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 단순한 지식과 깊은 이해의 차이

by Momanf

마가 6:2-3

2절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은 어찌 됨이냐?’”

3절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목수의 아들, 우리가 어릴 때부터 보아온 동네 사람.

그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안다. Knowing 정도로 그 사람 '내가 알지'

이 Knowing 은 그저 단순한 지식이다. 이 knowing에 갇히면 새로운 것을 보지 못하고 확장된 사고를 할 수 없다.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을 보지 못하고 다른 의견을 수용할 수도 없다.

Knowing은 닫힌 문이 될 수 있다. 그 안에 편견이 생기고 더 이상 알아갈 노력이나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는다. Knowing은 정적이다. 그 자리에 머무르고 고이려고 한다.


하지만 UNDERSTANDING은 다르다.

열린 문이다. 찬찬히 조금씩 알아가고 내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이 정도는 이해하고 나머지는 이해할 수 없더라도 과소평가나 편견으로 문을 닫는 대신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기대하며 늘 새로운 길로 열어놓고 감탄하고 놀라고 신나 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분명 패턴도 인식하고 있지만 변수가 있음을 알기에 다방면에서 이해하는 마음을 열어놓는 것, 확장, 변화, 개선으로 언제나 생동감 있게 제자리에서 머무르지 않고 움직인다.

이것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다는 믿음과 소망을 준다.


우리가 사람에게 들이밀어야 하는 지식은 Knowing이 아니라 Understanding이 되어야 한다.

Understanding에는 긍휼히 있다. 긍휼은 (히브리어로 자궁:RACHAM) 어머니의 젖먹이 아기에 대한 사랑처럼 깊은 애정이 있어야 한다. 영어 COMPASSION처럼 고통받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또한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긍휼이라고 설명하며 인간이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증거가 된다.


이 긍휼 한 마음이 막히는 것은 내가 한 사람을 knowing 한다고 단정 지어버리기 때문이다.

너는 이런 패턴이 많으니 이런 사람이야, 내가 알아하며 라벨을 붙이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옴짝달싹 할 수 없이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아무리 변화를 하고 싶어도 '그럼 그렇지.' , '그래. 네가 항상 해오던 걸, 내가 달라질 수 있을 거라 착각했네' 식으로 내 사고가 그를 고정시켜 놓고 못을 박는 것과 같다. 내가 그를 죄인 취급하고 변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네가 어떤 모습을 많이 반복해도 너에게는 또 다른 모습으로 배우고 성장할 부분이 많아. 지금은 이런 모습이라도 너는 성장하고 발전할 거야. 너는 할 수 있고 너에게는 무궁무진한 잠재력이 있다. 젖먹이 아이처럼 한 사람을 바라봐야 한다. 이것은 understanding으로 한 사람을 깊게 이해하는 것이다.


주님도 나를 이렇게 바라보고 계신다.
너는 죄인이었지만 내가 새 생명을 줄게. 이제 다시 태어나서 내 내 사랑을 받고 크렴~
너에게는 무궁무진한 잠재력이 있고 너는 지금 비록 미성숙해서 아무것도 제대로 못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실패의 연속일지 몰라도 나는 네게 약속한 대로 너를 내 첫아들 예수와 같이 만들겠다. 그러니 넘어져도 괜찮다. 실수해도 괜찮다. 또 일어나 나와 함께 걷자. 멈추지 말고 네게 주어진 시간까지 노력해 보자. 너에게 이런 부분이 있지만 너에겐 저런 부분도 있다. 모두에게 강점과 약점이 있다. 나는 네가 가진 그 특유의 성격이 재밌다. 너는 또 실패 속에서 배우고 발견하는구나. 기특하다. 나는 너를 보고 있으니 즐겁구나.
주님이 이렇게 나를 understanding 하시기에 누구보다 나를 잘 아시고 나의 다양한 면을 아시며 용서하시고 사랑해 주신다.


이처럼 나도 상대를 관찰하고 매일 성장하는 상대를 발견하기로 마음을 열어놓을 때, 그에게 애정이 생기고 이해하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 결국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내가 그 사랑을 적용해 다른 사람을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하게 되는 방법이다.


오병이어.

Knowing은 자꾸 상황, 사람에게 한계를 정하고 내가 다 안다고 말한다. 그것이 자꾸 무한하고 전지전능하고 한계가 없으신 주님까지 제한하게 한다. 분명 이것은 세상이 주는 거짓말이다.

