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같은 방향으로 이용당하고 있다.
이 사회는 스스로를 찢어가며 존재를 유지한다.
정치, 세대, 성별 그 어떤 이름을 붙이든 본질은 같다.
갈라치기란 인간의 본능이 아니라 체제가 설계한 질서다.
그리고 그 질서 속에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유롭다 착각한다.
누군가는 진영을,
누군가는 젠더를,
또 누군가는 세대를 탓하며 끝없는 분노의 굿판을 벌인다.
그러나 그 분노는 결코 위로 향하지 않는다.
언제나 옆으로만 번지고, 아래로만 쏟아진다.
이것이 분열의 본질이다.
힘을 가진 자를 보호하기 위한, 감정의 전쟁.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고 싸운다.
하지만 그 ‘옳음’은 이미 주어진 언어로 정의된 것이다.
정치인은 감정을 자극하고, 언론은 프레임을 짜며,
대중은 그 프레임 안에서 생각 대신 반응한다.
분노는 논리가 아니며, 공감은 진실이 아니다.
이 나라의 갈등은 언제나 사유가 사라진 자리에서 자란다.
사람들은 신념이 아니라 습관으로 싸운다.
그리고 그 습관은, 지배 구조가 가장 애용하는 마취제다.
세대 갈등이라는 것도 다르지 않다.
노인은 젊음을 시기하고, 청년은 과거를 조롱한다.
하지만 둘 다 같은 구조의 피해자다.
노인은 버려졌고, 청년은 착취당한다.
그런데도 서로를 적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서로를 미워하게 만드는 것이 체제를 유지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진짜 적은 위에 있는데, 사람들은 늘 옆을 찌른다.
분노를 나눠야 할 상대를 정확히 가리킬 줄 모르는 사회 —
그게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이다.
남녀 갈등도 마찬가지다.
이 사회는 서로를 적으로 설정함으로써 권력을 분산시킨다.
남성의 분노와 여성의 분노는 모두 진짜다.
하지만 그 감정이 서로를 향할 때,
문제의 본질은 체제에서 감정으로 이동한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싸우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젠더 논쟁은 점점 자극적이고, 통계는 점점 선별적이다.
그리고 그 논쟁을 팔아먹는 자들이 늘어간다.
분열은 이제 정치가 아니라 산업이 되었다.
누군가는 ‘혐오’를 팔고,
누군가는 ‘정의’를 팔고,
모두가 소비한다.
그 속에서 진실은 조용히 질식한다.
대중은 싸우는 동안 생각하지 않는다.
감정은 체제에게 가장 완벽한 통제 수단이다.
서로 미워하는 동안,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다.
“왜 우리는 이렇게 싸우도록 만들어졌는가?”
그 질문이 사라진 순간, 분열은 승리한다.
정치적 대립, 세대 충돌, 젠더 논쟁
이 모든 것은 결국 인간의 ‘동질성’을 잊게 만드는 장치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으로서 서로를 본다기보다,
진영으로, 세대로, 성별로 본다.
그들은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전선의 병사가 된다.
그리고 그 전선은 언제나 위가 아닌 아래를 향한다.
그러나 이 구조는 오래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분열은 결국 피로를 낳고,
피로는 냉소를 부르고,
냉소는 사유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언젠가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싸움이 ‘누가 더 옳은가’가 아니라
‘누가 더 오래 이용당했는가’의 경쟁이었다는 사실을.
그 틀은 도덕으로 포장되고,
윤리로 합리화되고,
언론과 교육으로 반복된다.
그리고 인간은 그 반복 속에서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반응하는 부품’으로 전락한다.
이 사회는 스스로 분열을 자랑한다.
“우리는 다양한 의견을 가진 민주사회다.”
그러나 그 다양성은 자유가 아니라 분열의 장식품이다.
진짜 자유는 의견의 수가 아니라,
그 의견을 스스로 구성할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그 능력을 잃은 인간은,
결국 타인의 사상으로 싸우는 꼭두각시일 뿐이다.
나는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들은 지금 싸우는 게 아니다.
누군가의 각본에 따라 감정노동을 하고 있을 뿐이다.
당신들의 분노는 진짜지만 그 분노의 방향은 조작되었다.
분열이 유지되는 한, 체제는 영원하다.
사람들이 싸우는 한, 권력은 웃는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의 목소리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