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짜장을 찾아 떠난 여행
오늘 일정이 펑크났다.
금요일이 아니라 월요일에 오란다.
갑자기 빈 시간을 보니, 제주도를 갔을 때처럼 다리가 근질근질 했다. 그러다 책장에서 <완벽한 하루 여행>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이전에 컬처그라피 편집장이었던 소라언니가 주신 책이었다. 매주 이 책을 따라 국내여행을 해보리라 결심했으나 그 때는 나의 휴식이 여행과 동의어가 아니었다.
지금은 다르다. 일년이 넘게 잠자고 있던 책을 집어들고 리스트를 쭉 훓었다. 가장 처음에 나온 '인천' 편에 마음이 끌렸다. 인천 차이나타운. 차이나타운이란 말이 왠지 멀게만 느껴져 한 번도 가보려고 시도해보지 않았던 나였다. 고향인 부산에도 있는 차이나타운 근처에도 가지 않았었으나, 오늘은 인천에 있는 차이나타운에 가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떡 일어나 대충 씻고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쏜살같이 지하철로 향했다. 강화도도 가고 싶었으나 언니가 차를 쓰는 관계로 포기했다. 2호선 신도림역에서 인천으로 가는 1호선을 갈아타면 되는 구나라고 단순히 생각하고 지하철을 탔다. 1시간 반 이상은 걸리니 '숨결이 바람될 때'라는 책을 챙겨 나왔다.
신도림역까지 가는 동안 책이 아주 유용했다. 첫 장에 나오는 인용구가 왠지 나의 기분과 어울렸다.
-------------------------------------------------------------------------------------
죽음 속에서 삶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는 자는
You that seek what life is in death,
그것이 한 때 숨결이었던 바람이란 걸 알게 된다.
Now find it air that once was breath.
새로운 이름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오래된 이름은 이미 사라졌다.
New names unknown, old names gone:
세월은 육신을 쓰러뜨리지만, 영혼은 죽지 않는다.
Till time end bodies, but souls none.
독자여! 생전에 서둘러
Readers! then make time, while you be,
영원으로 발길을 들여놓으라.
But steps to your eternity.
- 브루크 풀크 그레빌 남작 <카엘리카 소네트 83번> Baron Brooke Fulke Greville, "Caelica 83"
-------------------------------------------------------------------------------------
"아차, 잘못 탔네"
책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1호선 노선을 잘못 탔다. 내 영혼이 죽음과 삶의 경계를 떠도는 동안, 내 몸뚱아리는 독산을 넘어 디지털단지로 가고 있었다. 알고보니 인천행이 아니었다. 결국 구로로 돌아와야 했는데, 구로행 지하철에는 사람이 빽빽하게 많았다. 보통 때 같으면 내 자신에게 짜증이 났을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이 기분이 낯설지 않다. 어디서 이 기분을 느꼈더라.
제주도였다.
제주도에서 길을 잃었거나, 길을 돌아가야 했을 때 그런 기분이었다. 하나를 더 얻은 기분. 화가 나기는 커녕 다른 길을 보아 기분이 좋아지는 기이한 경험이었다. 길을 잃어 발견한 풍경 속에서 뿌듯함을 느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기분을 지금 서울에서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이 빼곡히 서 있는 지하철 안에서 가까스로 창문 곁에 붙어 생각했다. 무엇이 다른 것일까. 내가 제주도에서 느꼈던 기분을 동일하게 서울에서 느끼고 있다면, 그건 필히 공간의 문제가 아니었던 거다. 분명 보이지 않는 마음의 작용이었다.
내 마음이 지금 이 상황을 여행이라고 느끼기 때문이었다. 그 결론에 다다르자 여행의 개념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만약 인생이 어딘가로 돌아가기 위한 여행이라면, 그곳이 만약 하늘이라면, 인생 자체가 여행일 수 있겠구나. 내가 인생을 여행이라고 생각하고 산다면 크게 노할 일도, 크게 슬퍼할 일도 없겠구나. 하나의 경험과 추억이 될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구나.
내가 인생에서 무엇을 남기고 싶은지를 불현듯 깨달은 기분이었다. 지하철 속에서 인생 철학을 논하다니. 참 아이러니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백년짜장 먹으러 가는 길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인천역 1번 출구로 나오니 바로 길 건너에 차이나타운이 보였다. 위압적인 빨간 문은 '여기가 차이나타운이다!'라고 외치는 듯 했다. 문으로 들어서니 낮은 언덕길을 따라 양쪽으로 하나같이 빨간 간판을 단 가계들이 즐비했다. 대만 카스테라부터 전병, 공갈빵 등 간식거리도 풍부했다. 내 이목을 끌었던 건 언덕길 끝에 보이는 거대한 건물이었다. 알고 보니 중국집이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에 한 번 놀라고, 그 옆에 비슷한 건물이 즐기한 걸 보고 두 번 놀랐다. 알고보니 러닝맨 등 다수의 TV프로그램이 이 곳에서 찰영을 했더랬다. 아주 잠깐 유혹의 바람이 들었으나, 목표한 원조 '백년짜장'을 먹겠다며 발길을 다시 옮겼다.
언덕끝에 있는 커다란 중국집들을 지나니 왼쪽으로 낮은 건물들이 눈에 보였다. 단층 건물이 주를 이루는 이 거리에 바로 '만가복'이 있었다. 모든 원조가 그렇듯 '만가복'은 아주 아담했다. 옛날 맛을 지키려고 식당 규모도 늘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줄이 있었다. 길다란 벤치가 카운터 앞에 있었는데 거기 앉은 순서대로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웨이팅리스트를 쓰는 종이도 없으니, 자리를 비우면 그만이었다.
"혼자 왔어요."
15분쯤 기다리다 보니 자리가 났다. 다들 단체 손님이라 혼자 테이블을 차지하는게 미안했으나 나의 위장이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리라는 걸 알기에 당당히 입장했다. 커다란 상아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니 아담하나 중후하고 깔끔한 내부가 펼쳐졌다. 테이블은 테이블 종이부터 숟가락, 젓가락 등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냥 중국집은 아닌거다. 자리에 앉으니 '턱'하고 메뉴판을 준다. 맨 앞 장에는 '백년짜장', '옛날짬뽕'이 커다랗게 써있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백년짜장 하나, 옛날짬뽕 하나 주세요."
"너무 많지 않으세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웨이터의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괜찮아요."
난 확신에 찬 얼굴로 씨익 웃어보였다.
음식은 빨리 나왔다. 주위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 했으나 늘 그렇듯 개의치 않았다. 우선 옛날짬뽕의 국물을 들이켰다. "캬"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가 나왔다. 진한 국물 맛이다. 뽀얀 짬뽕 국물을 연신 들이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토실토실한 여러 해산물도 마음에 들었다. 이제 하얀 백년짜장을 먹어보자는 심산으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