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경은 한동안 잊고 지냈던 부모를 생각한 이후, 부모의 꿈이나 자신의 어린 시절 꿈을 며칠 동안 꾸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런 꿈을 꾸다 새벽에 잠이 깼다. 잠에서 완전히 깨지 못해 실 눈을 뜬 채, 어두운 허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 어둠 속 한가운데 초등학생이었던 자신이 서 있었다. 노랑과 파랑의 스트라이프 줄무늬의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뒤로 묶고 빨간 테 안경을 끼고 있는 모습은 자신의 아홉 살 때의 모습이었다. 그 원피스를 기억하는 것은 고모가 오랜만에 수경의 9세 생일에 사준 원피스였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무슨 말을 시작하는 듯 해 수경은 귀를 기울였다.
“아빠는 지금 또 술을 마시고 있겠지? 예쁜 인형을 좀 사주면 좋겠는데.... 아무도 내 말을 안 들어줘.”
아이는 ‘주연’이라는 동네 친구의 자상한 아버지가 너무 부럽다고 말했다. 아이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던 친구 아버지가 내 아버지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학교에 친구를 데리러 오는 그 아버지의 차도 멋졌고 친구의 방에 가득한 인형이 너무 부럽다고 말했다. 그 친구는 아파트에 살지만 자신은 그 아파트 정문 앞 식당에서 살고 있으며 그 식당에는 작은 방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 네 식구가 붙어서 잠을 잔다고 말했다. 수경은 아이를 따라 예전에 자기가 살던 식당을 따라 들어갔다. 식당 안에는 화장실도 없었고 부엌은 그저 옛날 식으로 바깥에 시멘트를 발라 지어놓은 곳이어서 늘 추웠다. 부엌에는 연탄구멍이 있었고 겨울에는 큰 냄비에 물을 끓여 세수하거나 부엌에서 빨간 대야에 물을 받아 목욕을 했었다. 소변이 급하면 부엌 하수구 구멍 앞에서 금방 볼일을 보고 수돗물을 부어 씻어 내렸다. 대변이 급하면 부엌문으로 나가 옆 건물 중고 자동차 공동 화장실을 이용했는데 아저씨들의 시선이 불편했고 담배꽁초나 침으로 화장실은 더러웠다. 아이는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며 오늘도 아빠가 술을 마시고 새엄마와 소리를 지르며 싸우거나 혹시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그래서 집을 들어서며 자신도 모르게 발소리를 줄였다. 어떤 날에는 가게 문이 닫혀 있었고 아이는 익숙하게 건물 뒤로 돌아가 부엌을 통해 집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아빠가 또 상을 엎고 새엄마를 때린 것을 아이는 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아이는 학교 근처 문구점에서 작은 장난감을 훔쳐 재빠르게 자신의 주머니에 넣기도 했다. 아이가 학교에서 시험을 잘 친 날, 손에 시험지를 들고 요란스럽게 집으로 뛰어들어왔다. 새엄마에게 달려가 그것을 흔들며 자랑했지만 새엄마는 바쁘게 요리를 하며 “응 잘했네.”라고 시험지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아버지는 “네가 머리가 좋으니 당연한 걸 뭘 그리 호들갑 떠냐? 커서 서울대 아니면 대학교 갈 생각하지 마라.”라고 말했다. 오히려 야단을 맞은 기분이 들어 아이는 그 시험지를 책상 위에 던져 버려다.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고 부모에게 자신은 그저 귀찮은 존재인 것만 같았다. 공부를 잘하는 건 당연한 거지 칭찬받을 일이 아니구나라는 생각과 공부를 못하면 도리어 아버지에게 혼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은 TV 드라마 속에서 엄마와 딸이 껴안고 우는 장면이 있었다. 밥을 먹으며 드라마를 보는 새엄마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며 생각했다.
‘나는 엄마가 둘이나 있는데 한 번도 엄마들을 안아본 적이 없어’
서른아홉 수경은 그 아홉 살짜리 소녀가 쫑알거리는 말과 그녀가 이끄는 장소에서 아이가 하는 행동과 표정을 보며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아이는 어리지만 어른들의 말과 행동, 그들이 만든 상황에 대해 궁금해하며 어른들의 눈치를 살폈다. 소녀의 작은 가슴은 늘 두근거리며 불안해했고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랄 만큼 겁이 많았다. 그 소녀는 자신을 쳐다보아주는 것이 너무 좋다며 수경의 앞에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기 시작했다. 수경은 아이의 천진난만한 얼굴이 너무 가여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눈물을 닦고 다시 눈을 뜨니 아홉 살 아이는 없어지고 눈앞에 임신 막달에 불룩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전신 거울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화장실이 두 개나 있는 이 아파트에서 아이들을 키울 수 있게 됐네. 네가 그동안 열심히 살았기에 이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가 되어줄 남편을 만났고 아이들 출산을 기대하고 준비하는 엄마와 아빠가 되었어. 이 아이들에게는 너의 부모보다 훨씬 나은 부모가 되어 줄 수도 있고 너와 다른 환경에서 자랄 수 있게 했어. 이수경, 너 정말 수고했다.”
