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간 너를 그리워하며
“선생님 지훈이 오늘 전학 갑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우리가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했던 5월의 마지막 날, 지훈이는 갑작스럽게 전학을 가게 되었다. 집안 사정상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이사였기에 머리로는 이해가 됐지만 헛헛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훈이는 유쾌한 아이였다. 주변의 친구들이 곧잘 놀려도 허허 웃으면서 맞받아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갖고 있었고, 재미난 춤을 여기저기서 보고 연습해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과 함께 추던 아이였다. 마음의 곳간이 넉넉해 우리 반 소심이 재완이의 마음까지 열게 한 매력만점 인기남.
이런 지훈이에게도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 있었는데, 바로 수학이었다. 코로나 시기에 2~4학년을 집에서만 보낸 지훈이는 2학년이 하는 곱셈 구구도 바로 나오지 못해 진땀을 흘리곤 했다. 하루 중 제일 불행한 시간이 수학 시간이라고 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 지훈이를 이대로 둘 순 없어 하루는 남아서 상담을 하기로 했다.
“그래도 지훈이 넌 수업 태도가 좋잖니. 네가 여태까지 수학 공부를 어렵게 했던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인 것 같아? 그것부터 해결해 보자.”
“구구단인 것 같아요. 그리고 덧셈이랑 뺄셈도요.”
아이도 모르는 게 아니었다. 한글을 모르면 글을 읽지 못하듯이 사칙연산이 어려운데 어떻게 분수의 덧셈과 뺄셈을 할 수 있겠는가. 아이가 짠하다고 느껴져 대답할 말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지훈이가 다시 나에게 물어왔다.
“선생님 그런데, 50점 정도면 잘하는 거예요?”
지훈이는 내 대답을 내심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난 그 대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쉽게 ‘그럼~’이라고 대답하면 과연 이 아이가 진심으로 내 말을 믿어줄까?
“왜 궁금해?”
대답 대신 꼬리를 물고 이어진 나의 질문에 머뭇거리던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한 번도 50점을 넘긴 적이 없어요. 그래서 50점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요.”
매번 쪽지 시험을 볼 때마다 10~20점을 받는 지훈이에게 50점은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던 것 같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아이의 얼굴에서 당황스러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림을 그렸다. 계단을 10칸을 그리고 각 계단에 10부터 시작해 100까지의 숫자를 써넣었다. 그리고 20점 위에 서 있는 지훈이의 뒷모습까지 그리자. 지훈이는 더 알 수 없다는 듯이 볼펜을 쥔 내 손만 쳐다보았다.
“지훈아, 지금 네가 서 있는 곳이 여기야. 그렇지?”
“네….”
“우리 학교 계단을 올라갈 때를 생각해볼까? 가다 보면 창밖으로 운동장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지? 처음에는 운동장이 안 보이다가 중간쯤 가다가 보면 어때?”
“운동장이 보여요….”
“선생님은 시험 점수도 비슷하다고 봐. 수학에 대해 무언갈 깨닫기 시작하는 지점이 50점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리고 50점은 100점 중 절반이야! 이건 수업의 내용을 반이나 이해했다는 뜻이고. 선생님은 지훈이가 정말 좋은 질문을 했다고 생각해. 50점 정도면 잘 하는거야.”
“그럼 저는 마음속으로 50점을 100점이라고 생각할래요.”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할게! 우리 100점을 맞기 위해 노력하자.”
그날부터 아침 20분, 방과 후 20분 나와 보충 수업을 하며 지훈이는 사칙연산을 연습했다. 머리가 지끈지끈해서 빠지고 싶다고 엄살을 부리던 날도, 문제가 잘 풀린다며 신나는 날도 있었다. 매일 집에 가기 전 내가 내준 시험지를 풀며 어떤 날은 40점을 받기도 하고 어떤 날은 다시 점수가 제자리걸음을 하며 절망하기도 했다.
사실 지훈이는 전학 가기 전까지 끝내 50점을 넘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50점을 넘는 건 어렴풋이 2학기일거라 생각했던 나에게 지훈이의 전학이 더욱 아쉽게 느껴졌다.
전학을 간다고 아침에 인사를 온 지훈이는 친구들의 눈물 섞인 인사 세례 속에 씨익 미소 지으며 댄스 공연을 펼치고 갔다. 마지막 은퇴 공연이라면서. 이런 아이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훈아, 선생님은 네가 있어서 정말 행복했어. 우리 반은 항상 널 잊지 않을 거야. 넌 어디서든 잘할 수 있으리라 믿어. 늘 기도할게.”
여기서 울면 모양 빠진다고 생각한 난 울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장황하게 내 마음을 전달했다. 지훈이도 정말 떠나야 함을 느꼈는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선생님, 그래도 100점은 받고 가야 하는데 아쉬워요.”
“지훈아, 선생님은 이렇게 짧은 기간에 수학 실력이 쑥쑥 늘었던 친구를 많이 못 봤어. 분명 올해가 가기 전에는 100점 받을 수 있을 거야.”
“선생님 여기서 50점은 100점이라는 의미 맞죠?”
지훈이는 비밀이라는 듯이 속삭이며 말했다. 열두 살 답지 않은 천진한 모습에 웃음이 났다.
“그래, 맞아.”
“휴, 다행이다. 그럼, 선생님. 제가 100점 받으면 꼭 연락드릴게요! 그동안 감사했어요.”
씩씩하게 걸어가는 지훈이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어느새 우리가 정이 들었음을 실감했다. 나에게 지훈이는 100점 만점에 500점 같은 아이였다. 그 말을 해주지 못한 게 너무 아쉽다. 언젠가 100점을 받아 연락이 오게 된다면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