의 <서브스턴스>는 아주 명쾌하고 간단하게 요약가능해 보인다. 말하자면 아름다움을 탐하는 여성이 자신의 욕망 때문에 몰락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많은 후기들은 이렇게 엘리자베스의 행보를 축약한다. 나는 여기에 의문을 품는다. 과연 그런가? 엘리자베스 스파클의 불꽃 튀는 반짝임, 혹은 번쩍거림은 단지 '아름다움'을 좇으며 '몰락'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였던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왜 이런 '요약'에 부당함을 느끼는가?
깃털처럼 가벼운 '아름다움'의 무게
엘리자베스는 왕년에 오스카를 받았고, 명예의 거리에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새겼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여성 연예인이었다. 쉰이 가까운 그녀는 사람들에게 잊혔음에도 여전히 에어로빅쇼의 진행자로 카메라 앞에 서서 날씬하고 잘 가꿔진 외모를 뽐낸다. 홀로 전망이 좋고 부유함이 흘러넘치는 집에서 자신의 삶을 나름대로 이어나가던 엘리자베스의 50세 생일날, 엘리자베스는 갑작스레 자신의 쇼에서 해고를 당한다. 여기에 더해, 엘리자베스는 그 이유를 적나라하게 깨닫게 된다. 여자화장실의 수리로 인해 잠시 남자화장실에 들어섰던 엘리자베스는 프로듀서가 늙은 여자가 얼마나 오래 버텼는지를 조롱하는 목소리를 똑똑히 듣게 된다. 황망한 감정에 잠긴 엘리자베스는 가벼운 교통사고로 병원에 들르고, 이때 의문의 남자 간호사에게 처음 서브스턴스에 대한 정보를 은밀하게 전해받는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첫 반응은 무시이다. 엘리자베스는 허황되고 수상쩍기 짝이 없는 사탕발림에 곧바로 현혹되는 대신에, USB를 쓰레기통의 가장 끝에 집어던져 버린다.
엘리자베스가 다시 USB를 집어 들기까지 엘리자베스는 모욕을 더 감내해야만 했다. 얼굴이 지워지고, 쇼가 취소되고, 엘리자베스를 대신할 호스트 모집 광고가 걸리는 일련의 모욕들이 이어진다. 이 끝에 결국 엘리자베스는 광기와 슬픔, 분노와 절망에 휴지통을 뒤져 다시 서브스턴스 USB를 집어 들고 만다. 여기서 그녀의 행동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간단히 요약된다.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 혹은 '사랑받고 싶은 욕망'. 정말 그러한가? 엘리자베스의 평정을 온통 뒤흔들어놓은 것이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한 무가치한 열정인가?
으레 여성은 허영과 사치, 그리고 몰지각한 욕망에 사로잡히는 존재로 그려져 왔다. 이런 맥락에서, 여성이 '아름다움'을 좇다 몰락하고 마는 이야기들은 낯설다기보다는 진부함에 가깝다. '빨간구두'는 정숙이나 겸손 같은 미덕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화려한 아름다움을 뒤따르다 영원히 춤을 추는 벌을 받고 결국 발목이 잘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아름다움은 추종과 열광의 대상이며 여성의 가치이며 미덕이다. 여성은 아름다워야 하는 동시에 정숙해야만 하는데, 따라서 아름다움을 유지하되 자신을 가꾸는 노력은 수면 아래에서 은밀하게, 그 자신조차 모르도록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향해 움직이는 여성의 모습은 따라서 아주 쉽게 '허영덩어리'의 이미지로 일축되고 만다.
