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고모님 고모야 그리고 전복

고모일기, 22/09/08-10

by 만정
고모님,

잠이 부족했지만 눈을 뜨지 않을 수 없었다. 파안대소하며 기상. 고모를 깨우려면 고모님, 하고 말하라고 했잖아. 하고 내 머리맡에 쭈그려 앉은 루이가 덧붙인다. 한달 전 내가 한 말이다. 용케 기억했다 암호를 댄 것이다. 이럴 땐 고모님 하고 부른다.


그러다 불현듯 야! 하고 외치면 나는, 이노옴, 고모한테 야가 뭐야, 고모니임, 해이지라고 백종원처럼 말하곤 한다. 주의를 줄 인인지 농담으로 받을 일인지 고민하는 지점 중 하나다. 그러던 어느날 뭔가 떠올랐다. 야, 하는 걸 끊지 않고 뒀더니, 그 뒤엔 꼬마야! 가 나온다. 아무렴. 그럼 그렇지. 야에 호응하는 건 역시 고모가 아니었다. 야, 뒤에 꼬마가 온다면 말이 된다. 나는 루이에게 고모이자 친구이자 여동생이기 때문이다. 모두 내가 우리의 놀이 안에서 허용한 역할이다. 고모, 우린 친구잖아, 그렇지? 하는 게 나도 썩 싫지 않다(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이번 추석, 어느 끼니인가 같이 밥을 먹다 말고 귀여워, 하고 말한다. 내가 그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그가 내게 하는 말이다. 엄마가 그런 우리를 보고 쟤네 못봐주겠네! 하며 눈꼴 시려하는 것도 큰 재미다.


고모냄새

내 옆에서 먼저 잠이 깬 루이는 데구르르 내 품으로 들어왔다. 고모냄새. 하는 그의 말을 내가 잊을 수 있을까? 아니,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들어본 어떤 말보다 달콤한 맛이었다.


할아버지, 더 안 먹어도 돼?

루이는 밥 먹는 재미를 그다지 모르는 어린이다. 후각이나 미각은 훌륭한데, 밥먹는 걸 여간 힘들어하지 않는다. 차례를 지낸 후, 한참 음복을 하다 이제 아침 먹어야지, 했더니, 지금껏 먹었는데 또 먹어야 하냐며 볼멘 소리를 하는 사람이다. 조심성이 많아서 냄새나 식감을 탐색하는 편이기도 하다. 생선을 먹는데 가시라도 섞였다 하면 생선은 다 먹은 셈이다. 집에서 불리는 내 별명 중 하나가 밥먹기 싫어하는 어린이인 만큼, 나는 그 마음을 두루 이해한다.


회사 추석 명절 선물을 고심하다 전복을 집에 보냈다. 충청북도 출신 양친을 둔 덕분에 어릴 때 집에서는 고등어, 임연수어, 양미리 그리고 새우젓 정도를 익숙하게 먹었다. 엄마가 생물 전복을 손질한 건 그의 64년 생에 이번이 처음일 정도다. 전복 이빨 뽑아낸 얘기를 듣는데,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는 헤밍웨이의 노인이 떠올랐다고나 할까.


전복 내장은 죽을 끓이고 전복은 기름을 둘러 구웠다. 루이는 미역국 냄새가 난다며 주방에서부터 관심을 가졌다. 엄마가 막 구운 전복을 입에 넣어주자 얌얌 잘도 먹었다. 이때부터 전복을 기다리더니 자기 몫의 전복을 먹으면서 전복을 하나 먹으니까 다음 전복이 또 먹고 싶다나. 웃어넘겼는데, 내 전복을 주자 그것도 얌얌, 할머니 전복을 주자 그것도 쩝쩝, 그걸 본 할아버지가 본인 전복을 주자, 할아버지, 전복 더 안 먹어도 돼? 하고 묻더니, 어, 할아버지는 더 안 먹어도 돼~ 하는 답변을 듣자 할아버지 전복까지 맛있게 먹는다. 루이는 전복을 좋아하는(사실 자양강장에 대단히 관심이 많은 어린이이긴 하지만서도) 어린이였다. 친히 포크로 잡수실만큼. 전복죽도 먹었다. 그 다음끼도, 그 다음끼니도. 허참. 다음 생일에는 전복을 선물로 보내야 할까보다.


할아버지, 나 돈 안 줘도 돼

손자사랑에 할아버지가 지갑을 열었는데, 루이는 안 받아도 된다며 거절하고는 소파 위에 올라가 벽에 얼굴을 묻고 우리를 등지고 앉았다. 우리를 돌아보는 얼굴은 울기 직전이다.


무슨 일이야? 우리 머리엔 물음표가 떠올랐다. 알고보니, 할아버지 지갑에 현금이 없는 걸 보고는 그 돈, 받을 수가 없어진 것이다. 할아버지가 돈이 없다는 생각에 슬퍼진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할아버지 돈을 번다고, 지갑에만 없는 거라며 안심시켰지만 결국 할아버지가 현금을 가져와 보여준 뒤에야 루이는 돈을 받는다. 다음날도 할아버지 지갑을 열고 카드를 확인했다. 그래, 어린이의 마음엔 걱정이 많지. 루이의 마음엔 동정심이 남다르기도 하고. 어떤 땐 집안의 어떤 사람보다도 어른 같다.


지난 7년 간, 루이가 좋은 사람임을 매번 확인하면서 동시에 인생은 길고 사람을 변화시킬 많은 일들이 곳곳에 매복해 있음을 떠올린다. 나도 그 정도는 알만한 나이다. 그리고 앞으로 겪을 수많은 좋고 나쁜 일들에도 불구하고 루이가 끝내 좋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내가 곁에 있어주고 도와주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일을 겪겠지만, 그 일들을 잘 겪어낼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준다면 나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경험을 반복하면 좋으면서도 강인한 사람이 되리라. 끝내 악하지 않고 미치지 않고 품위를 잃지 않고 한 평생을 완주하는 것은 내 목표이기도 하다. 작은 좋은 사람을 보면서 내 다짐도 새로이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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