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동화 '늪의 초대'

여러분에게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by 유선미

01 늪의 초대

옛날 아주 먼 옛날. 당근처럼 붉은 털을 가진 여우 한 마리가 살았다. 붉은여우는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을 동경했다. 어느 햇빛이 은은하던 봄날, 태양에게 고백했다.


"아름다운 태양님! 나와 함께 이 늪에서 살아요!"


태양은 푸른 하늘에서 다정하게 햇살을 비추며

"여우야, 그곳은 너무 축축해. 그러니까 밖으로 나와 바람과 함께 걷자."라고 말했다.



그 말은 여우의 가슴을 깊이 파고들었다. 여우는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진흙으로 엉망진창인 털과 엉겨 붙은 볼품없는 꼬리, 초라한 자신의 모습이 견딜 수 없을만큼 부끄러웠다.


'이렇게 더러운 나를 사랑해 줄 리 없어. 그래서 저렇게 말하는 거야.'


밖으로 나갈 용기는 없었고, 혼자 있기는 창피했다. 결국 태양의 빛을 가려버릴까 고민하다 끝내 도망쳤다. 더 깊은 늪 속으로.



02 사랑이라 불리던 시간들

도망치는 여우의 뒷모습은 너무 가엽고 측은했다. 태양은 여우를 떨쳐낼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구나!'


태양은 스스로 늪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것이 축축하고 어두웠다. 태양은 습한 어둠 속에서 천천히 시들어 갔고 반대로 여우는 태양의 빛을 먹으면서 온몸에 반짝임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점점 선명해진 빛은 황금빛이 되었다. 금빛 털을 얻게 되자, 여우는 과거에 간절히 원했던 것들이 더 이상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늪도 지저분하게 느껴졌고 빛이 희미해진 태양은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았다.


'오, 나는 정말 아름답구나!'

오직 자신만이 가치 있게 느껴졌다.





03 붕괴


찬란한 금빛 털을 지닌 여우가 되어 마침내 세상으로 나왔다. 그리고 은빛 여우를 만나 한눈에 사랑에 빠졌다. 은빛 여우의 털은 달빛처럼 고혹적이었으나 차가웠다. 반짝이는 것들에 심취한 여우는 저를 위해 꺼져간 태양의 존재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태양이 스스로 내려온 거야. 강요한 적 없어.'


'그리고 이제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많을 테니까....'


늪에 갇힌 태양은 여우를 원망하지도, 돌아오길 빌지도 않았다. 다만 제 안의 슬픔을, 금빛 가루로 녹여 묵묵히 토해낼 뿐이었다.


'일생동안 몇 개의 사랑을 가질 수 있을까'

'그 사랑들은 다 진심일까'


태양이 뱉어낸 금빛 가루는 늪의 밑바닥에 쌓여갔다. 영원할 것 같던 세상의 빛이 기어코 태양과 함께 사라지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여우의 금빛 털이 벗겨지며 초라한 붉은 속살이 드러난 것이다. 은빛 여우는 경멸 어린 눈으로 말했다.


"내가 사랑한 건 네가 아니야, 네 몸에서 나오는 눈부신 빛이었어. 너는 나의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

그리고는 한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떠나버렸다.


내던져지고 나서야 여우는 장마에 무너진 댐처럼 붕괴되었다. 그리고 태양을 떠올렸다. 진흙이 묻은 자신조차 껴안아 주던 태양, 금빛을 나누어 주던 태양의 온기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04 불덩이


늪을 찾아갔지만, 그곳에 태양은 없었다. 비쩍 마른 몸으로 도착한 늪에는 태양이 토해낸 찬란한 금빛 가루들이 무덤처럼 쌓여 있을 뿐이었다.


'너를 버린 나를, 끝까지 미워하지 않았구나.'

'왜? 나를? 그렇게까지나...'


여우는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 통증으로 호흡이 곤란해졌다. 끅끅거리며 흘러나오는 뜨거움을 삼켰다. 그리고는 흩어진 가루들을 붙여 모으기 시작했다.


한 줌.

또 한 줌.


뭉치고 뭉친 뒤 늪 밖으로 나오자 그것은 뜨거운 응어리가 되었고, 이내 거대한 불덩이가 되어 하늘로 솟구쳤다. 하늘엔 다시 찬란한 태양이 나타났다.


'너무 뜨거워!'


외마디의 비명 비슷한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그리고 땅 아래, 검게 그을린 붉은여우의 초라한 몸뚱이가 누워 있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타버린 흉측한 얼굴, 하지만 분명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작품은 사랑받을 자격을 의심하는 존재, 타인의 빛으로 자신을 채우려는 욕망, 그리고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순간을 담아냈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태양과, 조건 위에서만 사랑하는 흰여우, 그리고 받는 사랑만 하던 존재에서 마침내 주는 사랑을 하게 된 붉은 여우의 모습을 통해,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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