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영화 <버닝>을 보고 왔다. 이창동 감독가 낸 수수께끼 덕에 많은 생각이 들어 몇 자 적어본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야 한다
영화는 작가 지망생이자 유통회사 알바생 종수(유아인)의 배달 모습으로 시작한다. 우연히 종수는 배달을 갔다가 어릴 적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해미(전종서)를 만난다. 일이 끝난 후 해미는 종수에게 술을 마시자고 한다.
해미와의 술자리가 어색한 종수에게 해미는 갑자기 귤을 먹는 마임을 보여준다. 종수에게 소질이 있다는 칭찬을 듣자, 해미는 이렇게 말한다.
“귤이 있다고 상상하는 게 아니라 내 손에 귤이 없다는 걸 잊는 거야. 그리고 귤이 정말 먹고 싶다고 생각하면 입에 침이 고이고, 정말 맛있게 먹을 수 있어. 이렇게.”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종수에게 해미는 자신이 삶의 의미를 찾는 'Great Hunger'을 만나러 아프리카로 여행을 간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여행을 간 동안 자기가 키우는 고양이를 돌봐 달라는 부탁을 한다.
영화 내내 머리에서 맴도는 해미의 ‘귤’ 이야기. 감독은 마치 관객에게 재미있는 수수께끼를 풀어보라는 것처럼, 가장 중요한 관전 포인트를 영화 전반이 쏟아놓았다.
극히 나에겐 개인적인 의미로 사회에서의 존재감을 뜻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존재감이 없는 이 시대,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잊을 때
비로소 내 존재가 느껴진다는 슬픈 말 같았다.
귤이 없다는 걸 잊으라는 해미의 말은 허상과 같은 삶을 조금이라도 즐겁게 살고자 하는 발버둥이지 않을까.
한편, 해미의 집으로 고양이를 보러 간 종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고양이 때문에 당황한다. 과연 고양이는 있는 것일까. 해미는 고양이가 낯선 사람에겐 자신을 보여주지 않는다며 먹이를 줄 것을 부탁한다. 종수는 "고양이가 없다는 걸 잊으면 되는 거야?"라며 의미심장한 농담을 건넨다.
그리고 둘은 방에서 관계를 가진다. 관계를 가지는 도중, 종수는 하루에 한 번 밖에 볼 수 없다는 벽에 비친 빛을 바라본다. 빛과 비현실적인 종수의 표정, 이 장면은 현재의 상황이 상상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미묘한 힘이 있다. 이것이 현실이었든 아니든, 종수에겐 일말의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시켜주는 순간이었던 것 같다.
해미가 떠난 후, 보이지 않는 해미의 고양이에게 종수는 먹이를 꼬박 꼬박 주려 방문한다. 마치 '고양이 없다는 걸 잊어야 한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것처럼. 그리고 방문할 때마다 해미를 생각하며 자위행위를 한다. 마치 이 곳에서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도구가 된 사람
해미가 아프리카로 떠난 동안, 종수는 아무도 없는 옛날 파주 집으로 돌아간다. 파주 집에는 어릴 적 떠난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폭행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사진, 그리고 삐쩍 말라가고 있는 송아지 한 마리만 남아있다.
어느 날, 돌아온다는 해미의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고 종수는 공항으로 향한다.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만난 벤(스티븐 연)이라는 정체불명의 남자 벤(스티브 연)과 함께 돌아온다.
종수는 벤이 상당한 재력이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벤 앞에서 조금은 위축된 모습을 보이는 종수. 해미가 벤과 깊은 사이가 될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들지만, 종수는 무력하게 그 상황을 바라볼 뿐이다.
벤과 연인 사이가 된 해미. 종수를 벤의 아파트에 초대하고, 벤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가진다. 종수는 벤의 친구들 앞에서 해미가 광대처럼 여행에 대한 무용담을 늘어놓는 모습을 바라 본다. 그리곤 해미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품을 쏟아내는 벤과 눈이 마주친다. 그 순간 종수는 벤의 친구들이 해미를 비웃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어느 날 해미는 벤과 함께 종수가 있는 파주 집을 갑작스레 찾아온다. 해미와 함께 종수의 집으로 찾아와 자신의 비밀스러운 취미에 대해 고백한다. 바로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 그때부터 종수는 알 수 없는 무서운 예감에 사로잡힌다.
벤이 준 대마초를 함께 피고 윗옷을 벗고 춤을 추는 해미. 종수는 질투심에 해미에게 창녀같다는 말을 해버린다. 얼굴이 굳은 해미는 벤과 함께 차를 타고 떠난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연락이 되지 않는다.
죄책감에 미친듯이 전화를 해보지만, 해미는 연락을 받지 않는다. 집도 해미답지 않게 깨끗이 치워진 채였다. 그 후로 매일 종수는 마을의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찾아다니며 태워졌는지 확인한다.
해미를 찾아 헤매는 모습과 매일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확인하는 종수의 모습이 한동안 교차적으로 보여진다. 마치 해미를 벤이 말하던 버려지고 ‘쓸모없는 비닐하우스’와 동일시하는 것처럼.
불안한 예감에 벤의 뒤를 밟는 종수. 아무리 따라다녀 봐도 해미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우연인 척 가장하여, 벤을 만난 종수.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던진다.
“비닐하우스는 태우셨어요?”
“태웠죠.”
“매일 확인했는데.. 없던데요.”
“너무 가까이 있으면 잘 안보이는 법이죠.”
