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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데이 May 14. 2022

호캉스 가서 뭐하고 놀아요?

일상과 분리된 시공간에서 시간부자 처럼 즐기는, 부지런한 게으름


'호캉스 어케하는지 몰라서 먹기만 하다 옴'


습관적으로 SNS 피드를 쓱쓱 내리다가 발견한 고등학교 동창의 게시물 글 한줄. 함께 올라온 사진에는 각종 배달음식의 향연이 펼쳐져 있었다. 음식 뒤로 언뜻언뜻 보이는 객실 가구와 인테리어로 미루어 보아 서울 시내 꽤 좋은 호텔인듯 한데, 어째 방에서 온종일 삼시세끼 전부 배달음식과 술로 채운 것 같다.



순간적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불쑥 들긴 했지만, 사실 호텔에 가서 뭘 하며 즐기든 (주변에 피해만 안준다면) 거기엔 정답이 없다는게 평소 생각이다. 초특급 호텔이건 가성비 호텔이건, 잘만 즐기면 어디서든 최고의 호캉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렇다면 나는 호텔에 가서 뭘 하다 오지? 세어보니 지난 3년여 동안 1년에 평균 35박, 약 70일을 호텔에서 보냈는데 말이다. 결코 적지 않은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에 대해 말해 보자면, 첫번째 글에서 간단히 언급했던 '부지런한 게으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상과 분리된 공간


호텔 객실을 둘러보면, 일상을 보내는 집과 매우 닮은 공간이지만 정작 가장 일상적이고 생활의 냄새가 날 법한 부분은 완벽히 생략되어 있다. 스위트룸 거실은 우리집 거실과 구조는 매우 비슷하지만, 우리집 거실에 있는 빨랫대도, 청소기 스탠드도 보이지 않는다. 천장에 빨래 건조대가 달린 베란다도 없다.


@코트야드 서울 보타닉파크, 파크 스위트룸 (2021)



호텔에서는 차를 마신 뒤에도 컵을 씻어 건조대에 올려두는 일상의 행위가 따라붙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그런걸 할 만한 공간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물리적으로 생략되니 신경도 저절로 차단되는 걸까? 그저 잘 준비된 찻잔에 차를 마실 뿐이다.


@페어몬트 서울 (2021)



집에서는 반신욕을 즐긴 후 욕실 밖으로 나가는 순간 일상이 다시 시작됐다면, (사실 욕실 밖을 나서기 전에 이미 시작된다. 배스밤 잔해가 남은 욕조부터 닦아야지..) 호텔에서는 욕실 밖을 나가도 여전히 여행중이다.




이런 점 때문에 호텔에서는 머릿속을 비우고 온전한 휴식을 취하기가 집보다 훨씬 쉽다. 그래서 호텔을 찾을 때면, 일상과 분리된 공간이라는 장점을 최대한 살려 부지런히 게으름을 즐긴다.




욕조가 있는 객실이라면 목욕 타임은 꼭 즐기는 편이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챙겨온 태블릿으로 영화를 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오롯이 그냥 목욕만 즐긴다. 생각을 정리한다거나 그런건 없다. 그냥 온 몸의 긴장을 다 풀고 멍하니 아무 생각 없이 물멍 타임을 가질 뿐.


@레스케이프 서울, 아틀리에 스위트 (2020)




객실에서 즐기는 티타임도 빼놓을수 없는 시간. 회사에서 각성제 용도로 들이키던 커피가 아닌, 정말 그 순간을 즐기기 위해 음미하는 티타임을 갖곤 한다. 집에서는 항상 커피나 차를 한잔 타서 컴퓨터를 켜거나 하는 식으로 무언가를 하며 부가적으로 마시는데, 여기선 그냥 차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 차만 느긋하게 마실 뿐이다. 회사에서 소음 차단용으로 듣던 노동요가 아닌,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음악으로 BGM도 깔아두고.




호텔에서 부려보는 게으름중 가장 우아한 게으름은 아마도 인룸다이닝이 아닐까 싶다. 물론 뷔페도 좋다. 그치만 가끔은 내가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서 안씻은 채로 조용히 밥부터 먹고 싶기도 하다. 여러 사람과 부대끼지 않고 말이지. 전화 한통이면 새하얀 린넨이 깔린 테이블 위에 식사가 차려지니 이보다 더 좋을수가.


@ JW메리어트 동대문 (2021)





기분 좋은 긴장감


호텔이라는 공간이 일상과 비슷한듯 다른 이유는, 단지 생활의 냄새가 나는 공간이 생략되었기 뿐만은 아닌 것 같다. 생략되지 않은 공간 조차 집과 비슷하면서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 아마도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정돈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집 식탁 보다 좀 더 큰 6인용 테이블에는 웰컴 스낵인 달고나가 든 유리병 딱 하나만 놓여 있다. 집 식탁이었으면 영양제통 몇 개와 물휴지 같은 것들이 올려져 있을테지. 마치 모델하우스 처럼 연출된 이 공간에서 나는 챙겨온 책 한권을 술술 읽어 내려갔다. 집에서는 사놓고 몇일 째 펴 보지도 않던 책인데 말이다.


@라이즈 호텔, 프로듀서 스위트룸 (2019)




침대는 또 어떠한가. 침대는 사실 생활의 냄새가 제일 많이 깃드는 가장 현실적인 공간이다. 그치만 그 현실적인 공간을 뒤덮는 호텔 베딩 만큼 비현실적인게 또 있을까? 각기 다른 종류의 베개가 사이즈 순으로 착착 세워져 있고, 아마도 침대에 올린 다음 한번 더 다려졌을 것 같은 이불 커버는 한치의 빈틈과 주름 없이 팽팽하게 당겨져 매트리스 밑에 끼워져 있다. 그 위엔 화룡점정으로 베드 러너까지 올려져 있고.


