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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항해하는 돌멩이 Jul 09. 2023

함께 울 수조차 없음에도, 당신의 해방이 나는 기쁘다


 

어쩌면 정체성 문제가 늘 내 삶의 화두였던 것 같다. 

내가 누구이고, 이 세상이 왜 이렇게 흘러가는지를 알아야만 고통스러운 고민의 굴레로부터 해방될 것 같아서였다. 누구나 자기만의 고유한 욕망을 가지고 살고 있고, 그 욕망의 방향에 따라서 정체성이 구성된다. 물론 고유한 욕망 안에는 집단의 욕망도 많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에, 나만의 욕망을 구분해 내기란 어려운 과정이다. 욕망에 관한 다양한 이론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식의 뿌리를 어디에 두는가에 대한 욕망의 출처가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한다고 생각한다. 정체성은 오랫동안 철학이나 정치·경제·문화 전반에서 다루어 왔고, 여전히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나는 정체성과 욕망의 관계에 대한 구조적 분석에서 출발하여 그 너머의 종교적이고 해방적인 데까지 나아가는 사유실천을 욕망한다. ‘종교적’이고 ‘해방적’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나의 욕망의 근원은 다음과 같다: 자기 인식의 한계 너머를 인정하되 끊임없이 고유한 자기 사유의 의미생성을 추구하며, 누군가를 함부로 내 틀에 가두어 두지 않으려는 해방적 공동체를 향한 목회적 실천.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간단하게 직업, 사회적 역할, 성별, 인종, 종교, 경제적 능력 등등 다양한 카테고리로 나누어서 설명하려고 한다.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내가 사랑하는 것, 원하는 삶의 방향, 이를 위해 노력하는 과정 등 더 깊이 이야기할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하게 카테고리화하고 규정해 버리려고 한다. 복잡다단한 정체성을 설명하려면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먼저 알아야 하는데, 욕망의 복잡한 생성과정이 인식조차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를 향해 늘 누구인지를 묻는다. 최근 유행하는 MBTI를 비롯한 심리 테스트들이나 다양한 SNS 같은 자기표현 매체들이 각광받는 것도 이러한 심리의 반영일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하위계층(subaltern)들에게 정체성 담론은 더 생략과정이 심해진다. 사회적 피해자들(social victim)에게 고유한 정체성과 욕망은 무시하기 쉬워지고, 학계든 인권단체들이든 그들의 인권을 옹호한다면서 오히려 너무 쉽게 그들의 욕망을 망각해 버린다. 예를 들면, 인권 분야에서 일을 하거나 연구를 하려는 이들은 가장 먼저 어떤 계층을 선택할 건지 질문받는다. 노숙인인지, 외국인 노동자인지, 여성인지, 아동인지 기타 등등. 그렇게 선택을 마치면, 그들에게 필요한 서비스나 연구관찰을 이미 짜인 틀대로 체계화해서 투입 산출까지 모든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도중에 틀 안으로 못 들어오는 대상자들은 관심 밖으로 벗어나게 된다. 이런 한계를 인식하면서 최근 비판이론 쪽에서 상호교차성이론(intersectionality)이나 혼종성(hybridity)이론 등이 대안으로 제시되지만, 기존에 논의되어 온 정체성의 범위 안에서만 비판적 해결 방법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누군가의 정체성을 쉽게 규정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욕망을 분석해 보면, 그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명분을 얻기 위해 하위계층을 도구로 사용하는 지식인들과 인권 정치가들의 욕망이 그 안에 들어있다는 스피박이나 낸시 프레이저를 위시한 비판이론가들, 클로도비스 보프나 안병무를 비롯한 해방·민중신학자들의 지적엔 충분히 동의할 만하다. 


