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예술, 우리의 관계

패트릭 브링리,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2023)

by 만정

도톰하고 묵직한 책이다. 물리적 두께와 무게보다는 구조와 의미에 있어 그렇다. 사랑하는 형을 잃은 슬픔과 깊은 상실감 속에 고요함을 찾아 숨어들 듯 간 메트에서 보낸 십 년. 상실감이라는 베이스 위에 미술품의 아름다움에 대한 노래가 소프라노처럼 쌓인다. 그 사이에 미술관 경비원으로서의 삶이 차분하게 들어온다. 생계로서의 삶 그리고 예술을 마주하는 다른 인간에 대해 말하는 이 성부는 알토처럼 조용히 그러나 풍성하게 화성을 채운다. 책 중반부를 지나면서 두드러진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버지로서의 새로운 삶이다. 아름다운 테너의 목소리는 그러나 제법 크고 난폭하게 노래의 멜로디를 빼앗는다. 고요함과 관조, 예술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목소리들은 직접적인 삶의 요구 앞에서 작아진다.

이렇듯 다채로운 각 성부들은 시간의 흐름 위에서 상대적인 중요성을 달리하며 이야기를 계속한다. 변화한다. 십 년은 인생의 변화를 관찰하기에 충분한 시간. 이 책은 세월이라고 할 만한 긴 시간이 글을 얼마나 풍성하게 만드는지 매우 잘 보여준다. 글을 구성하는 주제로서 내가 예시한 네 개 성부는 시간이 흐르면서 의미의 층을 누적한다. 같은 주제에 대한 다층적인 면면의 제시. 대체로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다. 내가 글에서 발견하기 좋아하는 이런 특성은 원리가 단순하지만 만들어내기 결코 쉽지 않다. 시간은 단축할 수 없으므로. 살아낸 자만이, 단순히 살아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반추하고 의미화하며 그 의미의 변화를 자각한 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기법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감동은 거의 전적으로 시간에 기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계 최고 미술관 중 한 곳에서 십 년이나 일한 저자의 책에는 미술품들에 감상이 가득하다. 스스로 탐욕스러운 예술 감상자임을 인정하는 나는 이 측면을 특히 주목하며 읽었다. 미술품의 생산자도, 평론가나 미술사가처럼 필드 사람도 아닌 일반인으로서 우리는 예술과 어떻게 개인적으로 교류하고 관계를 맺는가? 이것은 예술 감상자로서 내가 오래 마음에 품고 굴려온 질문이기도 하다.

어떤 대목들은 단순히 사실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큰 놀라움을 주었다. 메트의 천사 수라든가 메트에는 다빈치가 한 점도 없다는 사실 같은 것들이다. 좋은 통찰들 역시 많다. 책 후반부 미켈란젤로 소묘 전시에 대한 장이 특히 그렇다. 위대한 작품이라도 매일의 노동을 우회할 수 없으며 자신이 놓인 구체적 상황 속에서 만들어지는 인간의 일이라는 사실은 작품의 권위, 그와 우리 사이의 시간적 거리 앞에서 자주 잊힌다. 이 사실을 잊을 때 우리는 작품과 그 생산자를 신화화한다. 신화화는 비합리적인 권위를 가중하는데 동시에 그들을 물화한다. 즉 비인간의 영역으로 몰아낸다. 그 사실이 만들어내는 효과 중에는 작품과 감상자를 이격 시키는 일종의 부작용도 있다. 우리는 그저 인간이다. 불완전하고 (유시민 아저씨 말을 빌리자면) 나약하며 부서지기 쉬운, 괴팍한 정보처리자. 위대한 미켈란젤로 역시 그랬을 것이 분명한 여러 일화는 오백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전해져 온다.

작가가 예술품과 맺은 다양한 관계 가운데 지금 이 순간, 특별히 내 마음을 끄는 아래 두 지점을 언급하고 싶다. 먼저 능숙한 직업인이자 생활인이 된 어느 날 예술에 대해 심드렁해진 자신을 발견하고 그 변화를 솔직히 서술한 부분이다. 한편으로는 실망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예술을 가치 없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음을 인정하는 태도가 무척 인상적이다. 실망에 멈추지 않고 자신의 변화를 자각하는 것은 인상적일 정도로 어려운 일이라고 내가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나는 그가 부럽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또는 뼈가 저릴 정도로. 나는 언제쯤 나의 사랑하는 미술작품들에서 감동을 박탈당할 수 있을까? 책에는 미술관의 한 그림 앞에서 2주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반 고흐 에피소드가 소개되는데 내 마음은 언제나 여기에 가깝다. 그들과 내가 충분한 시간을 보낼 기회. 슬프게도 나는 상상하기 어렵다.

다른 하나는 예술적 장면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현실적으로 바빠진 작가는 생각해 본다. 그림들이 포착한 순간은 이렇게 복잡하고 때로 그래서 그 자체로는 무질서하고 무의미한 실제 삶과 다르지 않은가? 아마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복잡한 현실 자체는 예술이 되기 힘들다. 단조롭고 일상적인, 바빠서 현재에 매몰된 순간 자체도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것은 대체로 대대적인 생략이 될 것이다. 주제에 봉사하는 요소만을 캔버스 혹은 지면에 남기는 일. 이 방면 최고의 예시로 당분간 내가 떠올릴 작품은 카라바조의 ‘엠마오에서의 저녁 식사(내셔널 갤러리)’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래 구절을 나는 몇 번 더 반복해서 읽었다.

사실 제일 기억할 것 같은 구절은 따로 있다. 한 호텔에 머물며 주말에는 고가구 수리를 하는 동료가 경비원이 된 사연이다. 보험업에 종사하던 그가 회사 권유로 우연히 적성검사를 했는데 결과가 예술가를 후원하는 예술 애호가였고 미술관 경비원이 거기에 가장 가깝다는 것이었다. 비밀스럽게 나 혼자 간직하던 내 자기 인식이 책에 다른 인물로 등장하자 당혹스러움과 반가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렇다. 나는 거트루드 스타인이나 페기 구겐하임이 되었을 것이다, 돈만 많았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작가의 예술에 대한 통찰이 깊어진다고 나는 느꼈다. 오래 예술 작품을 감상해 온 사람과 오래 깊이 대화하고 싶은 열망이 오히려 조금 더 강해진다. 예술은 그것이 지루해 보이는 순간조차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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