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1월 12~14일
늦은 밤 도착했다. 제주공항에서 리무진에 오른 건 오후 8시 15분. 어느 여행지나 밤 도착은 긴장된다. 그게 일년 간 여덟 번, 이십여 일을 머문 제법 익숙한 곳이라 하더라도. 예상대로 검은 어둠 속을 달렸다.서울 같은 몇몇 대도시를 제외한 한국의 지방 풍경이 대개 그렇듯이. 게다가 지금은 겨울의 한 가운데. 다만 밤인 덕분일까? 평소보다는 일찍, 1시간 40여분 만에 도착했다. 오후 다섯시, 좀 이른 퇴근으로 시작된 여정은 밤 열시 체크인으로 끝났다.
제주도 지도를 놓고 세로로 반을 가르는 선을 그었을 때 제일 하단에 위치한 지점. 대략 그 즈음이 나의 목적지이다. 중문에서 서귀포항을 지나 이 오래된 호텔에 당도하기까지 한 시간의 비행, 1시간 50분의 버스 여행을 견뎌야(늘 즐거운 것은 아니다, 특히 비행은) 하지만 후회한 적은 없다. 깨끗한 공기와 고요함만 생각해도 서울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던 적이 없다. 학교를 다니면서 시작한 서울 생활이 22년째에 접어들고 그 사이 안정된 직장과 주거지를 마련했지만 어쩐지 나는 아직도 서울의 하숙인 같다. 생활에서 잠시나마 자유로워질 때면 서울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아직도 나를 떠나지 않는다. 서울은 내게 여전히 너무 시끄럽고 번잡하며 더럽다.
그런 이곳에 도착한 날 밤에는 낯선 냄새에 신경이 쓰였다. 이런 탄 내를 이곳에서 감지한 적이 있던가? 어둠 때문에 냄새를 식별하는 데 더 어려움이 있을 리도 없는데, 하는 생각을 오래 이어가지는 못했다. 짧은 욕조 목욕을 마치고는 잠들었다.
아침은 눈이 부셨다. 끝내주는 날씨다. 겨울인데 바다와 하늘에서 색채감이 느껴진다. 이 정도로 좋은 날씨를 작년에는 내게 보여준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아름다움 때문에 베란다 창에 붙어 혼자서 감탄사를 몇 번이나 내뱉는다. 혼자 온 게 아쉬운 건 이런 때다. 사진을 찍어 가족들에게 차례로 전송한다.
바다 쪽을 면한 객실에서는 이 호텔만의 비밀에 접근할 수 있다. 경사면을 따라 조성된 긴 잔디밭 끝에 아름다운 조경의 정원이 나타나는데 이 정원 끝은 낮은 동백나무 울타리 너머로 곧장 바다다. 그러니까 여기는 한국 대륙의 한 끝. 외국어와 외국 문화의 낯섦을 감수할 필요 없는 여행지 중 내가 택할 수 있는 가장 먼 곳이다. 게다가 바라보이는 곳은 대해. 이 사실만으로도 이 장소는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나는 아마도 먼 곳, 서울과 생활로부터 유리될 수 있는 지리적 공간을 필요로 했던 것 같다.
베란다 창을 열고 한 걸음 내딛는다. 연기 냄새는 사라졌다. 익숙한 깨끗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이번 객실은 부메랑 모양처럼 생긴 이 호텔에서 서귀포항을 바라보는 쪽에 위치한다. 자주 묵은 방향이 아닌데 지금껏 경험한 객실 중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 늘 요청하는 것은 조용한 객실 뿐인데 이 방을 배정받은 게 당첨처럼 기쁘다.
아침을 먹으러 지하 뷔페식당으로 간다. 지난 겨울이 되면서 처음 보는 젊은 직원들이 많아졌다. 익숙한 직원 분의 안내를 받아 창가 쪽 자리에 앉는다. 주변 자리에 안내받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창가로 다가가 사진을 찍는다. 그 마음 나도 알죠. 그만큼 수려한 풍경이다. 오늘 운이 좋으시네요. 날씨가 특별히 좋거든요. 좋은 사진들 찍으시길. 날씨와는 달리 내가 아침을 잘 먹을 수 있는 날은 아닌가보다. 좋아하는 어떤 메뉴도, 심지어는 나를 중독자로 만드는 유일한 기호식품 에스프레소도 이 아침에는 호소력이 없다. 오랜 시간 아름다운 바깥을 내다보며 아침식사와 사투를 벌이다 별 소득 없이 일어난다.
그래도 아침 산책을 거를 수는 없다. 잔디밭을 가로질러 내려간다. 햇살을 맞는 게 즐겁다. 성큼성큼 걸어내려가 정원 구역으로 들어간다. 정자를 두고 굽어진 길을 따라 이어진 따뜻한 남쪽나라의 식물들이 이국적이다. 지금은 시들한 동백나무들, 무성한 실유카, 시금치같이 생긴 낮은 노란 꽃. 그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건 용설란이다. 지난 늦여름 쯤인가, 앙상하게 가지 쳐졌던 녀석은 어느새 다 잊고 무성한 이파리를 뽐내는 어엿한 선인장이 되어 있다. 이 구역을 지나면 바다를 따라 키 큰 야자수가 양쪽으로 줄지어 늘어선 직선구간이 나타난다. 이 구간에 들어서기 전에 잠깐 바다 쪽 낮은 동백 울타리까지 나가본다. 먼 바다를 내다보고 가까이 검은여라 불리는 지역 쪽으로 시선을 당긴다. 오늘도 낚시가 한창이다. 야자수 구간 백여 미터를 지나 이번엔 오르막을 걸어 객실로 돌아온다. 이런 산책에 걸리는 시간은 십오분 정도다.
숨가쁜 한달이었다. 오픈도 했으니 긴장도를 낮추려 노력하지만 원하는대로 단번에 느긋해지는 적은 없다. 원래 페이스로 돌아오는 데에도 시간이 걸린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데도, 사실은 다소 무리해서 지금 굳이 여기 온 것도 그 때문이다. 몸과 마음을 놓고 비우고 정리하기 위한 장치가 절실했다.
실은 일도 짊어지고 왔다. 여기서 나는 많은 작업을 끝냈기 때문에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머리카락 잘린 삼손처럼 영 힘을 쓰지 못한다. 마음이 어수선하게 부유한다. 그리곤 전천당이니, 짱구니, 도라에몽이니 하는 만화가 흘러나오도록 티비를 틀어놓곤 침대에서 잠들어버렸다. 작업 문서를 열어도 봤지만 진척은 없다. 그런 날도 있는 거겠지.
호텔 경내를 벗어나는 일 없이, 근처 카페를 방문하거나 서귀포항 쪽으로 산책 가는 일도 없이 숨만 고르기에도 부족한 이박삼일이었다. 대신 떠나는 날 아침은 오랫동안 천천히 많이 먹었다. 그런 나의 상태 변화가 약간의 안도감을 준다. 일상의 리듬을 되찾으려면 시간은 더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