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타인과 살아가는 어떤 방법에 관하여

홍세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2025,1995), 창비

by 만정

참을 수 없는 인간들은 도처에 널렸다. 동네 빨래방에 있는 지금만 해도 그렇다. 옆에 앉은 아주머니는 자기 휴대폰으로 유튜브 영상 소리를 다른 사람이 다 들을 수 있게 틀어놓고 보고 있다. 게다가 그 영상은 내란 맛을 보고도 내란 세력을 옹호하는, 사회적으로 무척 위험하고 그러므로 나를 걱정하게 할 뿐 아니라 열받게 하는 소리를 한다.

참을 수 없는 인간은 이뿐만이 아니다. 내 코로 들어오는 담배연기를 뿜어대는 거리의 흡연자들,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었는데도 그대로 횡단보도로 돌진하는 운전자들이 집에서 출근버스 정류장까지 도보 3분 거리에 벌써 여럿 나타난다. 그렇게 출근하면 사무실에서는 휴대폰 알림음을 켜두는 사람이 없는 날이 없다. 물론 이건 실수가 아니다. 실수였다면 들리는 순간 무음이나 진동으로 전환했을 것이다.
나는 이 문제로 오래 고민했다. 처음에는 자기 검열을 했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닌가. 그다음에는 공중도덕을 해치는 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백히 "틀렸"으며 그러므로 제지받아 마땅하고 내가 보내는 경멸의 눈빛도 자기 행위에 상응하는 결과라는 엄격한 도덕주의자의 관점으로 옮겨갔다. 진짜 어려운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 엄격함이 적용되어야 할 정도를 내가 완벽하게 판단하고 정의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타인의 행위, 그 목적과 배경, 맥락을 완전히 파악하고 그를 바탕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 나는 매우 확실한, 타고난 인지적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지극히 인간인 것이다. 물론 할 수 있기도 하다. 우리는 법정에서, 상담실에서 그런 일들을 애써 한다. 시간과 비용이 엄청나게 드는 일이다. 그나마도 오류는 언제나 상정해야 할 당연한 전제다. 그렇게 열심히 자기 행동을 재구성해도 우리는 그 진위를 쉽게 확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불쾌한 타인들과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건가요?'를 일일이 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가 내게는 없다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다시 한번 나는 스스로에게 말해야 한다, 나는 신도 아니고 정의의 사도도 아니다. 내 세금 내고 살기에 바쁜 평범한 시민, 이렇게 살다 늙어 죽을 시간에 매인 몸, 물리적으로 유한한 흔한 인간일 뿐이다.

결국 다음과 같은 질문에 봉착한 나는 당혹했다. 그러나 그렇다면 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피할 수 없이 불쾌한 타인들 속에서 그들이 유발하는 나의 이 고통을 줄이기 위해. 처음에 나는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30년 전, 90년대 중반 한국에서 똘레랑스는 얼마나 낯설고도 신선한 개념이었을까? 똘레랑스. 다른 것이 다른 것일 수 있게 두는 것이라고 지금 막 이 책을 덮은 나는 생각한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지금 들어도 여러 이유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충분한 제목을 단 이 책은 1995년 출간되었다. 한국전쟁 전에 남한에서 태어나 다른 것을 다른대로 두지 않던, (책이나 다큐에서 접한 바로도) 매우 엄혹하고 폭력적인 세계에서 대학시절과 20대를 보내야 했던 남자가 쓴 책이었다. 그 폭력의 일부는 그를 70년대 빠리의 망명자가 되도록 했다. 한국 최고 수재들이 다녔다는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나온, 그러나 아마도 학력이나 능력과 상관없이 뼛속까지 지식인으로 성향이 타고난 것 같은 이 남자는 택시운전사가 된다, 빠리에서. 생계를 위해.

