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이’가 아닌 ‘더 깊이’로 살아가기 위한 회상
우리는 살아가다 많은 것을 지나치며
많은 것을 기억하고 추억한다.
일반적으로 그로 인하여 불행하기도 행복하기도 한
삶을 정처 없이 반 평생을 그리워하며 시작과 끝을 맺는다.
우리는 지나간 시절에서 무엇을 낚으려고
하염없이 미끼가 없는 낚시 바늘을 던지는 걸까?
당신은 알고있다.
‘그냥‘ 회상하는 것이다.
이제는 그 당시 존재하던
'향기'와 '소리'들이 희미하여졌음에도
그 단편의 추억이 살게하는 힘이라는 것을.
현대에 입성한 우린 늘 고민하고 바쁜 일상에 치열하게 살며,
고향과 시절을 그리워하는 숨이 가쁜 영혼이다.
끝없는 지평선의 바다에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고향의 부둣가와 해변의 모래사장을 거닐며,
수억, 아니 수조의 모래알갱이 속으로 발을 묻고
땅을 배게 삼아, 하늘을 이불 삼아 누워
지난 인연들을 떠올릴 것이다.
자작나무와 참나무, 소나무 등 여러 나무들의
빼곡한 엉킨 정기를 받고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산자락을 따라 올라 정상을 덮던 노을을 기억하며,
어스름한 밤, 노란빛을 띠던
보름달과 초승달이 자신을 지켜봤을 것이다.
대교와 건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았던 네온사인들이
여름엔 수많은 빛이 눈 안으로 들어와,
세상의 온기와 풍요를 인식하며 따뜻하게 느꼈고,
흐린 겨울날엔 빛이 덜했지만 그 나름대로의
미지근한 색채가 돋보이는 시절을 회상할 것이다.
가끔은 모든 것을 추억해도 괜찮다.
가끔은 없어진 것들을 주워 담으려 해도 괜찮다.
가끔은 현재를 영원히 기억하려는 모습도 괜찮다.
밑빠진 수렁에 현실적인 고충을 하는 날도 반드시 있겠지만
또한 반드시 솓아날 구멍이 있을 것이며,
한 사람의 인생은 그렇게 누군가에게
영감이 되는 회고록이 될 것이다.
모든 이들이 살다가 늘 심심치 않게
"과거의 영광과 기억에 얽매여 살지 마라."
라는 말이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꼭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
명심하고 기억해주며 살아가주길 바란다.
추억과 회상이란 자신에게 쓰는 편지와도 같다.
그 편지의 내용을 휘황찬란하지는 못할망정
부정하며 송두리째 뽑아버리고서는 다시 태어나겠다는
객기라는 잉크로 편지를 까맣게 번지게 해서 되겠는가?
언제나 이롭고 옳은 것을 선택하게 해주는 것은
황폐한 역사와 위대한 성인들로부터 시작한다.
언젠가 내가 읽던 랄프 왈도 에머슨이 지은 책
"자기신뢰(self-reliance)"에는 이런 구절<의역>이 있다.
<언제나 밝고 위대한 목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결코 마음이 가난하지 않다...•>
그렇지만 현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시간에 쫓기고 돈에 쫓기며 살지 않는가?
외부로부터 자신들의 길을 간섭받고
심지어는 조롱까지 당하며 늘 쉬운 길을 찾지는 않는가?
이런 것들은 좋은 선택에 도움을 줄 뿐.
결코 좋은 추억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나 또한 20대 초반이지만 나이를 불문하고 알 수 있다.
많은 젊은이들이 일상 속에 좋은 시절을 보낼 수 있음에도
강제된 자기 규율과 주변 눈치를 보며 너무 필요 이상으로
좋은 때를 포기하며 "미래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자신을 혹사시키고 채찍질을 한다.
"월든"을 지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덜 소유할수록 부유하다.
세상의 대부분의 사치와 편의는
인간의 진정한 성장을 방해할 뿐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잃는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살아간다’는 말보다 ‘버틴다’는
말을 더 자주 쓰게 되었다.
시간을 아끼는 법은 배웠지만,
시간을 느끼는 법은 잃었다.
편리함을 쫓으며 자유를 잃었고,
풍요를 좇으며 여유를 잊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더 많이 가지려는 삶’ 속에서
점점 ‘덜 존재하는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아마도 그 시절의 우리는 덜 일하고 덜 소유하더라도
그 단순함이 사치가 아닌 가장
근원적인 행복이었음을 이제서야 깨닫는다.
모든 계절의 기억은 언젠가 잿빛이 되겠지만,
그 안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빛나는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
그것이 삶이고, 그리움이며, 노스텔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