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 Jul 14. 2024

프랑스에서, 독일에서 엄마가 되었다.

유럽에서의 육아일기 1 - 프랑스 출산 후기

2024년 3월, 프랑스와 독일을 오가는 삶이 계속되던 해의 따뜻한 봄날, 나는 엄마가 되었다. 평소에도 아기를 좋아하고 언젠가 꼭 엄마가 되고 싶었던 나는 임신 기간 내내 아이가 빨리 세상에 나와 함께 모든 순간을 함께 하고 싶다고만 생각했다. 신생아 육아라는 것이 이렇게 육체적으로 힘이 드는 일이라는 것을 까맣게 모른 채 말이다.


독일 베를린에서 대부분의 임신 기간을 보내고 3월 출산 예정이던 아가와의 따뜻한 만남을 위해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출산을 계획했다. 시누이와 시어머니가 마르세유에서 차로 두시간 가량 떨어진 몽펠리에에 살고, 시조카가 우리 아이와 1년 차이가 나는 덕분에 우리는 독일살림과 겹치는 많은 아이 살림들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독일의 출산 예정일과 프랑스의 출산 예정일은 일주일 정도 차이가 났는데, 프랑스는 41주를 계산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 아기는 딱 그 중간 즈음 태어났다.


마르세유 바닷가 산책하던 임신 막달.


병원에 갔다가 다시 집으로 보내지는 일도 다반사라는 말을 듣고 새벽부터 수축이 찾아왔지만 최대한 집에서 짐볼을 타고 스트레칭을 하며 버텼다. 그리고 오후 1시쯤 간단히 점심을 먹고, 발을 한걸음을 떼는 것조차 힘들어질 때쯤 집에서 차를 타고 출발했다.


남편이 미리 차를 렌트해 놓은 덕에 병원까지 차를 타고 15분 안에 갈 수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분만대기실까지 가는 데 걷고 서고 끝없는 복식호흡을 반복, 그 와중에 계단을 오르면 분만이 쉽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그 아픈 와중에도 계단으로 3층까지 올라갔다. 그렇게 겨우 분만대기실도착해 누웠는데 병원 분위기 탓인지, 수축도 없는 것 같고 별로 아프지 않았다.


이렇게 집에 보내지는 건가- 하고 있는데, 간호사와 사쥬팜(sage femme: 일종의 산파,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의사대신 산파들이 아기 출산 전 과정을 돕는다.)이 수축과 혈압을 몇 차례 확인하고 피검사를 히더니 내가 원하면 내진을 하자고 했다. 무조건 하자고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미소 짓던 사쥬팜은 아직 자궁문이 1cm도 채 안, 열렸지만 자궁벽이 거의 없어진 거나 다름없이 얇아졌다며 밖에 나가 1시간 정도 걷고 오라고 했다.


병원을 나와 걷기 시작하자마자 어김없이 수축과 생리통의 10배에 달하는 미친듯한 고통이 배와 허리, 골반에서 골고루 느껴졌다.  따뜻한 마르세유가 이 날은 유난히 칙칙하고 바람도 많이 불어 그 고통은 배로 느껴졌다.


 남편에게 왠지 지금 아니면 먹을 기회가 없을 수도 있을 테니 샌드위치라도 먹자고 했다. 병원 앞 도보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카페에 가서 샌드위치를 시켰다. 한 입 베어 먹을 때마다 수축이 찾아왔고, 반 정도 먹고 남편이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남편은 내가 너무 아프면 지금 당장 병원으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나는 더 버텨야 된다고 했다. 그렇게 버티고 버텨 45분쯤 대기실로 돌아가 내진을 했다. 4cm가 열렸다고 했고,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내 팔에 병원 팔찌가 채워졌고, 남편이 "이제 시작이다, "라고 하며 뱃속의 아이에게 곧 만나자고 귓속말로 인사를 했다.


발을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는 나를 보며 사쥬팜이 바로 무통주사를 놓자고 했고 그렇게 나는 병원에 온 지 4시간 여만에 분만실에 들어가 무통주사를 놓고 분만에 들어갔다. 별 문제가 없으면 당연하게 자연분만을 하는 게 당연한 곳인지라 여러 자연분만 팁을 미리 알아보았지만, 무통주사를 일찍 맞는 바람에 스트레칭, 짐볼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무통주사를 맞은 채로 10시간 내내 진통도 거의 못 느끼고 무료해진 나와 남편은 핸드폰만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남편은 이 시간이 장거리 비행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보호자 의자는 가뜩이나 더 불편한 바람에 더 그랬을 거다. 나의 분만을 담당할 사쥬팜은 이제 막 시작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사쥬팜이었고, 영어를 아주 능숙하게 잘했다. 어찌나 친절한지 2시간에 한번씩 들어올 때마다 불편한 것은 없는지, 여러 사항들을 꼼꼼히 봐주었다.