엘리자베스는 쇼비즈니스에서 자신의 일생을 갈고닦아온 노련하고 완숙한 여성이다. 그녀는 쉰의 나이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외형을 지녔으며, 셀럽다운 화려한 노란 코트를 휘날리며 길을 걷는다. 카메라 앞은 그녀가 잘 알고 있고 오랜 시간을 살아온 엘리자베스의 세상이다. 그러나 단 하루 만에 그 세상은 엘리자베스를 쫓아내고 만다. 물론 엘리자베스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아직 아름답고, 부유하고, 그녀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흠모하는 주변인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헤아리기에 엘리자베스는 지나치게 금이 간 상태이다. 왜냐면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세상에서 추방당했고, 조롱당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쌓아왔고, 그녀를 지탱해 온 커리어에서 엘리자베스는 쫓겨났다. 젊고 아름답지 않다는 이유로! 그렇기에 망설임 없이 휴지통에 던져 넣었던 USB를 다시 손끝으로 더듬어가며 꺼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엘리자베스는 아름다움과 젊음에 집착하게 된다. 그녀의 세상에 다시 수용되기 위하여. 자신을 다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렇다. 엘리자베스는 아름다움과 젊음에 집착한다. 그렇게 행동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를 '아름다움을 좇는',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지닌 인물이라고 설명할 때, 그녀의 고통이 한없이 가볍고 덧없는 것으로 희석된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욕망, 어리석음, 여자.
젊음과 아름다움을 획득한 엘리자베스는 다시 남성들의 앞으로 돌아간다. '아름다운 여자는 미소 지어야 한다' 고 말하는, 오로지 여성을 착취할 생각으로만 가득한 남성들의 앞으로.
그 정도의 젊음, 그 정도의 아름다움을 획득하고서도 그녀의 목적지가 고작해야 에어로빅쇼 호스트의 오디션이라니. 이상한가? 그러나 엘리자베스, 아니, 수에게 이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수는 다시 자신의 삶을, 자신의 세상을 돌려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게 수가 아는 삶의 작동 방식이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조목조목 나누어 평가하고 즐기고, 조롱하는 남성들의 앞, 카메라의 앞, 대중의 앞.
젊음, 아름다움, 그로 인한 관심과 인기를 통해 수는 살아있음을 느꼈을까? 그녀에게 직접 들을 수는 없으나, 마치 방종처럼 그려지던 수의 행동을 저지하고 욕보이고 싶어 하는 엘리자베스의 마음은 짐작해 볼 수 있다. 멈추어야 된다고 쉼 없이 되뇌며 수없이 자기 자신을 다시 통제하고 싶어 하던 엘리자베스, 자신을 되찾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하여 프레드와의 약속을 잡던 엘리자베스의 마음을. 수를 중단하고 싶지만 수를 통해 되찾은 삶을 도저히 끝낼 수 없었던 엘리자베스의 간절함을. 엘리자베스는 그저 욕망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인물이었을까? 수를 멈추고 싶은 마음과, 그럼에도 끝내는 수를 멈출 수 없는 마음. 이 모두는 삶을 위한 발버둥이 아니었을까? 이것을 욕망이라고 한다면, 살아있기 위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화무십일홍이라고 하던가? 아름다움이 허무할 뿐이라는 지혜로운 말은 인간이 머무는 곳이면 넘쳐흐른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에게, 수에게, 젊음과 아름다움 위에서 가능한 삶에게 지혜의 격언들이 무슨 소용이며,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남자들은 여성을 아름다움의 구렁텅이로 밀쳐놓고는 동시에 아름다움을 경계하라는 가르침을 외친다. 그 사이의 고통은 모두 여성의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와 엘리자베스의 여정은 위태로워 조마조마하다. 하지만 결국에는 안정을 찾는다. 도달한 곳은 몰락의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나칠 정도로 과장되고, 따라서 우스꽝스럽게까지 보이는 모습은 일방향적으로 강요되어 온 남자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거부이고 조롱이다. 앞서 고통이 모두 여성의 것이라고 했던가? 언뜻 파멸처럼 보이는 극단까지 질주할 수 있는 힘도, 여성의 몸을 온통 난도질해 놓을 수 있는 것도, 그렇게 아름다움을 이용하여 기쁨에 웃고, 결국에는 남자들을 조롱하며 비웃는 것 역시도 여성의 몫이다.
여기서 나는 다시 묻고 싶다. 그 끝이 아직도 몰락처럼 보이냐고. 엘리자베스 스파클이 충분히 반짝이지 않았냐고.
그랬지 않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