신앙인들 역시 이런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는 자들을 하위계층, 즉 사회적 구조 때문에 소외받고 고통당하는 자들로 지칭한다면,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구호는 소중한 신앙의 유산이자 실천 방향이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이런 ‘우는 자’들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면서 감히 그들의 고통을 온전히 공감하고 함께 울 수 있다고 외치는 것일까? 시혜적 동정을 넘어서기 위한 기독교 사회운동이나 해방신학, 민중신학은 우는 자의 주체성과 가능성에 주목하고 연대의 공동체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사회적 인식 전환에 큰 흐름을 구성했다. 하지만 우는 자의 정체성이 ‘사회적 죄’로 인한 것임을 부각하기 위해 그들을 피해자의 틀과 의식화를 통한 투쟁 가능성에 고정시키고, 정치 권력자들과의 적대적 대립 구조하에서의 민중 주체성에만 주목했던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사회구조적 악 때문에 고통받는 것이 우는 자의 현실임에도, 구조적 틀을 넘어서는 다양한 욕망들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실현해 간다는 데 그들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 담론 역시 성차별이라는 구조적 현실의 틀 안에서만 다루어지는 점이 한계로 느껴진다. 차별당한 사실과 지배의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은 중요한 기반이 되지만, 그곳에만 머무른다면 언제나 논쟁으로만 귀결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골이 깊어진 20대 남성과 여성의 대립 역시, 이 논쟁에서 한걸음 더 나아갈 생각을 안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구조적 폭력은 결국 우리 모두를 아프게 한다. 피해자와 가해자 규정만으로는 폭력의 고리를 끊어낼 수 없다. 진정한 사과와 용서 역시 강요할 수 없는 부분이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욕망을 자신의 틀에 맞추어 판단해 버리고 서로의 정체성을 이분법적으로 박제함으로써 이 싸움을 끝내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서로 다르다는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폭력적 인식은 여성운동뿐 아니라, 모든 해방운동에서 발견되는 방어기제인 것 같다. 어쩌면 싸움이 멈추면 우리의 투쟁이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함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방어기제가 때로는 나를 보호하기도 하겠지만, 무한한 상상으로 펼쳐질 수 있는 해방공동체의 가능성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서로를 죽이기만 하는 투쟁보다는, 서로를 살리고자 하는 해방의 욕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어거스틴은 신앙이란 하나님을 향한 삶의 방향(orientation)이라고 정의했다. 욕망의 방향이 하나님을 향할 경우에 행복을 경험하게 되지만, 그와 반대 방향을 택할 경우에는 죄로 향한다고 설명했다. 해석의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여기에는 나의 욕망이 보편자를 향할 수 있다고 본다는 긍정적 측면도 존재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경향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비관적 측면도 존재한다. 우리는 우는 자들과 감히 함께 울 수 없다. 그들의 처지에 깊이 공감이 되어서 잠시나마 함께 울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보편적 감성을 지니기가 녹록지 않은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는 자에 대한 나의 해석이 틀릴 가능성도 있으며, 나의 정체성과 욕망도 제대로 알기 어려운데 타인이 누구인지 감히 다 알 수도 없다. 그래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외침이 버겁기만 하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외침은 때로는 나의(혹은 나의 집단의) 의로움을 선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는 자들을 끊임없이 발견하고, 인식하고, 그들을 고정된 인식의 틀로부터 해방하는 작업은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 우는 자가 나일 수도 있다. 내가 누군가의 인식의 틀에 속박당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우는 자들 역시 일반화시키거나 대상화시켜서는 안 된다. 나의 정체성과 욕망은 해방을 향할 때에만 내 것이 된다. 강요받지 않고, 내가 선택할 때에 우리는 해방감을 느낀다. 내가 울 때, 함께 울어 줄 명분으로 곁에 있어 주는 대상보다는, 나의 해방을 함께 기원하는 친구가 더 위로가 될 수 있다. 진정한 해방은 나 홀로 나의 것만을 욕망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해방을 기원하는 해방공동체가 함께 나의 욕망을 형성해 주고 기뻐해 줄 때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러한 해방적 인식 사유와 공동체의 가능성을 목회적 실천을 통해 이루고 싶다. 서로를 향한 해방의 돌봄이라는 목회적 실천이야말로, 진정한 나를 발견하게 도울 것이며, 너의 해방을 기뻐하는 나를 발견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목회적 실천이 ‘자기’를 해방시키는 공동체를 욕망하고, ‘자기 정체성’을 새로이 구성해 줄 것이라 믿는다. 해방세상을 꿈꾸는 여정에 기쁨으로 함께하는 ‘자기’들과의 만남을 간절히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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