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나는 이 엉덩이로 할래

고모일기, 21/09/04~05

by 만정

나는 이 엉덩이로 할래


엉덩이와 똥꼬와 똥 얘기에 열중하는 루이를 위해 새 책을 준비했다.


새 엉덩이가 필요해!


토요일 1시 50분. 루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책부터 꺼내 들었는데 이 반응은? 당최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다. 그림체부터 생각하는 방식까지 다분히 미국적인 이 책의 뉘앙스와 웃음 포인트를 루이가 다 알아챌 수 있을까? 요즘 그리스로마 신화처럼 복잡한 서사를 읽던데 시시해하지는 않을까? 궁금궁금, 두근두근.


이야기는 ‘내 엉덩이가 쪼개졌다’는 책 속 작은 사람의 (오해에서 비롯된) 존재론적 고민에서 출발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를 지나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거쳐 ‘나만 그런 게 아니다’로 귀결하고 있었다.


루이는 외계인의 티타늄 엉덩이와 70년대식 미국 스포츠카 범퍼 엉덩이, 우주로 발사되는 로켓 엉덩이가 나올 때마다 웃기다며 깔깔댔다. 자기는 범퍼 엉덩이가 좋다고 했다(나는 기사의 갑옷을 입은 엉덩이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자기 엉덩이가 쪼개졌다는 주인공의 말 못 할 고민이 실은 인간 신체 구조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됐음을 루이는 곧 이해해냈다.


다정한 사람이 예의를 차려 웃어주었겠거니 했다. 다음 날 아침을 먹으면서 다시 한번 책을 읽으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올케가 보내 온 사진에 따르면, 오늘 저녁 먹을 때에도 혼자 책을 읽으며 웃었다고 한다.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경)루이 취향 저격(축)


흐뭇함으로 이불 킥을 하며 잘 일이다.


고모, 사과가 기다리고 있다고 했던 거 기억나?


기억력이 날로 좋아지고 있다. 지난번 만났을 때 우리가 나눈 대화를 기억하고 내게 상기시키는 빈도가 부쩍 늘었다.


응, 루이가 말해준 다음부터 고모는 사과가 좋아져 버렸어. 내일 아침에 고모집에 사과가 배달될 거야.


이 말에 그의 입꼬리가 올라간 것을 확실히 보았다. 진실의 입꼬리였다. 나 역시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어서 사과는 내게 특별한 과일이 되었다. 엄마가 깎아준 사과에는 20년 동안 시큰둥 했는데. 오직 그의 한마디 말 때문이었다(엄마 미안).


이 그림은 다른 사람한테 주면 안돼.


2주 전 원주 할머니 집에 간 루이가 그림을 하나 그렸다고 들었다. 평소 그리던 주제는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달라고 하는데 주지 않고 추석에 새로 그려 가져오겠다고 했을 뿐이었다고 한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는 대체로 청하는 그림을 흔쾌히 주기 때문이다. 동기를 두고 엄마와 나는 몇 차례 추측을 주고 받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 만나보니 루이는 같은 주제로 열 장은 족히 그려내었다. 이건 연작이다. 전형적인 작가들의 연작. 루이는 이 주제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우연히 그린 새 그림에서 뭔가를 발견한 게 분명했다.


놀다 말고 루이는 내게 그림 한 장을 주었다. 주면서 버리지 말고 다른 사람이 달라고 하면 사진만 찍어서 주라고 당부했다. 전례 없는 일이다. 나는 새 그림을 구겨지지 않게 집에 가져가 지난번 그려준 백발 자전거 그림 옆에 붙여놓고 매일 보겠노라고 다짐의 말을 했다. 그래도 그는 왠지 그림이 잘 보존될지 우려하는 기색이었다. 그는 그 그림을 무척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루이에게는 작가의 기질이 다분하다. 자기 기분과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데 특히 탁월하지만 그림으로도 곧잘 해낸다. 그가 읽고 쓰는 걸 배우면 글을 쓰게 될 것이라 예상하고 기대한다. 그건 어쨌거나 (적어도) 그의 1/4을 이루는 유전 같은 것, 내력 같은 것이다. 전업 예술가일 필요는 없지만 작품 활동을 한다는 것, 자기를 어떤 형태로든 외화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 멋짐의 가능성이 루이에게서 적절히 만개하기를 나는 바라마지 않는다.


감동이 뭐야?


루이는 요즘 “만화 속 그림은 어떻게 움직이는거야?” 라든가, “그림은 상하는 게 아니지~ 상하는 건 음식이잖아.” 같은 난이도 높은 원리나 개념, 어휘에 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날 우리는 자기 전 동화책 두 권을 읽었다. 요즘 그리스로마 신화 시리즈를 읽고 있는 루이의 픽은 프쉬케와 트로이 전쟁.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가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찾으러 가는 대목이었던 것 같다. 아킬레우스가 “감동”을 받아 청을 들어주고 장례기간 동안 전쟁을 멈춘 이야기를 지나 던 참인데.


감동이 뭐야?


음? 감동? 오호라.


마음을 움직이는거야.


한자든 영어든 풀어보면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말하긴 했는데, 이해한걸까? 잠자코 있는 그의 대답은 아, 그렇구나, 일까? 그게 뭐지? 일까?


너는 내게 무척 감동을 주는데, 이렇게 말해서는 단어 뜻이 설명이 되지 않겠구나.

언젠가는 말해주어야지. 의미를 이해한 루이의 입꼬리가 올라가면 좋겠다. 진실의 입꼬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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