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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y 02. 2021

05. 내 몸의 1할은 디즈니 노래로 이루어져 있어.

'Kiss the Girl', 인어공주 O.S.T, 1989

아직 어린이였던 나를 이루는 중요한 세계 중 하나는 디즈니였다. 80년대 중반 태어난 우리 세대에게 디즈니 월드 경험은 지브리 경험만큼 보편적인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미녀와 야수(1991)’, ‘알라딘(1992)’, ‘크리스마스의 악몽(1993)’, ‘라이온 킹(1994)’, ‘포카혼타스(1995)’, ‘노틀담의 꼽추(1996)’, ‘헤라클레스(1997)’, ‘뮬란(1998)’을 극장이나 비디오를 통해 모두 보았다. 침체되었던 디즈니 세계의 화려한 부활을 알린 작품이 ‘인어공주(1989)’이니, 나의 유년기는 우연히도 디즈니의 부흥기였던 셈이다. 나를 열광케 했던 디즈니는, 유년기가 끝남과 동시에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는, 완전히 닫힌 세계이기도 하다. 불과 몇 년 전, (그나마도 디즈니라기보다는 픽사 작품인) ‘업(2009)’을 보기 전까지 나는 디즈니 만화를 보지 않았다.


시각적 경험과 서사에 비하면, 디즈니의 O.S.T.는 오래도록 내게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엄밀히 말해, 나는 결코 디즈니의 노래를 잊은 적이 없다, 아니, 잊을 수 없다. 그렇게 많은 작품을 섭렵하고도 ‘일요일엔 영화를’에 단 한 편의 디즈니도 쓰지 않았지만, ‘우리는 노래한다’에서라면 불가능하다. 약간 과장을 보태자면, 나는 수년 동안(1년이었는지, 2년이었는지, 아니면 5년이나 6년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시절의 시간은 지금에 와선 좀처럼 가늠이 되지 않는다) 하루도 디즈니 O.S.T 씨디를 듣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나는 'Classic Disney' 앨범을 Vol.I부터 III까지 갖고 있었다. 아직도 Vol.I의 신비로운 붉은빛 커버를 생각하면 가슴이 뛸 정도다. 이 무한 반복 때문에 인어공주, 알라딘, 라이온 킹, 뿐만 아니라 메리 포핀스까지 주요 곡은 당연히 모두 섭렵한 상태였다. 그래서 합창단에서 디즈니 메들리와 ‘미녀와 야수’를 불렀을 때, 나는 신이 났다. 내가 모르는 노래는 거의 없었으니까. 게다가 그걸 소리 내어 부를 수 있다니! 맙소사.


경쟁자가 쟁쟁하지만, 최고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인어공주’다.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인어공주’를 나는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다시 볼 의지도 없다. 왕자에게 목숨이 걸린 뒤웅박 팔자 공주들에 대해서는 언급할 가치도 없다. 나는 사회적인 메시지가 생각보다 강한 ‘메리 포핀스’나 셰익스피어적인 스토리와 자연의 웅장함이 깃든 ‘라이온 킹’이 더 좋은 이야기,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음악에 대해서라면 꽤 확고하다. 나는 아직도 자주 세바스찬의 남미 이민자 억양과 발음을 생각하고, 세바스찬은 나를 웃기는 데 실패한 적이 없다. ‘Under the Sea’를 듣고 엉덩이나 어깨를 흔들어보지 않은 자, 내게 돌을 던질지어다.


현명한 세바스찬은 어리고 어리석은 에리얼에게 육상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바다 아래 세계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다른 바다 속 친구들과 함께 애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최애곡은 바로 오늘의 노래, ‘Kiss the Girl’이다. 에리얼과 왕자가 키스하도록 부추기는(보기에 따라선 키스를 종용하는) 곡이다. 세바스찬의 진두지휘로 물 속 친구들이 또 한 번 애쓴다. 이번에도 단순한 삽입곡을 넘어, 음악 자체가 시퀀스를 이룬다.


‘Under the Sea’처럼 흥겹고, 가능하면 2인 이상이 함께 부르는 곡에 대한 편향이, 확실히 내게 있다. 나는 발라드를 지겨워한다. 감상적인 음악은 좀처럼 감상하지 못한다. 쿨하고 팝하고 가볍고 때로는 그래서 하찮아 보이거나 인상적이지 않은 쪽이 좋다. 아니면 개성과 유머를 넘어 병맛 나는 게 차라리 낫다. 진지하고 육중한 건 재미가 없다(이젠 당신도 알겠지만, 나의 단어사전에서 ‘재미가 없다’는 건 심각하게 그릇되고 부도덕하고 추한 것으로서, 부당하고 가혹할 정도로 부정적인 가치판단으로 오염되어 있는 어휘이다). 그래서 ‘Part of Your World’나 'A Whole New World', 'Colors of the Wind' 같은 노래에 잘 반응하지 못한다. 나는 재미와 유머, 위트가 좋다. 인간사, 때와 장소와 경우가 다양하니 감정도 다양하고, 곡도 다양한 템포와 무드로 불리고, 그래야 경우에 맞는 인간이 된다는 것 정도는 안다. 굳이 선호를 밝히자면 그렇다는 뜻이다.


이 노래로 말할 것 같으면, 로맨틱 하(기를 강요하)고, 'Under the Sea'만큼 흥겹지는 않지만, 의도적으로 합주의 느낌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연주 행위라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음악 안으로 끌어들인다(시작부가 "타악기, 현악기. 관악기! 가사~“ 하면서 세바스찬이 지휘하도록 되어 있다). 세바스찬이 노래하는 와중에 각종 음악 친구들은 열심히 코러스도 한다. 주인공은 물론 공주와 왕자이지만, 이 시퀀스를 보면 마치 오케스트라 연주영상이나 뮤직비디오를 연상하게 된다. 이 시퀀스는 곧 이 퍼포먼스(연주)인 것이다. 나의 정체성을 이루는 것 중에는 합주와 합창이 있는데, 아마도 나는 합주와 합창을 하기 전에도 이런 구성과 연주방식을 좋아했나보다.


아마도 우리는 이 노래를 함께 불렀을 것이다. 당신도 이 노래 부르기를 재미있어 했을지는 의문이다. 어쩌면 지루한 곡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사실 당시에 이 노래를 부르면서 나는 실망했었던 것 같다. 내게는 중요한 곡이었지만, 우리가 해내야 할 디즈니 메들리 안에서는 이 곡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대신 나는 디즈니 메들리를 부르다 'Fathoms Below'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 뱃사람들의 노래만큼은 O.S.T.에서보다 우리가 부른 편곡이 아름다웠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나는 아직도 베이스가 해면에서 다이빙 해 수심이 삼만 리 쯤 되는 해저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것처럼 끝 간 데 없이 낮은 음성으로 둠둠둠둠 하던 도입부를 머릿속으로 재생하며 혼자 소름 돋아 하곤 한다. 오늘 밤 꿈속에서는 인어공주 공연이나 재생되었으면 좋겠다. 신나고 재밌는 잠이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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