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터에게 의전이란?

마케팅 역량 중 무수리력의 중요도에 대해 논하시오.

by Savvy

의전. 마케터에게 의전이 왜 중요한가 싶을 것입니다. 의전은 대기업 회장실, 국회의원 보좌관, 청와대 국빈 의전, 호텔이나 공항의 VIP - 이런 단어들에 주로 따라붙는 단어이니까요.

마케터에게 필요한 역량은 전략, 실행력, 커뮤니케이션, 프레젠테이션, 분석력 등이라고 지~~난 글에서 얘기하지 않았냐고 하면 정확히 기억하고 계십니다. 사실 이 역량들은 디폴트이기도 하지만, 마케터로서의 가오 잡기 및 경영학 수업에서 이런 역량들을 앞세우는 것이 커리큘럼 짜기도 좋거니와 있어빌리티에 일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누구도 얘기해 주지 않지만 한 끗 차이로 예쁨 받음과 미운털 박힘을 가르는 초격차 한방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의전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의전입니다. 아부가 아니라 의전입니다. 아부는 사실 굉장히 낮은 레벨의 공력이지요. 요즘 조직의 윗전들도 귀가 있고 눈이 있어 이런저런 교육과 얘기를 많이 듣는 탓에 (블라인드와 잡플래닛, 윗전들에게도 보고되는 거 알고들 계시쥬?) 대놓고 아부하면 기겁하기 때문입니다. 땡땡 이사는 어찌나 아랫사람들을 잡는지 다들 땡땡 이사에게 아부하느라 혈안이더라 → 이런 말이 돌까 봐 신경 쓰이는 거죠. 이사님들도 다면평가 관리하고 인사부에 잘 보여야 회사에 오래 붙어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의전은 무엇이냐. 의전의 올바른 사례는, 6성급 호텔의 그것과도 같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직원은 몇 안되지만 공기, 습도, 온도, 조도, 향 모든 것이 최적화되어 있고 내 일정이 갑자기 바뀌어도 착착착 물 흐르듯 오와 열이 재정비되는 루트 뭐 그런 것들이죠. 평소 내가 커피를 마시는 각도를 귀신 같이 알고 있는 것 같은 커피잔의 위치, 굳이 말하지 않아도 오후 3시에는 페퍼민트 티가 놓여있다던지. 아 쓰다 보니 제 위시리스트를 얘기하고 있네요, 여기서 kkondae 력이 나오면 안 되니 1절만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케팅과 의전이 무슨 관계냐 궁금하시죠. 산업을 불문하고, 마케팅은 그 이름 때문인지 회사 안팎의 많은 사람들이 '마케팅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해하시기 때문에 어르신들 계신 자리에 가야 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그때 표면적으로 주어진 임무는 흔히 생각되는 그런 거죠. 마케팅 전략 발표, 광고 시사회 진행, 실적 부진 원인 분석 및 그에 따른 벌서기 등. 그런데 이런 걸 할 때 조금이라도 부각되려면 의전 치트키가 꼭 필요합니다.

마케팅 전략 발표를 예로 들면, 나의 똑똑함을 어필하고 말 테다 하는 내용 보단, 보고 받는 어르신이 좋아할 만한 내용을 살짝 가미하는 겁니다. 어르신이 야구를 좋아하신다면 전략 내용을 야구에 빗대어 푸는 거죠. 분위기가 괜찮게 흘러간다 싶으면 '이번 주말 경기에선 꼭 XX 팀 (어르신 응원팀이란 걸 알고 있지만 숨기고 내가 응원하는 팀인 것처럼 해야 합니다)의 승리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요런 양념도 괜찮을 수 있습니다. 단 본인의 캐릭터가 귀염상 쪽이어야 부작용이 덜합니다.

광고 시사회에서는 좀 더 기술적인 의전이 중요합니다. 어르신들은 (물론 요즘은 30대 임원분들도 있지만) 대체로 눈과 귀가 약간 어두우시잖아요? (슬프지만 저도 돋보기 쓴 지 오래입니다) 하지만 대놓고 본문 폰트 사이즈를 25 이렇게 설정하면 곤란하세요. 어르신들에게 어르신이라고 느껴지게 하면 티 안 나게 점점 힘들어지실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광고' 시사회잖아요? ppt 한 장짜리 설명서 만들어서 "이건요, 제가 진행한 거라고요 제가요 제가요" 이렇게 대놓고 어필하는 건 과감히 생략하셔야 하세요. 대신 영화관 뺨치게 회의실 창문 블라인드 내려놓고, 오디오도 미리 점검해서 사운드 빵빵하게 해 놓고 (집에 있는 마샬 스피커 갖고 오셔도 됩니다) 어르신 입장하시면 "네 그럼 준비된 시안들 순서대로 플레이하겠습니다" - 버즈 알 아랍 호텔 총지배인 같은 공기 같은 톤으로 대사를 읊으세요. 그리고 깃털처럼 플레이버튼을 누르기 전에 수줍게 회의실 조명을 끄시고요 - 이 자리는 오직 VIP님 한분만을 위한 자리라는 느낌에 전율이 오도록!

이 순간만큼은 원가 절감 방안에 머리 싸매는 임원이 아니라 제임스 카메론 감독 저리 가라 거장 감독이다라는 즐거운 상상에 어르신이 빠져들게끔! 그렇게 상영이 끝나고 나면, 조심스레 총지배인 톤으로 짧게 말씀하세요. "한 번 더 플레이할까요?"

상영이 끝나고 나면 노트를 펴고 받아 적을 준비를 하세요. 나는 환경을 위해 페이퍼리스를 지향하니 노트북으로 받아 적겠다 - 안됩니다. 정상회담 때 통역하는 분들이 왜 노트에 받아 적는지를 보십시오. 받아 적는 모습만으로도 '쟤는 내 말을 귀 기울여 듣는군' 인상 완성입니다.


콘텐츠 (드라마나 영화) 또는 음악, 뮤지컬 같은 엔터테인먼트 마케팅은 또 다른 레벨의 의전이 요구됩니다. 아뤼스트님들을 의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술적 영혼에 유명세와 팬덤까지 장착하신 분들이라면, 그리고 그분들의 말 한마디 손짓하나 가 작품의 홍보 마케팅에 거대한 영향을 미친다면, 우리 마케터들은 기꺼이 무수리가 되어야 합니다. 의전의 끝판왕 - 눈에 띄지 않지만 수면 아래서 모든 것을 완벽히 준비해 내는 - 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Gemini_Generated_Image_5l9a945l9a945l9a.png 제미나이가 다람쥐 표정을 실감 나게 표현했군요

30년이 지난 지금 고백하자면, 1996년인가 1997년 재즈계의 전설, 허비 행콕이 내한했을 때 — 저는 그분의 레이블 마케팅 담당자였습니다 — 초짜 마케터였던 저는 그 레전설을 모범택시에 태워 당시 여의도 MBC에 프로모션 다녔더랬습니다.

gettyimages-1597833668-612x612.jpg 올해 서재페에 오시는 허비 행콕 님, 30년 전 저의 불찰을 용서해 주세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흑.


이상 오늘의 넋두리 끝.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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