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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y 16. 2021

07. 나의 주제가

I Will, Beatles / Nightswimming, R.E.M.

나에게는 주제곡이 있었다. 누구나 자기 주제곡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십대 언제쯤인가 처음 들은 그 순간부터 이 노래 'I Will'은 내 노래가 되었다. 연주시간 1분 48초, 2분도 채 되지 않는 소품 같은 이 곡은 멜로디도 연주도 가사도 간결하다. 짧고 간결하다는 존재론적 특성은 형식적으로 내게 부합한다. 나는 늘 이 노래의 가사를 되뇌었고 일기장에 쓰기도 했다. 그 가사는 나의 주문이었다. 그 주문은, 내가 사랑하며 기다리는 누군가가 언젠가, 마침내, 짜잔! 내 앞에 나타나고 말 것이라는 자기암시였다.


폴 매카트니가 이 곡을 작곡할 당시 개인적 배경과 달리(결혼할 여자와 사랑에 빠져있었다), 내게 그 기다림의 대상, 사랑의 대상이 꼭 인간 존재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건 내 운명을 향해 부르는 노래였기 때문이다. 운명의 상대가 사람일 필요는 없었고, 사랑의 대상으로 다른 인류가 중요해질 날이 미래의 언젠가 찾아왔지만, 아직 그 사실을 알기 전의 나는 대학이라든가, 꿈이라든가, 장래와 미래 같은 일신상의 것에 몰두해있는 아이였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다소 특이한 믿음이 있었다. 그 운명적 사랑은 반드시 노래와 함께 나타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가 운명임을 알아차릴 것이었다, 그 노래를 듣고 말이다. 바로 이 가사처럼.     


그리고 마침내 내가 널 찾아냈을 때,

그곳엔 네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을 거야.

크게 노래해줘, 내가 널 들을 수 있도록.

쉽게 네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말이야.


그래서 그해 여름, 그 남자가 어떤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을 때 나는 바로 알았다. 이 노래가 바로  노래라는 것을, 내가 지금  노래의 주인을 찾았다는 것을 말이다. 처음 듣는 노래였는데 그 순간을 나는 놓치지 않으려고 옆에 있던 W 오빠에게 노래제목을 슬쩍 물어봤다. 신기하게도 W 오빠가 그 노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모를 만도 했는데, 세상엔 가끔 희한한(혹은 운명적인?)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 노래는 이런 노래였다. 


Nightswimming deserves a quiet night …     


그 남자가 몇 소절 정도 흥얼거렸을텐데, 그후 나는 영원히 이 노래를 좋아하게 된다. 내 노래라고까지는 못해도 여름이면, 특히나 선선해지기 시작하는 늦여름이 다가오면 이제는 내가 이 노래를 흥얼거리곤 한다. 지난 여름, 잦은 야근과 쌓여가는 피로 때문에 자주 택시로 가양대교를 건널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R.E.M.의 말(가사)처럼 Nightswimming 은 정말이지 조용한 밤에 제격이다. 지금 밤수영을 하는 사람이 부르는 노래가 아닌, 밤수영을 했던 지난 날을 회상하는 사람의 노래이기 때문인 것 같다. 현악기 튜닝 같은 도입부가 지나면 피아노와 마이클 스타이프의 호소력 있는 보컬이 노래를 꽉 채운다. 회상하는 독백이 끝나고 9월 밤의 선선한 바람과 생각만이 남았을 때, 보컬을 대신해 등장하는 오보에의 짧은 솔로는 곡을 사색적이고 서정적으로 마무리하는 데 더없이 완벽한 역할을 한다.


이제 모든 것을 다 알게 된 지금, 이 노래는 서곡이었다고 말하겠다. 모차르트와 바흐, 디즈니와 영화음악, 뮤지컬과 오페라로 가득 차있던 내 음악세계에 곧 일어날 빅뱅의 서곡 말이다. 내 음악적 세계에 돌이킬 수 없는 우주적 팽창이 일어난 것이다. 이 팽창은 그를 만난 이후 나라는 인간의 다른 모든 영역에서 일어난 것과 동일한 효과를 가져왔다. 기쁨과 슬픔, 놀라움과 절망, 확장과 축소, 명백함과 혼돈.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모두 감당하기 힘든 강도로 나를 휘몰아쳤다. 그것은 내 음악(또는 자아)의 엄청난 팽창과 동시에 어떤 (일시적) 소멸을 가져왔다. 나는 이 매력적이고 불가항력적인 토네이도에 휩쓸려 ‘오즈의 마법사’ 도로시처럼 낯선 세계를 여행하게 된다. 도로시의 모험은 내 것에 비하면 훨씬 짧았겠지.


오롯한 나만의 세계에서 시작된 여정은 완전히 다른 세계를 만나 일대 모험을 겪었다. 그렇다면 그 모험의 결과는? 아직 아무것도 완전히 끝나지 않았지만(아마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겠지만), 아마도 ‘I Will'과 'Nightswimming' 사이 어디쯤엔가 있을 것이다. 나는 나를 확장했지만, 내가 아닌 존재가 될 수는 없었다. 내가 아무리 그러길 원한다고 해도 나를 잊고 내가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그렇게 생각하면 자기가 누군지를 잊는 '센과 치히로의 모험'의 설정은 판타지가 아닌 현실의 은유가 된다. 약간 소름이 끼친다). 나는 'Nightswimming’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고 자주 즐길 정도로 정말 좋아하지만, 그건 내 노래는 아니었던 것 같다. 세계가 내 노래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지만, 내 노래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게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뻔하다면 뻔한 내 모험의 중간결론이다. 그래도 내가 모험 중에 주워 모은 보물들은 가짜도, 환상도 아니다. 그러니 그 보물들도 당신에게 분명 소개할 수 있을 것이다. 반짝이고 낯선, 그래서 매력적인 나의 보물들.




음악들

Beatles, I Will : https://youtu.be/p-abNGP1BK4

R.E.M., Nightswimming : https://youtu.be/ahJ6Kh8klM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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