@시그니엘 서울 (2020)




집과 닮아 있어서 편안한 동시에 인위적이고 비현실적인 공간. 여기에서 알게모르게 풍기는 미세한 긴장감 같은게 있다. 이 묘한 긴장감은 딱히 불편하거나 싫다기 보다도 오히려 기분 좋은 느낌을 갖게 하는데, 덕분에 집에서 보다 더 잘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몰입하기.




호텔에 가서 부지런히 게으름을 피우며 휴식을 취한 후에 하는 또 다른 종류의 여가활동들은 차분한 게으름과 달리 뇌를 사용해야만 하고 때로는 몰입이 필요하기도 하다.




나의 경우는 평소에 밀린 신문을 몰아서 보는 일 (시대에 안맞게 종이 신문을 구독하고 있다), 일기 쓰기, 사놓고 방치해두던 책 읽기, 사진을 정리하고 블로그에 포스팅 하기 (호텔여행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글 끄적이기 등이 있다.


일상을 뒤돌아 보는 일기 조차도, 일상에서 한발짝 떨어지면 더 잘 써진다 @목시 서울 인사동 (2020)



누군가는 이런 일 전부 집에서 충분히 할 수 있지 않냐고, 집에서 잘 안되는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다. 물론 맞는 말이긴 하다. 그치만 집을 떠나 호텔에 오니 정말 더 잘되는걸 어떡하랴.





시간 조각모음


사실 호텔에 와서 몰입이 잘되는 이유가 단순히 호텔이라는 '공간' 때문 만은 아니다. 또 다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집에서와 달리 '시간'을 통으로 몰아서 쓸 수 있기 때문이라는게 나의 결론이다.




나는 타임푸어다. 우리 말로 바꾸면 '시간빈곤자' 정도가 되겠다. 뭐 어느 직장인이 그러지 않겠냐만은, 항상 바쁘고 시간에 쫒겨 산다. 밥벌이로 삼고 있는 일이 매번 프로젝트 단위로 돌아가기 때문에 업무 강도가 높은 편이기도 하고, 주 52시간 근로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탓에 바쁠 때는 새벽 4시 넘어서 택시에 시체처럼 실려 퇴근할 때도 있다.




때문에 회사에 헌납하고 남는 시간은 매우매우 소중하다. 그치만 소중함을 알면서도 집에서는 이 시간을 그냥 번아웃된 무기력한 상태에서 흘려보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된 여가와 휴식이 없이 그저 즉각적인 즐거움을 얻기 위해 공허하게 폰만 본다던지 하면서. 게다가 변명을 좀 하자면, 집에서의 시간은 중간중간 산만함과 생활의 냄새가 자꾸 침범하는 탓에 여러개로 쪼개져 버려 몰입도 어렵다.




그리하여 이 소중한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기 위해 일상으로 부터 한발짝 떨어져 보고자 한다면, 때로는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기도 하다.

예를 들면, 나와 호캉스 짝꿍 남편이 둘다 절대 야근을 하지 않을 것 같은 날을 골라 두 사람 각각의 직장으로 부터 적절한 거리에 위치한 호텔을 예약하는, 이른바 '퇴근길 호캉스' 같은게 바로 이 계획의 산물이다. 주말 같은 경우에는 토요일에 조금 일찍 일어나 집에서 해야할 일들을 몰아서 처리한 후, 호텔에 도착해서 정식 체크인 시간 전까지 라운지에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쉐라톤 그랜드 인천  클럽 라운지



집에서나 호텔에서나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똑같다. 그치만 일상을 벗어나면 쪼개진 시간들을 하나로 딱 합칠 수 있게 되어 체감상 시간이 더 많아 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집과는 달리 빨리 빨래를 꺼내 널으라고 재촉하는 세탁기 종료 멜로디도 없고, 설거지 다 되었으니 세척기 뚜껑을 열어야 하는 식기 세척기도 없으니 (우리집 식기세척게에느 자동 문열림 기능이 없다) 방해하는 그 무엇 하나 없이 그저 확보된 이 시간을 즐기면 된다. 30분 씩 4번 보다 2시간 내리 확보된 시간이 훨씬 가치 있음은 누구나 수긍가는 부분일 것이다.




이상 짤막한 도심 호캉스에 와서 내가 주로 하는 것들에 대해 적어보았다. 사실 나도 좀더 색다른걸 하는 호캉스를 꿈꾼다. 서양사람들은 휴양지에서 몇 주씩 바캉스를 즐긴다더라- 라고 말로만 들어온 것처럼, 도시를 벗어나 이국적인 호텔에서 유유자적 하면서 하루종일 수영장 선베드에 누워있다던가, 아니면 디지털 노마드 처럼 몇 달 동안 로컬 힙스터들이 가득한 해외 호텔 라운지 같은데서 일도 하고 커피도 마시면서 즐기는 그런 호캉스를 한번 쯤 경험해보고 싶다. 시간을 모아모아 사용할 필요 없이 마음껏 여유를 부리는 그런 시간부자의 호캉스 말이다.


나중에 '호캉스 가서 뭐하고 놀아요?'라는 동일한 주제로 글을 적는다면, 그 때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쓸 수 있기를 바래본다.





본 글은 2021년 네이버 여행플러스에 연재한 글을 재구성하여 작성하였습니다.(원문)






선데이(타임푸어)

월요일이 싫은 시간빈곤자, 급여생활자, 사무인간.

언제나 내일도 일요일인 것 같은 일상을 위한 호텔 여행을 즐기고 있다.

'3년 안에 국내 호텔 100개 여행하기'에 도전성공.


블로그 내일도SUNDAY

메일 sunday40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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