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사자왕 형제의 모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어젯밤 다 읽었다. 아마 다 읽기 좋은 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오늘 아침, 예상했던 헌재 판결을 확인했기 때문이다(결과는 예상했지만 인용이 한 명뿐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 못해서 몹시 편치 못한 하루를 견뎌야 했다). 그러나 예상 못했던 건 내 현실보다는 이 책 결말이었던 것 같다. 결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직도 적잖이 당황스럽고 혼란하다.
이야기는 이렇다. 몸이 아픈 동생과 그런 동생을 아끼고 사랑하던 형이 살았는데 예기치 못한 사고로 형이 죽는다. 형을 상실하고 낙담한 동생 역시 곧 죽는다. 형제는 사후세계라고 할만한, 동화가 설정한 세계에서 재회한다. 더는 아픈 몸이 아닌 동생과 형은 이 완벽해 보이는 세계에서 잠시 행복을 누린다. 하지만 아름답고 행복한 세계는 무자비하고 잔인한 악당에 의해 위협받고 형제는 악당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모험에 나선다.
동화는 열 살 남짓한 남자 어린이인 동생 시점에서 서술된다. 이 일인칭 화자는 모험의 당사자, 즉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더 없는 영웅인 형의 관찰자이기도 하다. 화자에게 형은 무엇이든 잘 해내는 데다 세상 누구보다 용감하고 착한 사람처럼 보인다. 반면 화자 자신은 직면한 상황이 언제나 두렵다. 그 두려움은 서사 안에서 늘 솔직하게 발화되거나 진술된다. 이 두려움이 얼마나 솔직하고 설득력 있는지 독자인 나 역시 책을 읽는 300 페이지 내내 두렵고 무섭고 조마조마하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적을 피해 동네 할아버지 집에 숨어 지내야 하고, 형의 정체가 악당들에게 탄로 날까 걱정스럽다. 불을 내뿜는 괴물이 내는 끔찍한 소리를 들으며 야영을 해야 하고, 종국에는 그 괴물에게 쫓겨 지칠 때까지 말을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 친구는 자기가 겁이 많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겪는 두려움을 회피하거나 부정하는 일 없이 표현하는 것 역시 용기라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해서일 것이다. 두려움을 인정하고 표현하는 데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 자신의 부족과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어른의 몸을 가진 인간에게 조차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래, 아직 모를 수도 있을 나이다. 그는 그런 방식으로 용감한 어린이이다. 게다가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항상 해야 할 일을 했다. 자유와 행복을 위해 악당들과 전쟁을 치르는 마을 사람들을 도왔고 그 행복을 더 완전하고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괴물을 없애러 가는 위험한 여정에 형과 함께 한다. 그 과정에서 괴물의 불길에 닿아 죽어가는 형의 말에 따라, 다음 죽음이 이끌 행복의 세계에 이르기 위해 절벽에 몸을 던진다. 심지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형을 업고서. 오직 자기만이 실행할 수 있는 죽음을 실현해 내는 것이다.
이 죽음이 내게 너무 고통스러웠다. 형제는 마을 사람들을 구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아름다운 땅에서 행복하게 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불쌍한 형제는 두 번의 삶에서 너무 힘든 상황을 살았다. 너무 많은 고통과 너무 짧은 행복. 이 불공평함이 인간 삶에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도 이제는 안다. 인간 세계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없다는 유시민 아저씨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한다. 그런 와중에도 이만큼 문명을 유지하는 인간 존재가 참 어여쁘다는 말의 의미도. 이 하찮고 불완전하고 결함 많은 존재가 여기까지 왔다는 게 기특하기도 하다는 생각, 나도 곧잘 한다. 동화 속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자유와 행복을 누릴 것이다, 적어도 당분간은.
그러나 이 형제에 대한 슬픈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아직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났지만 화자가 안도감보다 괴로움을 더 크게 느끼는 것처럼 내게는 읽힌다. 전쟁에서 죽은 할아버지와 친구들 때문이다. 그들을 떠올리며 고통스러울 정도로 슬퍼하는 모습은 여러 차례 묘사된다. 이 점에 있어서 이 어린이와 나는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희생'이라고 부르는, 그러나 사실은 죽음, 그러니까 존재의 불가역적 파괴, 그러므로 한 세계의 종말을 나는 아직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들은 세계에서 사라졌는데, 그들의 세계는 끝났는데 그들에게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쓰는 사이 작가의 답을 알아버린 것 같아 되려 속상하다. 형제는 이 정의로운 죽음 이후에 비로소 완벽한 달콤함, 더는 괴로움과 슬픔이 없는 세계에서 마침내 행복한 삶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 세계의 삶에서, 그리고 그 이전 삶에서 그랬듯 그 행복의 약속이 불완전할 것이라는 슬픈 예감을 독자는 떨치기 어려운데, 그게 작가의 답인 것 같아 나는 조금 더 슬퍼지고 만다.
과거가 현재를 구한다,는 한강 작가의 주장은 그러므로 이 질문에 대한 좀 더 근사한 답이 된다. 의미에 기대 죽음도 결심할 수 있는 어여쁜 존재가 또한 인간이라는 논리적 귀결을 나는 다시 한번 피할 수 없게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약간 눈물을 흘린다. 그런 희생이 다시 요구되는 시대가 도래할까 봐 두려워서, 나는 그럴 용기가 없다는 사실이 속상해서.
사자왕 형제가 그 세계에서만큼은 늘 웃고 있기만을 신도 믿지 않는 내가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