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지금 만나고 싶어.

고모일기, 21/05/29

by 만정

다음 새러데이에 만나기로 했잖아.


토요일 오후 네시를 넘긴 시간. 동생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온다. 상대편 화면에는 동생이 아닌 루이가 있다. 늘 그렇듯 루이! 안녕! 하고 과장된 큰 목소리로 인사를 전한다. 오늘따라 햄스터처럼 볼이 빵빵해 보이는 루이는 고모, 나 지금 고모를 만나고 싶어. 라고 또박또박 용건을 말한다. 지난주 일요일 밤, 우리 집에서 놀다 집에 갈 시간이 되자 내 무릎 사이에 누워 눈물을 찔끔하길래 그럼 다음 새러데이에 오면 되잖아, 지난번에 한 것처럼 달력에 고모 이름을 적어, 그리고 보고 싶으면 언제든 전화해, 라고 말해두었던 것을 기억한 것이다. 거짓말이 아니기도 했지만 이젠 기억력이 점점 좋아지고 있어서 임시방편으로라도 거짓말 하긴 다 틀렸다. 토요일 낮잠을 자다 고모 집에 가야겠다는 루이 성화에 봉변을 당한 표정으로 투덜투덜하는 동생이 제발 바쁘다고 말하라고 하지만 나도 거짓말에는 재능이 없는 편이라.


자, 케이 캅스 골라봐.


전화로 예고한 대로 루이는 카봇 친구들을 다 데려왔다. 로드 세이버, 마이티 가드는 만난 적 있지만 케이 캅스는 초면이다. 오자마자 신발, 양말, 겉옷 바지와 티셔츠를 벗어던진 루이는 귀여운 내복 바람으로 친구들을 분리해 좁은 거실 위에 늘어놓는다. 그리곤 내 손을 잡아끌어 자, 케이 캅스 골라봐, 한다. 회사 선배들이 말하던 그 시기가 마침내 도래하고 말았다. 한동안은 카봇이 이 친구의 최애가 될 터였다. 신중하게 루이의 물음에 응한다. 한 개는 틀려버렸네.


태권도 가르쳐줄게. 따라 해 봐.


자기 집 절반 크기도 안 되는 우리 집을 처음에는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런 공간에도 적응을 한 이 사람이 우리 집에서 노는 일종의 루틴이 있다. 카봇 친구들을 일별 한 후 내 침대에서 엘레베이터 놀이를 한다. 우리 둘만 아는 놀이인데 일종의 나 잡아봐라의 변형으로 아무리 루이가 있다는 층으로 이동해도 결코 그를 만날 수 없다는 게 이 놀이의 정해진 스토리다.


이번에 추가된 부분은 태권도다. 유치원에서 태권도를 배운다더니, 얍, 얍, 하면서 팔과 다리를 뻗는다. 그리고 나한테도 해보라고 한다. 내가 웃음을 참고 시키는 대로 따른다는 사실은 그가 이 글을 읽기 전까지 비밀이다. 물론 난 늘 진지하다. 내 실력은 당연히 늘 루이보다 형편없다.


심지어 우리의 이야기 놀이, 루이와 고모는 ㅇㅇ에 갔어요, 에서도 이번 주제는 태권도 배우러 가기였다.


그런데 왜 발레가 아니라 태권도일까? 춤을 좋아하고 몸이 유연한 루이가 발레에 더 흥미를 가질 줄 알았던 내 예상이 빗나가 조금은 서운하다. 나는 루이가 태권도보다는 발레 동작을 좋아하는 남자아이로 자라길 은근히 소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그의 인생이니까. 내 소망은 마음 한켠에 미뤄둔다.


아하하하 이 그림 너무 웃긴 거 아니야?


루이는 아직 혼자 밥먹는 행위를 힘들어한다. 나보다 많은 양을 먹긴 하지만 밥 먹기가 힘들다고 시인했었다. 그래도 먹여야 하는 동생과 올케는 스트레스가 있겠지만 밥 잘 안 먹고 께작께작 먹기로 명성이 자자한 나는 루이의 심정을 이해한다. 다만 먹기 귀찮고 재미없어도 먹어야 한다는 걸 나보다는 빨리 납득했으면 좋겠다. 그의 뇌와 신체를 더 잘 자라게 할 많은 음식물이 필요하다고 가능할 때마다 조금씩 어필해본다.