아이를 낳은 후, 그 아이들이 너무 예뻐 늘 품 안에 안고 잠이 들었다. 아이들의 뒤척거림에 잠을 설치고 몇 번을 깨면서도 등을 토닥이며 그들의 냄새를 맡고 얼굴을 비비며 다시 잠드는 그 무수한 밤들이 행복했다. 이유식을 시작한 시기에는 손 떨리는 가격의 유기농 식재료를 구입해 두세 시간 공들여 다지고 불리고 갈아서 만들었다. 밤낮으로 기저귀를 체크하고 발진 크림을 발라주고 하루에도 몇 번이고 보송보송하고 깔끔한 옷을 갈아입혔다. 잠 오는 아이들이 보채면 한 아이는 가슴에 안고 다른 아이는 포대기로 등에 업고 땀을 뻘뻘 흘리며 재우기도 했다. 아이들이 아플 때면 열을 재고 약을 먹이느라 실랑이를 벌였고 밤새도록 따듯한 물에 수건을 적셔 작은 몸을 닦이면서 울기도 했다. 요리를 잘 못했던 수경은 이제 한 시간 안에 두세 가지 요리를 거뜬히 해 낼 정도로 손이 빨라졌다. 청소하는 게 힘들어도 매일 아이들에게 국수, 요그르트, 과일, 채소를 썰어 먹고 만지고 온 몸으로 놀게 해 주었다. 아이들이 즐거워 웃으면 수경은 행복해 눈물이 나기도 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엄마 나 좀 봐”하는 말이 늘어났고, 그럴 때면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가 호들갑 떨며 칭찬과 동시에 그 순간들을 카메라로 남겼다. 매일 사랑한다고 말하며 이마와 볼, 입술과 손 발, 배와 엉덩이에 뽀뽀를 했고 아이들은 까르르 웃어댔다. 아이들과 함께 춤을 추기도 했고 큰 소리로 함께 노래도 불렀다. 피곤한 날에도 아이들의 말에 귀 기울여 대답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매일 밤, 말끔하게 씻겨 아이들 몸 구석구석 정성 들여 로션을 발라 준 후 깨끗한 잠옷을 갈아입혔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책을 읽어 주었다.
아이들을 돌보는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지켜보는 9세 소녀를 발견한 수경이 멈칫하며 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아이의 눈이 수경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수경의 아이들은 편안한 공간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을 믿고 부모와 눈을 마주치며 마음껏 울고 즐거움에 소리를 지른다. 엄마의 손을 잡고 알아가는 세상을 신기하고 재밌는 곳으로 여기고 부모의 시선이 항상 그들에게 향해 있다는 걸 알기에 두렵지 않다. 아이들은 엄마의 기분이나 아빠의 기분을 살피지 않고 보여주고 자랑할 거리를 만들어 부모에게 과시하고 칭찬을 받으며 흡족해 웃는다. 아이들에게는 자유가 있었고 부모의 사랑을 확신했다.
수경은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 거울 속에 자신을 바라보았다.
‘이수경. 너 정말 잘하고 있어. 너의 아이들은 너처럼 외롭거나 불안하지 않아. 너의 아이들은 네가 떠나도 부모의 사랑에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어. 너는 네 부모와는 달라.’
거울 속 수경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눈 속에 9세 소녀가 슬픈 눈으로 수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야, 너 힘들었지?
외로웠고 늘 불안했지?
네 부모가 너를 바라봐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길 원했지?
너의 손을 잡아주고 너를 안아주며 사랑한다고 해주길 원했지?
네게 무슨 일이 닥치면 네 잘못이 아니라고 실수해도 괜찮다고 말해주길 원했지?
아빠와 엄마가 옆에 있으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니?
네가 뭘 좋아하는지를 물어주길 원했지?
너의 친구들처럼 부모랑 동물원이나 놀이공원, 수영장도 가보고 싶었고 가족사진도 찍고 싶었지?
