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ke 13:14
six days have been defined as work days. Come on one of the six if you want to be healed, but not on the seventh, the Sabbath.
“여섯 날은 일하는 날로 정해져 있다. 치유받고 싶으면 그 여섯 날 중 아무 날이나 와라. 그러나 일곱째 날, 안식일에는 오지 마라.”
회당장이 불평하며 한 말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사람을 치료한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절기와 의무와 율법, 해야 하는 일, 목표에 너무 신경 쓴 나머지 그 안에 긍휼과 사랑이 없어 아픈 병자를 낫게 한 것에 오히려 안식일을 어겼다고 화를 냈다.
나도 이렇게 살고 있다.
목표와 의무와 루틴에 지나쳐서 나에게도 해야 할 일만 집중하게 하고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이 기준으로 훈계하고 가르치려 든다. 관계나 사랑하는 마음보다 해야 할 일, 계획에 집착하는 나를 본다. 그것에 어긋나면 화를 낸다. 결국 내가 만든 계획과 목표가 결국 그 감옥에 갇혀 버리고 사람에게 긍휼이나 사랑을 느끼기보다 내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일은 무수히 많은 일을 처리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주신 관계를 사랑하고 동행하는 일이다. 관계를 맺고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할 일에 치여 가족에게 시간을 주지 못하고 친구와 이야기하지 않고 이웃도 지나치고 사는 나, 그렇게 남에게 줄 시간은 아까워하면서도 쉬는 시간에 유튜브 하고 휴대폰을 들고 빈둥거리는 내가 떠오른다.
주님과 남에게는 자린고비같이 시간을 쓰고 늘 시간 없다고 말하고 내가 이것저것을 해야 하니 너희도 각자 해야 할 일에 집중하고 그 일들을 다 해내라 강요하는 내 모습이 떠오른다.
이런 식으로 살다가는 주님과 나도 멀어지고 나와 아이들도 멀어지게 될 것이다.
'사랑'은 없고 그저 해야 할 일로만 관계가 채워지게 된다. 이것은 사랑 없이 종교적으로 절기와 종교행위를 더 중요시한 바리새인의 모습이었다. 이것은 주님이 바라시는 일이 아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해석하고 행동하는 방식은 완전히 정반대이다.
바리새인들은 해야 할 일, 따지고 지킬 종교행위에 집중하지만 예수님은 관계에 집중하신다. 그것이 차이다.
한 토끼가 나무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겁을 먹고 뛰기 시작했다. 그 토끼를 본 사람들도 따라 뛰기 시작하더니 점점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들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이제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함께 뛰었는데 그 누구도 자기들이 왜 뛰는지, 어디로 뛰는지를 모르고 뛰었다.
이것은 무수히 짜놓은 계획과 루틴, 해야 할 일, 지켜야 할 일 사이에서 진정 무엇을 위하는 것인지, 왜 그것을 하는지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잠깐이라도 바라보지 않는다면 곧 사방에 어둠이 밀려온다.
그래서 관계에서 멀어지게 하고 할 일로 분주하게 만든다.
우리는 진정 안식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우선시하고 주님이란 포도나무에 붙어있게 된다면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란 생각을 갖고 열매를 내가 쥐어짜 만들려고 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그저 포도나무에 매달려 충분히 그 양분을 흡수하고 먹고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그 자리에 잘 붙어있기만 하면 된다.
우리를 진정 안식할 수 없게 하는 것은 거짓으로 미혹된 된 마음이다. 세상이 가라고 하는 길, 사람들이 다 가는 길로 가는 길은 안식을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결국 진정한 안식은 주님과 함께 있을 때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주님 뜻 안에 거하면 진정으로 안식할 수 있다.
이 말은 주님 뜻 안에 거하기가 힘들면 안식을 누릴 수가 없다는 말이 된다.
어떻게 주님의 뜻 안에 거하고 안식할 수 있을까?
주님이 포도나무고 내가 가지라면 나무로 인해 가지가 붙어 있는 것이지 가지가 매달릴 수는 없다.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각성을 하고 내가 주님 은혜 안에 머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매달리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기에 용만 쓰이지 안식할 수 없다.
주님 뜻 안에 거하려는 성도의 의지와 결단으로는 머물 수가 없다.
주님이 뜻 안에 거하게 해주셔야 한다.
오히려 주님 뜻 안에 가장 걸림돌 되는 것이 가지들이다. 이 가지들은 우리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말씀 보면서 자의적을 해석한다. 주체가 나라면 실질적으로 주님 뜻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선악주체를 생각하는 내가 말씀 보며 해석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 결코 아니다.
전적으로 주님 말씀을 성령만이 알려주시는 것으로 인도받아야 한다.
말씀, 환경을 통한 주님의 인도가 여전히 주체가 내가 되어있다면 나는 주님 뜻 안에 머물 수가 절대로 없다.
나 자신을 부인하고 완전히 죽어야 그 인도를 따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의지대로 되지도 않고 이해하기도 어렵다.
마귀가 심어 놓은 죄가 이토록 크다.
우리는 우리의 사고로는 절대로 주님 말씀을 제대로 분별할 수가 없다.
주님이 보여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알 수가 없고 받아들일 수가 없다.
사람의 마음보다 더 부패된 게 없어 죄성은 말씀을 통해서도 나를 속이고 기만한다.
예수님을 말씀으로 시험했듯 내게도 말씀으로 속이기에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착각하기도 쉽다.
우리는 우리 죄에 대해 잘 모른다.
얼마나 잘 속이는지 얼마나 교묘한지 너무 막강한 존재이기에 절대로 전체를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표면적으로 아주 미세먼지만큼 약간 아는 정도일 뿐.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넘어진다.
진정으로 안식을 누리는 핵심이 주님 뜻 안에 머무는 것, 전적으로 성령님께 의지하는 일이라면 내 안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는 주님의 포도나무에 붙어서 생명을 온전히 누릴 수가 없다.
내 자신을 부인해야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다. 나만큼 가장 무서운 적이 없다. 자아로 포장되어 나인 줄 아는 내가 사실은 죄다. 무슨 공포영화처럼 타인이 내 얼굴로 둔갑한 것처럼 죄가 나라고 생각하는 내 정체성으로 둔갑해 내 안에서 산다. 마치 적과의 동침인데 나는 그것을 나로 인식하지 적이라고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죄가 이토록 무섭고 교묘하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그 죄에 나도 모르는 사이 속아서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내가 믿는대로 돌아가는 것만 같다. 이것에 속지 않아야 한다. 말씀을 내 생각과 내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이 그래서 위험하다.
말씀을 성령의 인도가 아닌 자의식적으로 해석한다면 바리새인들처럼 종교생활과 율법을 따지고 해야하는 일을 열거한다. 그것을 못했을 때 다른 사람을 나무라고 자신은 그 일을 성취해내는 데만 너무 몰두하게 된다.
나와 관계하시는 성령님께 의지해 말씀을 이해하고 인도를 받는다면 할 일보다 인간 관계에 몰두하게 된다. '사랑'을 그 어느 가치보다 더 높고 귀하게 여겨 '사랑의 행위'를 하게 만든다.
그것은 내가 의지로 내서 하는 종교행위가 아니다. 전적으로 성령이 말씀의 의미를 가르쳐 이해하게 해주시고 '사랑의 관계', 즉 목적을 바라보게 하심으로 그 능력까지도 주신다. 결국 그 속에 나의 안식이 있다.
그것이 내가 의지를 내어 사는 삶과 전적으로 주님의 안식에 머물며 사는 삶의 차이다.
결국 죄문제가 해결 되지않으면 절대로 우리는 안식을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