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성 니터의 기쁨과 슬픔

by 만정

작년 겨울부터 뜨개질을 한다. 작년 겨울에는 뜨개질을 했다. 일 수도 있었는데, 현재형 문장으로 쓰면서 스스로도 놀란다. 지난 3월에 주문한 실은 영원히 봉인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찬바람이 부는 9월이 오자 마치 어제 배달된 실인 듯 ‘자연스럽게’ 꺼내 조끼 하나를 완성하고야 만 것이다.


알파카 옷을 입고 싶었다. 사기엔 너무 비싸서 떠보기로 했다. 목도리 하나 완성한 적 없었지만 나는 이제 서른 일곱 살이고 결과가 변하는 일도 있을 것이었다. 새하얀 털복숭이 스웨터 하나를 완성할 동안 나는 뜨개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털을 빗어 부숭부숭한 알파카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샤워 외에 촉각적으로 가장 만족감을 주는 행위였다.


알파카는 추운 계절을 사는 낙타처럼 생겼다. 이 기이하고 귀여운 생명체는 따뜻하고 건조하며 가벼운 털을 두르고 있다. 알파카는 울 같은 탄성이 없고 모헤어의 귀족스런 털 대신 꼬불꼬불 살짝 엉키는 곱슬 털을 달고 있다. 부드럽지만 실크처럼 뽐내지는 않는다. 알파카로 뜬 편물은 실크처럼 섬세하지 않고 울처럼 모양이 잡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추운 겨울 아침 막 꺼내 입어도 차가운 느낌이 없고 따뜻하면서도 바람이 통하며 파삭파삭 건조한 알파카의 털을 나는 가장 사랑한다. 판매자들이 자주 자랑하듯이 라놀린이 없는 알파카 털은 울처럼 가려움을 일이키지도 않는(것으로 되어 있)다. 믿을 수 없이 보드라운 촉감과 기모감으로 날 열광케 했던 모헤어는 내 코와 눈에 알러지를 일으켰다. 뜨다 보면 눈이 가려워지는 것이다. 알파카 역시 온 사방에 털을 날리지만 눈에 알러지를 일으킨 적은 없으니 내게는 제법 잘 맞는 섬유다.


이 좋은 털을 혼자 입을 수는 없으므로 동생과 조카 스웨터를 떴다. 둘만 입힐 수는 더더군다나 없으므로 올케를 위한 예쁜 하늘색 반팔 티도 하나 만들었다.


도안은 다음 단계를 궁금하게 만드는 퀘스트처럼 나를 다음으로 다음으로 이끌었다. 그동안 목둘레가, 어깨와 몸통이, 양팔이 만들어졌다. 처음에 나를 이끌었던 한 땀 한 땀의 즐거움은 어느 새 완성을 향한 추진력으로 화한다. 완성을 향해 돌진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뜨개질하는 자아를 20년 전 체계적으로 제거해냈다. 이런 “여성스러움”을 나는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았다. 여성보다는 사람으로 살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바늘이야기 김대리님에 따르면 뜨개질은 클라이밍처럼 성취감을 준다. 신선한 이론이었다. 이것으로 내 뜨개의 정당성은 강화되었다. 옷을 입기 위해 뜬다는 것만으로 부족했을지 모를 정당성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옷 하나가 완성됐을 때 희열은 작업을 끝내는 원동력이 되기에 충분했다.


뜨개질이 아무리 즐거워도 입지 않을 옷을 뜨지는 않는다(그러기에는 실이 비싸다). 입을 수 있는 옷을 뜨고 그 옷을 입는다. 이것은 전유專有의 감각을 되살린다. 컴퓨터 속 세계에서 만질 수 없는 상품을 만들게 된 이후 나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에 대한 열망에 시달린다. IT업계에 드문 일은 아닐 것이다.


‘내’가 만든 상품이 물리적으로 무형이며 내게 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왔다. 회사에서 한 일은 내 것이 되지 않았다. 월급이라는 보상이 내게는 온전하지 않았다. 공부를 하면 그 결과는 온전히 내 것인데, 내가 쓰는 글은 나로 충만한데 회사 일은 통장의 숫자로만 남았다. 배부른 소리 한다는 자책과 질타로도 막을 수 없는 상실감과 괴로움이 지금도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이것이 책에서 이론으로 배운 ‘소외’의 감정이라고 확신했다.


인류가 본격적으로 노동을 돈과 교환하게 된 산업혁명 즈음 생겨난 ‘소외’라는 개념이 말해주는 대로(물론 그 개념을 고릿적부터 적용하긴 하지만), 임노동자로서 인류는 자신의 노동과 그 결과인 생산물로부터 유리되었다. 학교에서 재밌게 배운 이론은 노동자가 된 후 나의 현실이 되었다. 이보다 더 소외의 개념을 체감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작아졌고 노동은 공허했다. 내가 나일 수 있는 시간은 그래서 집에 돌아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뜨개를 하는 시간 뿐이었다. 재생산을 위한 시간을 빼면 하루에 두 시간 남짓한 이것만이 온전히 내 것이었다. 노동은, 밥벌이로서의 회사 생활은 내게 개념적으로 괴로운 문제였고 여전히 그렇다.


그런 내가 뜨개로서 전유의 기쁨을 누린다. 나는 내 생산물을 온전히 소유한다. 결과 뿐 아니라 노동 자체도 내게 귀속된다. 뜨개질하는 동안 나는 소외되는 괴로움을 잊는다. 대신 순간에, 그 순간의 나에게 몰입하게 한다. 이런 맥락에서 니팅은 어딘지 마약성 진통제 같은 데가 있다. 마음의 통증이 사라지지만 대단히 의존하게 한다.


니팅이 주는 기쁨에는 물론 댓가가 따른다. 정서적이고 정신적인 만족감을 준다고 해서 육체적으로 노동이 아닌 것은 아니다. 니팅은 육체 노동이다. 그것도 몸의 일부만 반복 사용해 고장내기 딱 좋은 강도높은 육체적 노동. 뜨개는 내 목의 통증을 단기간 최대치로 상승시킨다. 정말이지 최악의 자세다. 뇌가 느끼는 만족감은 이로써 상쇄된다. 혹은 이 때문에 뇌의 요구를 모두 맞춰주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진다.


탐욕스러운 니팅이 야기하는 더 큰 문제는 시간에 있다. 뜨개 시즌의 내 개인 시간은 거의 뜨개에 온전히 바쳐진다. 분홍신처럼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봄에는 그렇게 글에 쓰고 싶더니(정확히 그 시기에 뜨개용품 박스는 거실에서 사라졌다) 가을이 되자 글쓰는 시간은 자연히 줄었다. 억지로 쓸 수야 없지만, 아니면 존 맥피 옹의 말마따나 윤작의 효과를 볼 지 알 수 없을 일이지만 멈출 수 없는 상태는 어느 모로 보나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분홍신 이야기의 결말만 봐도 그렇다.


몸을 상하지 않게 하는 선에서 너무 몰두하지 않으며 즐기는 방법을 이번 겨울에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유니콘 파티Unicorn Party라는 이름으로 염색된 알파카 실을 만지며 쁘디니트PetiteKnit의 오슬로 스웨터Oslo Sweater를 뜨다 보면 이 모든 것를 잊게 되지만 오늘도 노력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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