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입니다

여러 장르에 대해서 쓰는 작가

by sun

처음 내 프로필을 방문한 독자들은 종종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마 브런치 에디터들도 아래와 같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사람은 대체 어떤 작가이며,

정확히 무슨 장르의 작가인가?’


어떤 글에서는 인간의 위선을 해부하고,

어떤 글에서는 상처를 품은 이들을 다독인다.

또 어떤 글에서는 글쓰기의 구조를 설명하고,

어떤 글에서는 시장의 원리를 논한다.

이 네 가지 작품군,

"반윤리 철학노트", "천천히 살아도 괜찮아요", "글쓰기 레시피", "누구나 쉽게 배우는 경영과 경제"

그것들은 얼핏 보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있는 듯하지만, 그 모든 중심에는 오직 하나의 시선이 있다.

‘인간을 이해하려는 시도.’


나는 장르를 구분하여 쓰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할 뿐이다.

어떤 날은 그 인간의 ‘어두움’을 기록해야 하고,

어떤 날은 그 인간의 ‘회복’을 바라보아야 하며,

어떤 날은 그 인간이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연구해야 하고,

또 어떤 날은 그 인간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분석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이 합쳐져야 비로소 인간이라는 전체가 된다.


글을 쓰는 이유가 단 하나뿐이라면,

나는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한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단일한 주제만을 탐구하는 작가에게서 깊이를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 그들은 명확하나, 단단하지 않다. 인간의 본질은 언제나 모순 속에 있고, 사유는 언제나 대립 속에서 성장한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필체로 네 개의 세계를 짓는다. 그것은 분열이 아니라, 균형이다. 또 앞으로도 더 늘려갈 것이다.


"반윤리 철학노트"에서 나는 인간의 위선을 찢는다.

이 시리즈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비판적 시선, 도덕의 허위와 윤리의 강요를 향한 저항의 기록이다. 거기서 나는 ‘착함’이란 말이 얼마나 잔혹한 통제 장치로 기능하는지를 드러내고 싶었다. 이 글은 나의 분노이자 동시에 나의 사유다. 나는 분노를 내세우되, 감정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건 냉정한 비판이다. 세상이 부패했음을 탓하기 전에, 인간의 순응을 먼저 해부하는 철학적 메스다. 이곳에서 나는 ‘무게’를 쓴다.

존재의 무게, 언어의 무게, 그리고 사유의 무게.


하지만 인간은 무게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천천히 살아도 괜찮아요"를 쓴다. 이 시리즈는 내가 비판한 세계 속에서도 여전히 인간이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글이다. 세상이 부조리해도, 마음은 잠시 쉬어야 한다. 분노만으로는 인간이 견딜 수 없기에, 나는 따뜻함을 쓴다. 그건 현실도피가 아니다. ‘회복의 온도’를 이해하는 것도 철학의 일부다. 나는 인간의 감정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슬픔, 외로움, 그리움 같은 감정들은 철학적 사고의 뿌리다.

이 시리즈는 내 사유의 ‘호흡’이다. 반윤리가 심장이라면, "천천히 살아도 괜찮아요"는 숨이다.


그리고 "글쓰기 레시피"는 나의 언어 실험실이다.

나는 글쓰기를 단순한 표현의 수단으로 보지 않는다. 글쓰기는 인간의 사고를 구조화하는 행위이자, 자기 성찰의 가장 정직한 도구다. 내가 글쓰기 방법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문체의 기술이 아니라 ‘사유의 훈련’을 말하는 것이다.글을 잘 쓰는 사람은 문장을 예쁘게 다듬는 사람이 아니라,자기 생각의 깊이를 명확히 본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문학과 철학을 연결하고, 예술과 논리를 결합하려 한다. "글쓰기 레시피"는 독자들에게 글을 ‘배우는 법’이 아니라 ‘느끼는 법’을 알려주는 시도다. 그곳에서 나는 인간의 언어적 본능과 감정적 질서를 관찰한다.


마지막으로 "누구나 쉽게 배우는 경영과 경제"

이 작품은 나의 사유가 현실을 향해 확장되는 공간이다. 인간은 사유의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생존의 존재다. 철학이 아무리 고결해도 빵 한 조각의 문제를 외면할 수는 없다.그래서 나는 경제를 철학의 언어로 바라본다. 돈의 흐름은 인간의 욕망의 흐름이며, 시장의 구조는 인간 심리의 구조와 닮아 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독자들이 ‘돈을 버는 법’보다 ‘돈에 휘둘리지 않는 법’을 배우길 바란다. 세상의 구조를 아는 것은 세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방패다. 경제를 공부하는 이유는 부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이 네 세계는 나에게서 떨어져 있지 않다.

<반윤리 철학노트>가 ‘인간의 어둠’을 말한다면,

<천천히 살아도 괜찮아요>는 그 어둠 속에서도 피어나는 ‘빛’을 말한다.

<글쓰기 레시피>는 그 빛과 어둠을 언어로 옮기는 기술을 다루고,

<경영과 경제>는 그 언어가 현실에 작용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나는 이 네 작품을 통해 ‘인간의 총체’를 말하고 있다.

삶, 사유, 언어, 구조. 그것들이 서로 얽혀 하나의 인간을 만든다.


많은 이들이 말한다.

“하나만 파야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묻는다.

“하나만 파는 것이 진정한 깊이인가?”


깊이란 넓이의 부재가 아니라, 다양한 면을 꿰뚫은 통합의 결과다. 나는 여러 장르를 쓴다. 그건 욕심이 아니라, ‘전체를 보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의 한 조각만으로 인간을 정의하지 않는다. 따뜻함만으로는 진실을 말할 수 없고, 냉철함만으로는 인간을 구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인간을 말한다.


내 글의 본질은 늘 같다. 진심, 통찰, 그리고 존엄. 나는 장르를 옮겨 다니지만, 본질을 옮기지는 않는다. 나의 글은 모두 ‘존재의 무게’를 다룬다. 때로는 그것이 철학으로, 때로는 위로로, 때로는 기술로, 때로는 현실로 나타날 뿐이다. 그러므로 나의 글은 분산되어 있지 않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얼굴을 가진 하나의 존재다.


나는 언젠가 이런 말을 쓴 적이 있다.

“글은 나의 철학을 전달하는 통로가 아니라, 나 자신이 철학이 되는 과정이다.” 그래서 나는 한 장르에 머물지 않는다.

내 사유가 변하면, 글의 형태도 변한다. 인간이 성장하듯, 글도 진화한다. 그 변화는 일관성의 부재가 아니라, 진실을 향한 여정의 흔적이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왜 그렇게 다르게 쓰나요?”

나는 말하겠다.

“나는 인간을 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