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타고 마르세유로 향했다. 마르세유를 향하는 기차에서의 풍경은 참 멋졌다. 이탈리아 친퀘테레에서의 풍경이 많이 겹치게 느껴졌다.
도착한 마르세유. 항구역에서 내려 걷는데, 좀만 걸으니 되게 모던한 건물들이 펼쳐졌다. 서울 한복판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 아니 그보다 더 화려한 건물들. 그곳에서 쭉 걸어가니 구시가지 관광지들이 보였다.
성당의 건축구조가 다소 동유럽식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조금 더 걸으니, 마르세유 내 제일 유명한 박물관인 유럽 지중해 박물관 (MuCEM)이 보인다. 로마 시대보다도 이전, 그리스의 식민도시로 시작했던 풍부한 역사가 이곳에 있다고 들었다. 다만 체력이 좋지 않은 아내에게 강요하면서까지 보고 싶진 않았다. 바다를 보다가 항구까지 오니 벌써 두 시간 넘게 걸었다. 시장하다고 생각하여 마르세유 현지 음식을 먹으려고 하던 와중, 배를 탈 수 있는 기회가 보인다.
참지 못하고, 배를 타보기로 했다. 행선지는 항구 바로 앞에 있는 섬, 이프 섬이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몬테 크리스토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최초엔 성으로 지어진 곳이, 19세기 말까지 감옥으로 쓰이기도 했다. 루이 14세의 참모이자 위대한 건축가인 보봉 (Vauban)은 이 성채가 너무나도 부실하게 지어졌다고 흠을 잡으며 다시 견고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곳엔 추후 프랑스 혁명의 중심 인물인 미라보가 갇히기도 했다. 미라보 아버지가 돈이 많은 덕분에 그는 다른 죄수들보다는 조금 나은 방에서 머물 수 있었는데, 그래봐야 그 방도 썩 나아보이진 않는다.
뒤마는 이곳에 실제로 방문하기도 했었다. 몬테크리스토 소설이 발간되자 이곳은 관광명소가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몬테크리스토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던 점도 인상적이다. 나폴레옹의 두 뛰어난 장군 뒤마의 아버지와 클레베르는, 좋은 친구이면서도 나폴레옹의 지시에 그다지 잘 따르지 않는 것도 비슷했다. 클레베르는 이집트 원정 도중 암살당했는데, 나폴레옹은 그가 본인보다 더 큰 명예를 얻는 것을 원하지 않은 나머지, 이프 섬에 그의 시신을 18년동안 묵혀놓았고, 뒤마는 재판 없이 2년간 감옥에 있다가 가난하게 죽었다. 이 두 가지 복합적 사건이 뒤마의 위대한 소설의 모티프가 되었다. 소설이 현실이 된 이 역사적인 공간에서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됐다.
다시 배를 타고 돌아와 시내로 걸어가는데, 관광지를 조금 벗어난 이 도시는 그다지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르세유 내지는 프로방스의 역사를 찾아보게 되었다.
모든 시작은 프랑스 제국주의. 19세기 초중반, 지상낙원인 프랑스 남부 해안의 기후와 유사한 알제리를 식민지로 먼저 삼았고, 이곳에 꽤 많은 프랑스 저소득계층이 이민을 하게 된다. 이들은 토착민들을 좋은 땅에서 밀어내고, 꽤 많은 갈등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들과 동화되기 보다는 그들 스스로를 프랑스인으로 여겼다고 한다. 이들을 검은 발, 피에 누아르라고 부르는데, 소설가 알베르 카뮈도 그 중 하나이다.
문제는 2차세계대전 이후. 워낙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였던 프랑스 제국에 많은 나라가 독립을 꿈꾸었고, 실제로 베트남은 독립을 이뤄냈다. 알제리 사람들도 그렇게 되기를 원했는데, 여기서 끼인 존재인 피에 누아르는 알제리인들과 함께 독립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편을 들고 알제리인들을 탄압했다. 그리고 그 반대의 상황도 벌어지기도 했는데, 결국 이는 전후 탄생한 제4공화국이 붕괴되게 만든 제일 큰 이유였으며, 새로 탄생한 제5공화국, 그리고 이 공화국에서 제일 막강한 힘을 가진 대통령인 드골도 골칫거리였던 알제리에 대한 유화정책을 펼쳤다. 여기서 알제리 게릴라군이 그들을 학살할 때에, 프랑스군은 그들을 돕지 않았다. 알제리가 독립한 이후, 드골은 그들이 프랑스로 너무 많이 돌아오는 것을 반기지 않았는데, 100만명 가량이 돌아오게 됐고, 그들은 지금 프로방스에 남아 대부분 극우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 1980년대 이후 알제리 경제가 급격히 붕괴하며 많은 알제리인들이 프랑스로 넘어와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그리고 마르세유가 그 중심에 있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프랑스의 근현대사를 쭉 살펴보다 보니, 지금 당장 프랑스의 경제가 위험천만한 것뿐만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 역사ㆍ정치적인 난맥상까지 살펴보게 됐다. 한편 위기가 기회가 된다는 것처럼, 외려 젊은 노동력을 이용해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을 수도 있다고 볼 수도 있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고, 인구 자체보다도 기술의 혁신이 성패를 좌우하는 현재 트렌드에서 그게 큰 의미가 있을까 싶다.
에필로그
프랑스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그 엄청난 역사와 문화, 자연 등에 대해 감탄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만 총 9시간 가까이 걸렸는데, 프랑스 땅덩어리가 얼마나 큰지 실감케 한다. 그냥 땅덩어리만 큰 게 아니라 정말 좋은 땅덩어리가 있는데, 그걸 왜 잘못 쓸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햇살 가득한 프로방스에서 독일로 오니, 계속 안개가 자욱하고 추운 날씨에 야외 활동을 꺼리게 되는데, 몇 달동안 이어질 겨울을 맞기 전에 좋은 날씨를 아주 많이 느끼고 왔구나 싶다.
아내는 레미제라블 영화를 보지 않았다고 해서, 나도 함께 다시 보니, 예전에 보지 못했던 부분들이 보인다. 어쩌면 프랑스가 그렇게 많은 혼란을 겪고 급진적으로 보이는 것 자체가 그들의 정체성이 아니겠냐는 생각이 제일 남는다. 앞으로 프랑스가 어떠한 선택을 하고 나아갈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럽연합 내 프랑스보다 강한 군사력은 없다는 사실, 비옥한 땅과 인적자원, 불어를 비롯한 대단한 문화의 저력이 그리 쉽게 무너질 것 같지는 않다. 아직도 내가 보기엔 이태리나 스페인보다는 더 나은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나저나 프랑스가 심각한 상황이란 건 뉴스를 들어 익히 알고 있었는데, 과격한 시위가 불과 한 달 전에만 해도 있었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보니, 아찔하게도 리옹이나 마르세유 같은 대도시에 있었고, 아무 일 없었다는 것에 감사해야겠다. 적어도 지금은 모두 일상으로 돌아가긴 했는데, 언제든지 터질 수 있는 시한폭탄과 다름 없다는 사실을 생각케 한다. 앞으로 프랑스, 그리고 유럽연합은 그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대부분의 정치인이 꼭 해야 할 결단을 뒤로 미루고 미래 세대에게 더 큰 짐을 주는, 폭탄돌리기를 하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혁명이 아니고서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회의 원만한 합의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