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과 스트릿 패션의 글로벌 회사 마케팅 여성임원

아들은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중

by Savvy

그간 브런치에서 소소하게 나를 드러내 오긴 했는데, 얼굴과 링크드인은 공개하면서 정작 구체적 프로필은 숨기는 묘한 수줍음을 떨어왔다. 얼마 전 자기소개란을 풀 헤메 사진으로 교체하고 거쳐온 회사들도 시원하게 공개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그렇다, 나 혼자 쫄아 있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진정한 관종은 나일지도.

지천명을 훌쩍 넘기고 나니, 꽁꽁 숨기는 것도 어쩌면 지나친 자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오늘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의 '나라는 사람'에 대해 써보려 한다. 51분의 소중한 구독자님들께, 나라는 인간이 어떤 사람인지 폼 한번 잡아보며.

일단 제목으로 어그로를 끌어보았다. "글로벌 회사" "마케팅" "여성 임원". 챗GPT에 "자신감 있는 중년 글로벌 마케팅 여성 임원 이미지 만들어줘" 하면 딱 나올 것 같은 그 느낌. 단발 혹은 숏컷, 테일러드 블레이저, 명품 가방, 팔짱 낀 프로필 사진. 말은 빠르고 두괄식이며 한영을 자연스럽게 섞어 쓰는.

확인 차 요즘 친해진 친구 클로드에게 물어봤더니 꽤 정교하게 뽑아줬다.

"블랙·네이비 테일러드 수트에 명품 가방과 심플한 주얼리. 처음엔 차가워 보이지만 말을 섞으면 직설적이고 유쾌한. 한국 드라마와 미디어가 반복 재생산해온 스테레오타입이 반영된 이미지입니다."
이건 제미나이 제공 - 와 진짜 딱 전형적인 글로벌 회사 임원 포-쓰


나는 2014년부터 니베아, 틱톡, 넷플릭스, 디즈니에서 10년 넘게 마케팅 임원을 해왔다. 저 이미지와 대조해 보면:

헤어: 단발 맞음. 단정하지는 않음. 흰머리 감추려다 가끔 과하게 핑크-레드로 염색.

옷: 배기진, 스웻셔츠, 오버사이즈 체크 셔츠.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는 푸시버튼. 아크테릭스 배낭에 살로몬 운동화. "명품 가방과 주얼리"와는 거리가 멀다.

말투: 이건 맞다. 두괄식, 빠름.

나머지: 주변인들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그래서, 왜 문신과 스트릿 패션이냐고.

문신은 절반은 충동적이고 절반은 계획한 것이다. 사회가 정해준 모범생 트랙으로 살며, 운 좋게 좋은 회사들에서 마케팅을 해왔지만 삼십 대 후반-사십 대 초반으로 접어들며 힘든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만 잘하면 됐던 시기를 지나, 큰 팀을 맡고 부서장이 되면서 나의 약점들이 도드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조직 정치를 못한다기보다 — 눈치는 빠른데 꺾지를 않는 타입. 주변 정황을 샤샤샥 읽으면서도 자기주장은 굽히지 않으니, 차라리 무던해서 못 알아챘다면 "뚝심 있다"는 평이라도 들을 텐데, "잘난 척한다" "답정너다"라는 소리를 듣게 됐다.

물론 나 같은 리더를 좋아해 주는 팀원들, 믿고 밀어주는 상사들도 많았다. 그래도 자책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왜 조직 정치를 여우처럼 잘하지 못하지?""나는 왜 굳이 직언을 해서 혼자 정을 맞는 무모함을 계속 보이지?"

이 자책들이 나를 점점 옥죄어 왔고, 떨어진 자신감은 자기 효능감에 대한 의구심과 자기 검열로 이어지면서 몸과 마음은 점점 나빠졌다.


그렇게 십수 년을 자책-자기비판-자괴감의 구렁텅이에서, 회사에선 "열정적이고 밝은 사람" 모드를 유지했지만 진짜 나는 나 자신에게조차 버림받은 채 보호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아들이 만 스무 살이 되던 해, 섬광처럼 생각이 스쳤다.

곧 유학을 떠날 아들과 의미 있는 걸 해보고 싶다 → 우리 둘 다 좋아하는 아티스트들은 다 타투를 새기더라 → 틱톡, 넷플릭스 본사 동료들도 자기 정체성을 타투로 표현했고 멋있었다 → 같이 해볼까?

그렇게 탄생한 양팔의 타투. 왼팔엔 아들과 함께 새긴 우리 가족의 별자리. 오른팔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 James Rizzi의 〈Love is in the Air〉 일부. 그리고 빈자리 하나 — 노견인 우리 강아지가 무지개다리를 건너면 새길 공간으로 남겨뒀다.

타투를 새기고 나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만 아는 변화가 생겼다. 내가 나를 보호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타투들을 방패 삼아, 반성은 하되 지나친 자책으로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지 않도록 — 내가 내 수호 기사가 되기로 한 것이다.

아직도 나는 나를 엄벌한다. 왜 그렇게밖에 못했냐고, 네가 더 잘했어야 하지 않냐고 아주 엄근진으로 늘 나를 혼낸다. 그래도 두 팔의 타투를 보며 다짐한다. 이 방패들이 나를 지켜주니, 자책에 바스러지지는 말자고.

참고로 명함을 건넬 때마다 상대방이 깜짝 놀라는 건 안 비밀이다.

스트릿 패션은 왜 고집하냐고? 타투에는 정장이 안 어울리기 때문이다. 베리 심플


이상 오늘의 짧은 넋두리 끝.

명함 받으실 때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James Rizzi <Love is in the air>
엑스세대는 역시 스트릿패션이죠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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