친구들이 한창 신던 메이커 신발을 너도 신고 싶었지?
아빠가 술 마시지 않고 열심히 돈을 벌어 화장실 걱정, 목욕물 데울 걱정 없이 더 좋은 환경에서 살게 해 주기를 원했지?
천둥치 던 비 오는 밤, 악몽을 꿔 무서워 울고 있는 너를 잠이나 자라고 소리치는 대신 안아주길 바란 적도 많았지?
너도 다른 친구들처럼 인형이 갖고 싶어 사달라고 애원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아 속상했지?
네가 몰래 돈을 훔쳐 아버지에게 몽둥이로 온몸을 맞을 때, 너를 막아주는 엄마가 없어서 얼마나 슬펐니? 새엄마가 자리를 뜨며 너를 피할 때, 너는 이 세상에서 너를 지켜줄 사람은 없다는 걸 알아버렸지?
아빠가 너를 때릴 때, 너는 왜 너를 낳았는지 아빠에게 묻고 싶었던 적이 많았지?
너는 거울을 보며 사람들이 네가 못생겨서 좋아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지?
네가 없어져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었다는 걸 알아.’
수경은 거울 속에서 스물일곱의 그녀를 보았고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너는 처음으로 혼자 사는 곳에서 마음 편히 잠이 들었지? 네가 열심히 일 해 번 돈으로 백화점 매장 거울 앞에서 너를 비춰보며 행복해 보이던 네가 기억나네. Ryan이 네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던 날, 너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아름다웠어. 그가 청혼한 날에는 기쁨에 네 눈이 반짝이는 보석처럼 빛났다는 걸, 웨딩드레스를 입은 너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는 걸 기억해. 결혼 후, Ryan에게 사랑받고 보호받으며 네 얼굴에 드리웠던 그늘을 지워 나갔어.’
서른아홉의 수경이 수경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네 아이들이 네 품에 안기던 날부터 진정으로 환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는 걸 기억하니? 네 아이들에게 너는 우주고, 그 우주 속에서 너의 아이들은 신나고 자유롭게 뛰어놀고 있잖아. 잘 봐. 너는 더 이상 어렸을 때의 상처받은 네가 아니야. 비록 어린 너는 아프고 슬펐지만 서른아홉의 너는, 다른 곳에서 그때와는 다른 사람으로 살고 있잖아. 서른아홉의 너는 정말 좋은 엄마가 됐잖아.
지금 거울 속에 있는 이 사람이 네 엄마이길 바랬지, 소녀야?
네가 어떤 엄마를 꿈꿨는지 난 다 알아. 너무 잘 알아.
내가 엄마 해줄게. 그러니 더 이상 외로워하지 마.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마.
눈치 보지 말고 주눅 들지 마. 친구들 부러워하지 않아도 돼.
문제가 생기거나 힘이 들면 엄마에게 말해. 네 얘기를 잘 들어줄 거고 너를 믿어 줄 거야.
네가 아무리 나쁘고 잘못해도 변함없이 사랑한다고 말해 줄 거야.
그리고 엄마는 네가 다른 사람에게 맞거나 상처받으면 온몸으로 막아서 너를 보호하고 상대를 죽이려고 들 거야. 엄마는 너를 지켜줄 거야.
네가 누구랑 싸우고 돌아온 날은 너와 함께 그 사람을 욕 해주고 네 편이 돼줄게.
네가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나와 함께 방법을 생각하며 해결하도록 노력해보자. 네가 속상한 날은 때론 묻지 않고 너를 안아주기만 할게.
네가 힘들고 지칠 때 너를 누이고 따듯한 밥을 차려줄게. 네 몸과 마음을 휴식하게 해 줄게.
니 잠든 얼굴에 입을 맞추며 사랑한다고 말해줄게.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 어디라도 너에게 달려갈게.
네가 너무너무 갖고 싶어 했던걸 준비해 가끔 깜짝 선물로 기쁘게 해 줄게.
네가 태어나 엄마에게 온 것이 엄마는 가장 큰 축복이라 생각해. 너는 존재 자체 만으로 엄마를 기쁘게 하는 사람이야. 엄마는 네가 태어나 너를 만나고 너와 시간을 보낸 것만으로도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과 보람을 맛보았단다. 너를 기르고 매일 이 엄마는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해 나갔단다.
수경아, 네가 엄마 딸이라 엄마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엄마란다.’
수경은 눈물과 함께 미소 지으며 거울 속 자신에게 말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