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고모랑 나는 이야기만(?) 하고 놀아요.

고모일기, 21/06/12

by 만정

있잖아요, 고모랑 나는 이야기만 하고 놀아요.


코로나로 행여 자식들에게 폐를 끼칠까 조심하시는 부모님을 석 달 만에 뵈었다. 아빠가 서울 우리 집에 오신 건 반년만이었다. 아들 딸보다 손주가 반가우셨을 것이다. 가족들에게 다정한 루이가 처음으로 아빠에게 안기길 쑥스러워했다. 서운하지는 않으시려나. 하는데 루이가 갑자기 우리 엄마 아빠에게 선언했다(아무리 생각해도 ‘말했다’로 충분치 않다). 나랑 자기는 이야기만 하고 논다고.


우리의 이야기 놀이는 그러니까 지난번 부모님 집에서 가족이 모였던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만난 지 이틀째 오후. 루이는 좀 심심하고 졸려 보였다. 내 오른쪽 허벅지에 앉아 자기 다리로 꽈배기처럼 내 종아리를 감싼 루이를 재밌게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자세로 일어서 거실을 돌던 나는 ‘루이는 고모와 함께 회사에 갔어요’ 이야기를 시작했다. 평소의 나답지 않게 긴장과 초조함을 거두고 아무 말이나 나오도록 두었다.


게이트를 통과하려는데 가드 아저씨가 누구냐고 물었어요.

아, 여기는 루이 씨입니다. 오늘 이렇게 제게 붙어 있어서 함께 사무실로 출근하게 됐어요.

아 그렇군요. 안녕하세요, 루이 씨.

안녕하세요, 아저씨!

사무실에 올라가자 부장님과 차장님이 있었어요.

안녕하세요! 여기는 루이랍니다. 오늘 저에게 붙어있어서 함께 일하게 되었어요. 인사 나누세요.

안녕하세요, 루이 씨.

안녕하세요!

시간이 흘러 고모는 아저씨들과 회의를 했어요. 회의실에서 고모는 왜 안된다는 거죠? 이유가 뭐죠? 하며 날카롭게 말했어요. 그때마다 고모 입에서 불나방이 나와 부장님 오른쪽 가슴에 팡! 차장님 왼쪽 눈에 팡! 붙어 화르륵 타올랐습니다.

회의실에서 나온 고모는, 부장님 아까 그건요, 하면서 길고 긴 설명을 했어요.

자, 루이 이제 퇴근하자.

부장님, 차장님, 내일 뵐게요.

안녕히 계세요!

네, 책임님, 내일 뵈어요. 루이 씨도 안녕히 가세요!

고모와 루이는 식물원 옆길을 따라 역까지 걸어갔고 지하철을 타고 고모집으로 퇴근했답니다.


하는 식의 이야기였다. 루이는 이때부터 나를 만나면 이야기를 시켰다. 아빠 직장에도 출근해보고 유치원에도 따라갔으며 식물원에도 가봤지만, 그때처럼 좋은 이야기는 다신 안 나왔다.


그러다 이야기 주인이 바뀌기 시작했다. 지난달 우리 집에 온 루이는 이번 이야기는 여행이라고 처음으로 직접 주제를 선정했다. 어딜 갈까? 하는 물음에 머뭇하기에 할머니 집, 외할머니 집, 연우네 집에 갈까? 했더니 응 그다음엔 배 타고 제주도에 가, 하고 이야기를 덧붙였다. 몇 주전 루이는 제주 여행을 다녀온 참이었다. 자기 경험을 반영한 이야기를 만들게 된 것이다! 그 후로는 루이가 직접 주제를 선정할 뿐 아니라 이야기를 만드는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이야기는 점점 풍성해진다. 이야기를 지어내는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다니. 감개가 무량하다.


감개가 무량한 건 무량한 건데, 이야기이라니. 분명 말 전에 육체가 있었나니. 그날만 해도 루이는 나를 안방 창문이며 베란다 문에 몇 번을 내다 꽂았을까? 우리가 침대 엘레베이터에서 이동한 층 수는 과연 얼마나 될 것이며 내 침대 위에서 ‘무엇이 될까요?’ 춤은 몇 번을 같이 추었단 말인가. 나는 정말이지 몸으로 놀아주는 성실한 고모란 말이다! 루이의 문장 구사력은 뛰어나지만 아직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정도로 마무리하고 싶다..흐윽).


힘들면 말해.


루이는 아기였을 때부터 먼지를 신경 쓰는 깔끔쟁이였다. 그 깔끔이 적용되는 범위는 커가면서 적당하게 조정되었고 지금은 자기 집을 넘어서지 않는 정도로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덕분에 루이 집처럼 청결하지 않은 우리 집에서 머리카락이 많다는 잔소리도 덜 듣게 되었다. 그래도 화장실은 신경 쓰는 장소인데, 루이가 응가를 하겠다며 화장실로 향한다.


분명 내 마지막 기억은 어른 좌변기에 앉을 때 빠지지 않도록 잡아줘야 했다. 잡아줘야 하냐고 루이에게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길래 그렇게 했다. 먹기에 흥미 없는 사람답게 토끼똥을 누는 루이는 스쿼트 자세를 한 내 팔을 잡고 상체를 숙여 힘을 준다. 그러더니 대뜸, 고모, 힘들면 말해. 아빠를 부를게. 란다. 여섯 살이 이렇게 배려 넘치는 나이이던가? 다른 조카들도 발화할 만한 종류의 문장일까? 다른 여섯 살은 몰라도 나는 (지금껏) 그런 인간이 아니라서 저 말에 감동하고 만다. 이런 배려는 어디서 난거지? 신기하고 신통한 사람이야. 좋은 사람이라니까. 하며 오늘도 고모는 반질반질 자갈 하나를 닦아 보석함에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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