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한 혹은 용감한

by 만정
왜 그런 애들 있잖아, 꼭 졸업식 전날 사고쳐서 체포되는 애들.


영화 ‘북스마트’에는 명문대 진학이 확정된 모범생 단짝이 등장한다. 졸업식 전날, 열등한 똥멍청이 루저로만 생각했던 동급생들이 자신들 못지 않게 밝은 미래를 향해 달려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몰리는 충격에 휩싸인다. 남들은 놀면서 공부했는데, 난 공부만 했어. 반면 단짝 에이미는 자신의 삶과 성취에 별 불만이 없다. 우린 놀기도 잘 했어, 몰리. 그걸론 충분하지 않아, 에이미. 남들에게도 알려야 해. 우리가 노는 것도 잘한다는 걸! 아니 왜, 굳이? 라고 생각하는 에이미를 졸업파티 투어에 강제 동행시키는 (어쨌든 좀 나쁜 년인) 몰리! 두 처자는 자신들의 고등학생 시절을 완전히 뒤바꾸는 하룻밤을 보낸다. 그리고 몰리는 친구들에게 겉보기와는 다른 사연과 생각과 삶이 있음을 깨닫는다.


에이미의 경우는? 몰리와 달리 누구에게나 사연이 있을 수 있음을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는 이 조심스러운 처자는(소수자이기 때문일까?) 반대로 자기 삶의 방식에도 딱히 억울함이 없다. 남을 업신여기지도, 부러워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나 졸업식 전날 사고쳐서 체포되는 바보 역은 그녀의 것. 물론 이 역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결과이기는 하다. 용감한 여왕님에게 남은 영광의 상처 같은 거랄까.


오늘 아침 출근 준비 마지막 의례로 왼손 검지에 반지를 끼우는데, 한치 앞을 못 내다보는(영화적으로는 복선인) 몰리의 저 대사가 머릿 속에서 끝없이 메아리 쳤다. 그래. 뭐 회사생활, 언젠가 한번은 끝나는 거지. 그게 오늘일수도 있지. 멍청하고 용감하게 소리지르고 회의실을 박차고 나올 수도 있겠지.


밤이 되었고 회의실을 박차고 나오는 일도, 퇴사 버튼을 누르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물론 체포되는 일도). 대신 (이제 와서) 왜 안했냐, 했어야 하지 않느냐는 철 지난 책임추궁에 녹초가 된 몸을 침대에 누이고 긴 하루를 돌아본다.


내일의 나일 수 있을까? 용감하게 체포되는 건. 아니, 멍청하게 퇴사 버튼을 누르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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