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의 탈을 쓴 여우 vs 여우의 탈을 쓴 곰.
안녕하세요. 조직 정치 못하는 사람들에서 그 사람을 맡고 있는 쌔비입니다. 조직 정치란 무엇일까요. (그래요 오늘은 왠지 존댓말로 해야 할 것 같은 그런 험블함을 탑재해 봅니다. 정치를 못하면 겸손하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 비꼬는 것 아닙니다, 정치 앞에선 진짜 작아져요)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외교학과, 정치인 할 때 그 정치와 “쟤 너무 정치적이야”의 정치는 다르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정치의 사전적 의미는 “나라를 다스리며 국민을 통치하는 일” (source: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이라고 합니다. 정치”학”적으로의 일반적인 의미는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 (the authoritative allocation of values for a society)”라고 합니다. (David Easton 님이 1953년에 하신 말씀)
오늘 얘기하고 싶은 조직 정치는 후자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보면서 정치 지진아인 저의 무릎을 탁 치는 구절은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었습니다. 여기서 밑줄 쫙 부분은 “권위적” 배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권위적 배분이란 ‘사회적으로 정당하게 인정된’ 권한이라고 합니다. 사회적으로 정당하게 인정된 권한이란, 사람들이 그 결정을 따를 이유가 있다고 인정하고, 조직의 공식적 리더십에 속해 있으며, 개인이 동의하지 않아도 구속력이 결정되는 것이 그 맥락이라고 해석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정반합이 나옵니다. (정반합 맞나요? 제가 철학적 기반이 약해서..)
다수의 구성원들이 ‘어 그 결정은 따라갈 만하다’고 인정하고, 그 결정은 조직의 ‘짱’에 의해 내려져야 하고, 그렇게 내려진 결정 (그 조직의 가치 - 회사에서는 성과와 월급, 인센티브, 승진 등이겠지요)은 구성원 개개인의 동의 여부에는 상관없이 결정된다는 거죠.
회사라는 조직에 속해 있는 분들은 이 프레임에 조직 정치를 쉽게 대입해 볼 수 있지 않나요? 회사에서 정치 천재만재 (개인적으로 몹시 샘이 나는 분들입니다) 들을 보면, 다수의 사람들이 ‘어? 저쪽으로 가는 게 대세인가?’ 하는 생각을 하도록 자신의 생각을 은근히 어필하면서 그걸 조직의 짱 (보스겠지요?)이 본인의 아이디어로 생각하게끔 티 안 나게 시전 하는 기술. 그 방향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왠지 눈치 보여 의견 피력을 하지 않으면서 조직의 방향이 본인에게 유리하게끔 흘러가게 하는 그 기술.
그리고 여기에 더한 고오급 기술은 크게 거슬리지 않게 이 기술들을 시전 하는 것. 이런 고급 기술자 분들은 크게 욕먹어 봤자 술자리에서 “은근 재수 없어” 정도로만 욕을 먹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포인트, 위에도 아래도 옆에도 크게 “위협”이 되진 않는다는 겁니다. 즉, 회사라는 조직에서 자기 역량 (또는 업무 기술)을 어디까지만 써야 누군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지 알아채는 촉이 엄청나다고나 할까요. 여기서 심기는 반드시 윗사람일 필요는 없습니다. 요즘은 360도 다면 평가 덕(?)에 아랫사람들도 윗사람을 한방에 보내 버릴 수 있으니 위 아래 옆 심기 모두를 거스르지 않는 알잘딱깔센이 중요합니다.
자, 여기서 그럼 여우와 곰은 무슨 얘기인가. 여러 얘기들 속의 스테레오타입은 여우는 약삭빠르게 자기 잇속 챙기는 캐릭터, 곰은 우직하게 자기 할 일만 하지만 생색은 못 내는 캐릭터로 대개들 인지하고 있죠. 그런데 옛날 동화에선 사실 욕은 여우가 먹었잖아요? 얄밉다고, 자기 잇속만 챙긴다고, 약삭빠르다고 그래서 인기가 없었죠.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곰에 본인을 투영하면서 곰처럼 우직하게 성실한 캐릭터들이 인정받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우린 이제 어느 정도 눈치는 챘잖아요? 권선징악은 전래동화에만 있다는 것. 현실에선 곰들은 재주만 부리다 내쳐지고, 사람들은 결국 여우 옆에 남는다는 걸. 여우 옆에 있으면 신 포도라도 떨어진다는 걸 아는 거죠. 조직은, 회사는 ‘그래서 성실한 곰은 인정을 받았답니다’ 보다는, ‘이번 임원 인사에서 줄을 잘 선 여우 라인이 핵심 사업을 맡아 연말 인센티브는 따놓은 당상이라더라’가 더 먹히는 법이니까요.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여우도 많고 곰도 많은데 여기서 진화한 캐릭터가 곰의 탈을 쓴 여우와 여우의 탈을 쓴 곰입니다. 설명 안 해도 캐릭터는 와닿으시죠? 그리고 강산이 세 번 바뀌는 동안 회사를 다닌 저의 raw data에 따르면 (편파적일 수 있음 주의) 이 캐릭터들의 파워 레벨은 곰의 탈을 쓴 여우 >>>>>> 여우 >> 곰 >>>>>>>>>> 여우의 탈을 쓴 곰 순입니다.
곰의 탈을 쓴 여우 (aka 제 추구미)는 조직 정치 만랩입니다. 둥글둥글 성격 좋고 우직한 허허실실인 줄 알았는데 - 나보다 못한 줄 알았는데 - 알고 보니 실속은 다 챙기고 있었고, 핵심 세력 모두에게 인정받고 있음은 물론, 조직의 변화의 중심에 있지만 절대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그런 먼치킨 같은 존재인 것이죠.
반면 여우의 탈을 쓴 곰 (눈치채셨겠지만 접니다)은 참 안타깝습니다. 불합리한 걸 알지만 다들 입 다물고 있는 사안들에 대해 입바른 소리 하고 (주요 대사 “이건 맞지 않습니다”), 지금 누가 실세인지는 살피지 않고 (뭔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알량한 착각이죠) 난 나의 길을 야무지게 갈 테야라고 하지만 가시덤불 길을 피 흘리며 간 뒤에야 아 이렇게 가다가는 내가 절단 나겠구나를 알게 되는 거죠. 그래서 급히 여우 탈을 벗어던지고 차라리 원래 나인 곰으로 돌아가지만 한 번 썼던 탈이 자꾸 생각나니 뭔가 야코가 죽고 점점 빛을 잃어갑니다.
곰의 ‘성실하고 우직한’ 이미지만 가져가고, 여우의 ‘실속’은 가져오기. 그거 어떻게 하는 거죠?
쉬우면 다들 정치 만랩이었겠죠? 아뭏든 정치 천재만재님들 존경합니다. 배운다고 될 수 있는 걸까요?
이 글을 보고 계신 분들은 어느 쪽이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