그렇게 10시간이 넘도록 자궁문은 4cm인 그대로 더 이상 열리지 않았고, 나는 조금씩 몸을 움직이며 인터넷에서 배운 호흡법을 따라 해보기도 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새벽 2시가 다되어갈 때쯤, 나는 남편에게 지금 아니면 못 잘 테니 그냥 차라리 불 끄고 자자고 했다. 남편이 불을 끄고 안대를 껴고 눕는 그 순간 주르륵 양수가 터졌다.


사쥬팜이 들어왔고 나에게 지금 7cm 정도 열리고 아기 머리가 만져진다고 했다. 1시간 뒤에 10cm 열릴 것 같다고 이제 거의 다 왔다며 조금 뒤에 보자고  했다. 그리고 새벽 5시경 분만이 시작되었다.


"알레 알레 알레 알레 알레 (Allez, allez, allez, allez, allez: 영어로 'Go, ' 한국어로는 가보자! 정도 되겠다.)" 살면서 가장 알레알레를 많이 들어 본 날이다. 이미 몸은 지친 대로 지친 상태에서 새벽 5시에 힘을 주려니 힘은 나지 않았고, 그동안 배워왔던 호흡법은 순식간에 다 까먹어버려 호흡을 제대로 하라고 계속 지적을 받았다. 그렇게 40분이 넘어가자 사쥬팜이 더 이상 안 되겠다며 의사를 불렀고,  스패츌러를 이용해 분만을 조금 더 빠르게 진행하자고 했다. 마취제가 더 들어가자 갑자기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고, 병원 스태프들이 내 다리를 잡아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스패츌러를 이용한 아시아인의 자연분만. 병원에 소문이 났던가, 내 눈에는 5명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남편 말로는 분만 당시 분만실에 15명은 족히 되는 스태프들이 있었다고 했다. 그야말로 콘퍼런스가 열렸다. 젖 먹던 힘까지 써가며 열심히 힘을 주는데도 아기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거의 울다시피 -아기가 나오기는 하냐,-고 물었고 의사와 스태프들이 웃으며 거의 다 왔다고 했다. 그리고 한 간호사는 계속 아이가 머리숱이 많다고, 'a lot of hair(얼 랏 오브 에어)'라며 h발음이 안 되는 프랑스식 영어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느 순간 나는 그냥 모든 이들이 닥치고 나를 내버려두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점점 스트레스를 받는 나를 보며 남편이 사쥬팜에게 '내가 너무 스트레스받는 것 같은데,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아니냐,' 고 불평아닌 불평을 했다. 사쥬팜이 나에게 다가와 나를 안심시키려고 애를 썼지만 딱히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나중에 친구들 말로는 대학병원에서는 피해 갈 수 없는 광경이라고 했다.


그렇게 의사가 오고 몇 분이 지나 마지막으로 최대한 힘을 줬고 사쥬팜이 '아기 머리 나왔어!'라고 했다. 그 뒤로 슬슬 힘을 빼라고 했고, 한 1분쯤 지나자 '응애 응애, '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나와 남편은 동시에 눈물이 터졌다. 간호사가 아기를 수건으로 닦인 후 아기 모자만 씌운 채 스킨투스킨(skin to skin)을 위해 나에게 안기고 젖을 물려주었다. 세차게 울던 아기는 정말 신기하게 내 품에 안기자마자 울음을 그치고 젖을 물었고, 내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남편에게 빨리 가족들에게 사진을 보내라고 했고, 한국말이 서툰 남편은 정말 아기와 내 사진만 가족 카톡방에 보내놓았다.


남편과 아기를 안고 분만실에서 잠시 대기를 하고 있는데 정신없이 스태프들이 드나들며 아기의 이름, 독일 건강 보험카드 등등을 챙겼다. 아기에게 아기 이름 -레아- 와 출생연월이 함께 적힌 팔찌가 채워졌다.


 내 분만을 돕던 사쥬팜은 교대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끝까지 자리를 지켜줬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와서 '수고 많았다, 아기가 참 예쁘다, 너무 아름다운 과정이었다, '며 내 손을 꼭 잡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퇴근을 했다.


우중충하던 전 날과는 달리, 우리 아기가 태어난 그날의 아침은 병실 창가에 따뜻한 햇살이 기분 좋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프랑스에서 엄마가 되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