자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는 해미밖에 없는 종수.
벤과의 대화로 불안감만 더 커졌다. 종수는 그 후로도 계속해서 벤의 뒤를 밟는다. 그런 종수를 눈치 챈 벤은 일부러 해미 얘기를 하자며 다시 집으로 초대한다. 벤의 집에 없던 고양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종수. 해미의 고양이 이름으로 부르자 종수의 품에 안기는 고양이. 종수의 의심은 불안한 확신으로 바뀐다.
이번 광대는 벤의 새로운 여자친구.
중국에 대한 무용담을 벤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늘어놓고 있다. 또 다시 하품을 하는 벤.
그 모습을 본 종수는 벤의 집을 빠져 나온다. 뒤를 따라 나온 벤에게 종수는 해미 얘기는 “안 해도 알 것 같다”는 말을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난다.
벤에게 해미는 도구였다. 지루함을 견디게 해줄 장난감. 불법인 방화행위를 해야만 잠시 살아있다는 걸 느낀다는 벤. 무료함을 지우기 위해 그는 두세달에 한 번씩 장난감을 바꿔야 하는 것이다.
그런 해미에게 종수 또한 도구였을지 모른다. 해미는 필요할 때만 종수에게 전화를 건다. 돈이 필요해 십여년 만에 종수를 찾는 엄마처럼. 하지만 종수에게 해미는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시켜주는 존재다. 존재를 탄생시킨 엄마처럼 말이다.
분노로 표현하는 존재
연기처럼 사라진 해미. 종수에겐 유일하게 자신의 존재감를 확인시켜주던 존재였다. 과연 해미가 실제로 존재했을까라고 의문이 드는 시점에 종수는 고양이로 인해 확신을 가진다.
해미가 실제로 존재했다고.
종수에겐 유일한 존재가 벤에겐 쓸모없어진 도구였다. 그리고 종수는 해미에 대한 어떤 것도 증명할 수 없었다. 종수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어떻게 이 답답함과 분노를 표현할까.
벤의 집에서 어떤 확신을 가지고 뛰쳐나온 종수.
그런 종수의 다음 행선지는 해미의 집이었다. 해미의 집에서 창가에 앉아 컴퓨터로 글을 쓴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 앵글은 창문 밖에서 글을 쓰는 종수의 모습을 잡는다. 그리고 점점 멀어져 그 범위를 넓힌다. 글을 쓰는 종수의 모습이 보이는 작은 창문에서 건물 전체, 마을 전체, 지평선 전체의 한 부분으로 줌아웃된다. 소위 말하는 소설의 액자식 구성을 화면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현실과 허구가 교차되는 대목이다.
지금 보여지는 일들이 과연 현실이었을까 아니면 종수의 글 속이었을까. 앞으로 펼쳐질 내용은 실제일까 아니면 종수의 글 속일까. 둘 다인 것일까. 둘 다 아닌 것일까.
해미와 관계를 맺을 때 보였던 희미하고도 비현실적으로 찬란한 빛이 사실일까. 상상일까. 이 모든 것이 허상인지는 알 수가 없어졌다.
영화 전체의 이해를 흔드는 이 장면 후에는 종수의 복수가 그려진다. 벤을 불러낸 종수는 칼로 벤을 수없이 찌르고 불을 질러버린다.
활활 타는 벤의 시체와 그의 포르쉐. 그 불 속으로 종수는 속옷까지 벗어 모두 던져넣어 버린다. 껍질을 벗는 것처럼.
종수는 이제까지 무기력하게 모든 것을 참아왔다. 원하는 여자를 남이 채가도.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엄마가 갑작스레 연락이 와 돈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어도. 이러한 종수의 폭력적인 모습은 사뭇 낯선 것이었다.
영화는 무기력한 종수가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을 두 가지로 제시한다. 허구로 폭력을 그려내거나 실제로 폭력을 쓰거나. 물론 둘 다에서 폭력이라는 방식이 바뀌지는 않는다.
종수의 이러한 표현방식은 아버지와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종수의 아버지는 영화 내내 이웃을 폭행한 죄로 재판을 받는다.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닮지 않고자 종수는 화를 꾹꾹 눌러담아 무기력한 모습으로 되어갔을 수 있다.
그런 종수가 분노를 표현해야만 하는 때가 온다면, 유일하게 아는 방식이 폭력과 방화였을 것이다. 의식적이 아닌 무의식적인 학습으로 인해.
어쩌면 영화는 이런 종수의 모습을 통해 기성 세대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기성 세대의 잘못된 방식이 후세대에 그대로 답습될 것이라는 무서운 사실을 일깨워 주기 위해.
의식적인 변화와는 상관없이 체화된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나갈 거라는 사실을.
무엇이 실재하는가
영화가 끝나고 나면 무엇이 실제이고 무엇이 허구인지에 대한 의문이 끊이지 않는다. 종수, 해미, 벤의 존재도, 영화의 스토리도, 하다못해 해미의 고양이도 존재하는지 알 도리가 없다.
단 종수와 해마가 느끼는 현실적인 무력감, 존재의 무가치성, 존재를 도구화하는 벤에 대한 분노 등,!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들이 실제라고 느껴진다. 이 시대가 체험하는 현실에 대한 감정은 허구와 현실에서 모두 실제로 존재하기에.
어쩌면 우리는 종수, 해미, 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잊을 때, 이 감정들을 더 생생히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인 감상평이니 너그러이 봐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