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사과가 고모를 기다리고 있어!

고모일기, 21/08/14-15

by 만정

너무 늦게 오는 거 아니똥?


지난 주 토요일, 약속이 있는 동생 내외 대신 루이를 봐주기로 했다(말이 봐주는 거고, 같이 있으면 된다.루이는 자기집 마스터다). 두어 시간 생각하고 갔는데 여섯 시간을 보고 나니 기운이 다 했다. 즐겁고 의미 있는 시간이라고 해서 에너지를 쓰지 않는 건 아니다. 이 점에 대해 나는 아직도 불평하지만 별 수는 없다.


에너지가 0에 수렴해 정신도 오락가락 할 지경이라 루이에게 간신히 이별을 고하는데, “아직 충분히 못 놀았잖아..” 한다. 그래.. 오래 놀았다고 충분한 건 아니야, 그치만 고모 에너지가 없어서 낮잠을 자야해. 이따 미술관에도 가야 하고. 했더니, 어, 미술관에는 이따 아빠가 데려다주고,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 먹고 가면 어때? 한다. 이 제안을 거절하는 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 힘든 거절을 하고 낮잠을 자고 미술관에 다녀왔더니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다음 새러데이에 같이 자고 썬데이에는 아침을 먹고마 약속을 하고 말았다.


드디어 약속의 날. 아침 아홉시에 동생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언제 오냐는데..?

필시 8시부터 말하는 걸 주말 아침 매착 없이 늦잠자는 누나를 배려해 미루고 미룬 연락이었으리라.

약속은 지켜야겠고, 나도 살아야겠기에, 세시까지 갈게. 했더니 잠시 후 그의 대답.


너무 늦게 오는 거 아니똥?

이라는데..


이 문장은 두 가지로 나를 웃긴다. 여섯 살 루이가 너무 자연스럽게 어른 말을 구사할 때 나는 껌뻑 넘어간다. 다음은 어미. 최근 루이에겐 과연 모든 게 똥이다. 매번 만남 때 우리는 몇번이나 똥, 똥꼬, 엉덩이를 말할까? 고모 얼굴에 똥도 싸고 고모한테 똥도 먹이고 곰돌이 이름도 똥돌이 곰돌이로 짓는다. 좀 걱정도 했는데, 김나영씨 유튜브를 보니, 그댁 아들도 비슷해보여서 안심하고 있다. 한때겠거니 하고 나도 끌러놓고 상대한다(나도 똥으로 응수해준다는 뜻이다). 나는 이런 내 모습을 한심하게 느끼지 않는다. 영업기밀인데, 그것이 바로 사랑받는 고모의 비결이다.


고모는 떡국 먹지마..


저녁식사 자리에서 대화가 오가다 루이가 말했다.

40살부터 100살까지 할아버지야.

직감적으로 이때다 싶었다. 돌진이다.

그럼 고모는 곧 할머닌데?

신나서 덧붙였다.

떡국 두 번만 먹으면 할머니가 되는 거야~ 매년 새해에 떡국 먹으면 우린 한살 씩 나이를 먹거든. 고모는 지금 38살이니까 어때, 떡국 두번 더 먹으면 40이고 할머니지!


루이는 당황한 것 같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걸 보면 분명하다. 그러더니 왜 떡국을 먹으면 나이를 먹느냐고 묻고는, 사뭇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로 말하는 것이다.


그럼 고모는 떡국 먹지 마.


울리기 전에 장난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리고 다 잊은 줄 알았더니 저녁 상을 치우고 나서 갑자기 내게 또 말하는 것이다.


고모.. 떡국 먹지 마..


나는 그가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그만 고모가 루이 놀리려고 장난친거라고, 떡국 안 먹어도 한살 먹는다고 고백해버렸다. 예뻐서 장난도 못친다. 마음이 약해져서 장난도 못치는 나는 물렁물렁 토토로 뱃살 같은 고모가 되었다.


사과가 기다리고 있어!


우리의 과일 취향은 꽤 달라서 그는 포도와 딸기를, 나는 수박과 물렁한 복숭아를 좋아한다. 내가 복숭아의 장점을 설명하고 있었는데 급 사과가 드시고 싶다는 루이 씨. 사과가 너무너무 좋다며, 급기야 방에 계시는 할머니에게 돌진해 사과가 먹고 싶은데, 사과 있어요? 하는 소리가 들린다.


할머니가 깎아주신 사과를 먹고 나에게도 먹인 후 만족스러운 얼굴로 내게 말한다.


나는 사과물이 너무 맛있어.

사과즙 말이야?

응 사과 물. 사과물이 맛있어. 고모도 집에 가면 사과를 먹어.

고모는 사과 안 좋아하는데?

사과가 고모를 기다리고 있어~!


아, 사과를 좋아해야겠다. 나를 기다리는 사과를 무슨 수로 외면하겠는가.


이히히히힝

즐겁고 긴 하루를 보내고 마침내 우리는 나란히 누워 잤다. 아무래도 아기가 옆에 있으면 신경이 쓰여선가, 자주 깬다. 잠자리에서 180도 움직이는 루이 덕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신기한 것을 보고 들었다. 잠자던 루이가 소리내어 웃는 게 아닌가! 심지어 웃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 사람, 무슨 꿈을 꾼 걸까? 혹시나 해서 아침에 물어봤지만 기억 안나는 눈치다. 너 잠자다가 웃었다고 하니 씨익 웃기만 한다. 나랑 재밌게 노는 꿈을 꿨을 거라고 아전인수식 추측을 하며 잠시 즐거움을 누린다. 이히히히히. 다음에도 꿈에서 웃게 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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