세상은 한계를 만들어 이 돈이나 명예, 인기가 얼마 안 남았으니 지금 당장 이것에 집중하고 가지기 위해 사력을 다하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꼭 쇼핑호스트가 주님께 향한 시선을 흐트러지게 하려고 제한된 , 세상의 썩어빠질 가치들을 나열해 , 시간도 제한을 두고 급하게 팔아치우고 또 새로운 물건을 가지고 오고 팔고 이렇게 반복하며 사람들의 모든 관심을 죄성과 세상에 묶어두는 것 같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돈과 에너지를 묶는다.

하나님은 무한하시다. 능력이 영원하시며 넘치고 흘러 닳지 않는다. 기회는 넘치도록 있고 늘 새로운 기회가 생성된다. 늘 주님의 돕는 손길 덕분에 돕는 상황과 사람들이 넘쳐난다. 내가 그것을 매일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제한하지 말자. 내가 다 knowing 하고 다 아는 것처럼 되는 것, 안 되는 것 구별하며 살지 말자.

늘 확장하고 새롭게 보자. 감탄하자.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기대하자.


물 위를 걷는 예수님.

주님은 우리의 사고를 뛰어넘고 물 위를 걸으신다. 우리도 주님을 바라보고 걸을 때,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존재는 불어오는 작은 바람, 풍파에도 금방 흔들려 빠지고 만다. 세상은 이것을 보고 한계라고 하며 영원하신 예수님을 가로막고 풍파를 바라보게 해 두렵게 만들고 육체적인 사망의 공포를 상기시키며 협박한다.

하지만 그 너머에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있다. Understanding으로 내 앞에 보이는 위협이 전부가 아님을 기억하자.


아이들이 이 understanding을 잘한다. 아이들은 자기가 보는 것을 전부로 믿는 미성숙한 부분도 있지만 다 잘 안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스스럼없이 다가가고 끊임없이 도전해 본다.

무엇보다 자기가 사랑하는 부모나 어른들에게는 무한한 신뢰가 있어서 자기를 보호하는 어른들을 확실히 믿는다. 부모는 하나님처럼 한 아이에게 전 우주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꿈을 꾸고 한계가 없어 늘 새로운 하루를 즐거워하고 무엇으로든 재미를 느끼고 새로워하고 감탄하고 몰입한다. 이것저것 한계를 이야기하고 자기 판단으로 선을 그으며 기회조차 제한하는 어른들과는 다르다.

우리가 understanding으로 무엇이든 생각한다면,

아이들처럼 제한 없는 상황과 사람들에 감탄하고 즐거워하고 신나는 것을 발견해 설레어하고 노는 일로 삼고 무엇이든 상상하고 바라며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마음껏 웃고 걱정을 내려놓고 전적으로 주님을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누구냐?"라고 물으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날마다 물으신다.

여기에 Knowing을 대입한다면 주님을 인간과 비슷한 존재로 내가 이해하는 것만큼만 주님을 알게 된다. 그러면 작은 사고로 율법이 기준이 되어 주님을 벌주시는 사람, 상 주시는 사람. 세상의 사람처럼 밖에 생각하지 못하고 종교행위를 하게 된다.

하지만 주님을 understanding 한다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무한한 주님께 마음을 열고 주님께 모든 근심과 걱정을 맡기고 세상에 뛰어들 수 있다. 확실히 믿는 구석이 있기에 뛰어놀 수 있는 아이들처럼 주님을 온전히 기쁘고 즐겁게 누릴 수 있다.


Luke 9:41

Jesus said, “What a generation!


No sense of God, no focus to your lives.


How many times do I have to go over these things?


How much longer do I have to put up with this?


Bring your son here.”

No sense of God, No focus to your lives.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니, 너희 삶에도 중심과 목적이 없다.”

하나님을 knowing 하지 않고 understanding 했을 때, 결국 우리 자신과 우리 삶의 중심과 목적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을 knowing 하면 한계가 있고 한계는 죄성이고 세상이다. 그것은 결국 내 사고로 주님을 생각하는 것이기에 결국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닌, 자기 생각으로 만든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이다. 결국 자기를 신으로 믿고 사는 것일 뿐이다.

이 누가복음 구절은 예수님의 능력을 받은 제자들은 아이를 낫게 하지 못했고 오히려 무례한 사람들을 자기가 받은 능력으로 벌하자고 말했다.

우리의 knowing은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을 그저 다른 사람을 벌하고 복수하거나 아예 쓸모없게 만들 뿐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undestnding 했을 때, 자유와 무한한 가능성과 확장을 경험하게 되고 거기에 진정한 변화가 있다.

understanding 하면 주님 주신 능력이 사람을 살리고 변화를 시키지만 knowing 하면 내 중심이 되어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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