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누군가의 사소한 친절이 하루를 구해준 날

작은 온기가 큰 숨을 되찾게 할 때

by sun


그냥 지나갈 수도 있었던 순간의 기적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아무 일도 제대로 풀리지 않고

평소라면 별일 아닌 일들이 유독 크게 느껴지며,

나도 모르게 마음이 일찍 지쳐버리는 날.


그날은 유난히 그런 날이었다.

문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마음이 무겁고 하루 종일 머릿속은 미세한 잡음처럼 웅웅거리며 어디에도 온전히 집중되지 않았다. 사람들과 나누던 말들도 처음엔 분명 내가 하려던 이야기였는데 어느 순간엔 상대의 목소리만 멀리서 들릴 뿐 내가 어떤 표정으로 듣고 있는지조차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날은 누구에게도 설명하기 어렵다. 누가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니고, 정확히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그저 “오늘은 좀 힘들었다”는 말만 남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고백마저도 쉽게 꺼내기 어려울 정도로 각자의 사정 속에서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누구에게도 기대지 못하고 하루를 버티는 방법을 혼자서 터득해 나간다.


그날 역시 나는 그렇게 버텼다.


버티며 걷고, 버티며 일하고, 버티며 식사하고,버티며 웃고, 버티며 대답했다. 겉으로는 멀쩡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멀쩡함을 연기하는 데 에너지를 거의 다 써버린 상태였다. 말 한마디도 조심스러웠고, 누가 건네는 사소한 질문조차 어쩐지 내 마음을 건드릴 것 같아 피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 무렵, 나는 그저 오늘을 조용히 마무리하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밤의 이불 속으로 숨어들고 싶었다. 그저 하루가 끝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지친 밤이었다.


그런데 그때, 아주 사소한 일이 일어났다.


퇴근길에 잠깐 들른 편의점에서 계산대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나는 멍한 상태로 줄을 서 있었고, 손에는 미지근해진 캔커피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냥 뭔가 따뜻한 게 필요해서 집어 든 것이었다.


앞에 서 있던 사람이 계산을 마치고 지나가려 할 때,

그 사람이 갑자기 나를 한 번 돌아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먼저 하세요. 아까부터 많이 피곤해 보이시네요.”


별것도 아닌 말이었다. 그저 줄을 양보한 것뿐이다. 말투도 특별히 친절하거나 과장된 톤이 아니었다.정말 지나가면서 가볍게 건넨 한마디였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 하나를 느꼈다.


마치 무언가가 살짝 풀리는 느낌. 굳게 조여 있던 마음끈이

아주 조금 느슨해지는 것처럼. 하루 종일 이어졌던 긴장감이 그 작은 배려 한 번에 순식간에 흔들리는 것처럼. 그 사람은 계산을 마치고 그대로 걸어 나가 버렸고 나는 잠시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별 특별한 일이 아닌데도 내 마음 안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친절은 크기와 상관없이

상대가 나를 ‘보았다’는 감각을 만들 때 가장 깊게 와닿는다는 것을.


하루 종일 많은 사람이 내 앞을 지나갔고

나 역시 많은 사람을 지나쳤다. 그런데 그 중 단 한 사람만이 내가 조금 지쳐 보였다는 것을 알아보았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순간에 작은 여지를 내어 주었다. 그 사소한 행동이 내 하루를 구했다. 나는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그 작은 순간을 계속 떠올렸다. 그리고 한 가지를 다시 배웠다.


사람을 구하는 건 언제나 거대한 위로가 아니라

조용하고 아주 작은 친절이라는 것을.

그 친절은 상대를 완전히 변화시키거나

그 사람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순간 동안은

누군가가 나를 잠시 붙잡고 말해주는 것과 같았다.


“당신이 힘든 건 사실이고,

그걸 알아본 사람이 여기에 있었다고.”


이 사실만으로도

하루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그날 이후로 나는 한 가지 습관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누군가가 지쳐 보이면 잠시 멈춰서 몇 마디라도 덜 날카로운 말로 대하고 필요하다면 자리를 양보하거나 길을 내어주는 것. 그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내가 받은 그 작은 배려가 어떤 날 누군가에게는 버틸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웅장한 변화로 움직이지 않는다. 대부분은 사소한 것들로 돌아가고 우리를 다시 일으키는 것도 결국 그 사소함들이다.그날의 작은 친절 덕분에 나는 하루의 끝자락에서 다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별 의미 없이 지나갈 뻔했던 하루가 그저 그런 하루에서 조금은 괜찮은 하루로 바뀌었다.


그리고 마음 한쪽에 아주 은은한 온기가 남았다. 아마 그 사람은 내가 어떤 상태였는지 내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그저 지나가며 건넨 말일 뿐이니까.


하지만 그 작은 배려는 분명히 내 마음 어딘가에 도착했고 나는 그 사실을 기억한다. 고마움이라는 단어보다 조금 더 부드럽고 감사라는 감정보다 조금 더 조용한 방식으로.


내가 앞으로 살아갈 어느 날에도 아마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릴 것 같다. 사람의 하루는 정말로 작은 것에 흔들리고 작은 것에 다시 일어설 때가 많다는 사실을 그날 분명히 알았으니까.


오늘 당신의 하루도 누군가의 아주 작은 친절 하나 때문에

조금은 가벼워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혹시라도 당신이 그 친절을 건네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 또한 너무 멋진 일일 것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자주 서로를 살려두고 있습니다.
아주 사소한 방식으로.
월, 수,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