혼자 밥 먹는 기술에 비해 루이의 읽기 실력은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다. 나는 이 점에 탄복하고 감사하고 즐거워한다. 처음엔 한 글자씩 읽더니 이젠 거의 단어 단위로 읽어낸다. 속도는 만날 때마다 급발진 수준으로 향상된다. 저 작은 머릿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놀라운 일이다.


은근히 같이 책 읽는 시간을 늘리려는 계략을 세우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강요해서는 안된다. 그럼 재미가 없어질 터였다. 기회를 노리던 내게 드디어 때가 왔다!


우리는 저녁으로 치킨을 먹고 있었다. 동생이 루이의 물컵으로 배정한 삐삐 컵이 이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이때다! 나는 굿즈의 본체인 책,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을 가져와 관심을 돌린다. 루이가 내게 읽어보라 지시한다. 나는 그가 최대한 호감을 가질 수 있도록 눈치를 봐가며 첫 장을 읽는다. 젠장, 하필이면 삐삐가 고아가 된 경위를 설명하는 장이다. 이런 이야기 싫어할 텐데. 루이 심경의 변화를 초조해하며 살핀다. 두어 장 읽자, 다행인지 그림이 많은 책 좀 없냐고 묻는다. 이때다! 이때만을 기다리며 엄선해놓은 그림책 몇 개를 별 거 아닌 듯 루이 앞에 들이민다. 행운의 당첨자는 ‘세상 끝에 있는 너에게’! 닭고기를 입 안에 밀어 넣으면서 루이는 내게 읽을 것을 지시한다. 제목은 루이가 읽어줘. 했더니 줄줄 읽어내린다. 복잡한 프랑스인 작가 이름까지. 아, 읽다는다는 건 정말이지 인간답고 멋진 일이다.


이건 곰이 새를 만나러 가는 이야기야. 곰이랑 새가 우리처럼 서로 만나고 싶어하거든. 하고 설명을 한다. 개암나무니 뭐니 생소한 단어가 많은 책이라 신경을 썼는데 웬걸, 제법 읽는 대로 듣는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의 그림이 웃기다며 웃어제낀다. 루이는 유머와 웃긴 것을 좋아하는 어린이로 자라고 있다. 그가 웃기다고 말하는 건 좋은 징조다. 사람 머리와 입에서 연기가 나오는 모양으로 표현된 화산지대와 전투가 벌어진 벌판에서 속이 빈 나무속에 숨어있던 곰, 부엉이, 사슴 그림이 특히 웃기단다. 아, 너는 루이를 웃기기 위해 삼 년을 잘도 견뎌내었구나. 기특하다, 동화책. 루이가 하얀 책이라고 부르는 눈의 시처럼 다음에 이 책을 또 읽으라고 지시할지 모르겠다. 그러기를 은근히 기대하며 다음번 그가 올 땐 테이블 잘 보이는 위치에 이 책을 배치하기로 마음을 정한다.


나는 육체에 종속된 육체가 전부인 인간이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취향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자주 생각한다. 육체를 제하고 논하자면 나는 그저 취향의 덩어리이다. 이 사람에게 카봇이나 태권도 말고도 인생에 재미를 줄 수많은 취향들을 선보이고 싶다. 일부는 그에게 의미가 있을 것이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 역할은 루이의 익숙한 환경인 엄마 아빠가 제공하지 않는 새로운 취향의 전시장이라고 나는 일찍이 마음을 정했다. 다음엔 카봇 노래 말고 내 씨디들 중 하나를 골라 틀어달라고 부탁해 볼 생각이다. 이젠 내가 요청하기 전에 먼저 바이바이 뽀뽀를 해주는 이 사람에게 재미있는 세계를 일별케 하고 싶다. 루이는 자라고 우리의 관계도 자란다.



참고도서

세상 끝에 있는 너에게 (2018), 고티에 다비드/마리 꼬드리, 모래알

눈의 시 (2020), 아주라 다고스티노/에스테파니아 브라보, 오후의소묘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시공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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