1970년대까지 한국에서 자행되었던 국가폭력에 대한 생생한 경험이 책의 큰 줄기를 이룬다. 유럽의 망명자가 된다는 그 경험의 특수성은 이 책의 중요한 특징이 된다. 개별 체험으로서의 국가폭력 에피소드들을 처음 접하는 게 아닌데도 나는 여러 번 여러 대목에서 질린 고양이처럼 몸의 털을 세워야 했다. 그런 경험담에는 좀처럼 익숙해지질 않는다. 동시에, 책이 출판되던 다음 해에 학생운동을 하다 투옥되어 형을 살던 내 선배를 생각한다. 90년대 중반 서울에서였다. 그 선배를 모르는 상태로 결코 돌아갈 수 없는 나는, 여전히 사람들은 자기 생각과 의견을 말하는 데 조심해야 했던 시대로 90년대를 재구성한다. 물론 내가 속한 작은 세계에서 직접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강제였다. 자기 자신으로 살 자유가 온전하지 않던 시간과 장소들. 지금, 서울은? 나는 미치광이가 자기와 다른 생각을 말하는 인간들을 데려다 고문하고 말살할 계획을 실행에 옮긴 작년 12월 3일 이후 그가 법적으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될 때까지, 사실은 지금까지도 남몰래 두려움에 떤다. 그가 없애버리려던 생각을 발언하는 언론사와 여론조사 회사에 나는 벌써 꽤 오래 후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 이 사실을 쓰는 데에도 자기 검열이 작동하고 있음을 느낀다. 다시 엄혹한 시기가 와서 자기와 생각이 다른 이들을 물리적으로 세계에서 없애버리는 방식으로 세계를 움직이려 할 때 이 한 줄이 근거가 될지 모른다는 상상 때문이다. 상상이라고 쓰지만 과거에 이런 사례들은 충분히 있어왔고 여러 시대 여러 장소에서 벌어진 이 같은 사례를 너무 많이 아는 나는 이것을 예측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생각한다. 가능성이 매우 낮기를 바라는, 잘못 형성된 기대이기를 바라는 예측.

물론 이런 방식으로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숨기게 하는 사회는 옳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옳지 않음에 대한 나의 저항은 자기 검열을 애써 무시하는 방식으로 여기 드러난다. 별것 아니지만 별것일 수도 있는 일들을 나는 나에 앞선 세대가 더 많이 강력하게 겪어왔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신경 쓴다. 틀린 세계, 자유를 속박하는 세계를 조금이라도 자유롭게 하기 위해 그들이 했던 일들을 잊지 않도록. 그들이 가졌던 한계, 당시의 폐쇄적인 사회에서 나고 자라 겨우 10대 후반, 20대였던 어린 인간으로서 가지기에 충분한 한계에 대해, 더 많은 자유를 당연하게 누리고 자라 40대가 된 운 좋은 내 입장에서 너무 엄격하고 가혹해지지 않도록.


어제 유시민 아저씨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중 가장 좋아한다고 말한 문장이 여기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사람은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선택한 대로 함으로써 행복해진다. 막 40줄에 들어선 내게 지금 현재로서는 가장 설득력 있는 인간관이다. 실패를 해도 내가 선택한 것을 하는 편이 낫다고, 물론 앞에 많은 단서가 필요하지만, 지금의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밀은 나아가, 다르게 생각하는 한 사람의 입을 여러 사람이 닫게 만드는 것은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의 입을 닫게 만드는 것만큼 위험하다는 데까지 이른다. 그 '다름'은 이상함, 어쩌면 틀림, 그리고 가능하면 위험을 담지한 생각과 말까지도, 그것이 단지 생각과 말을 넘어서지 않는 선에서라면, 포괄할 것이다. 누가 좀 틀리고 위험한 생각을 해도, 때론 그런 말을 해도 그가 그럴 수 있도록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제한은 그 기준을 정하고 집행하는 데 있어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요구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률적으로 피할 수 없을 오류 때문에 필연적으로 또 다른 비용의 감수를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자유론을 읽지 않은 나는 넘겨짚는다.

밀이 주장한 정도의 자유에 대해 나는, 자기 한계를 진지하게 자각한 인간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상해보이는 사람도 그냥 그대로 존재할 수 있게 두는 것. 그렇다, 홍세화의 말처럼 용인이다. 똘레랑스는 큰 마음으로 그럴 수도 있지, 일 수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내 생각에는 내 맘 같지 않은 일과 것과 사람에 대해 견뎌내는 일이다. 견디는 근거는 인간으로서의 자기 한계에 대한 인식과 인정이다. 그 때문에 홍세화는 책의 마지막 부분, 똘레랑스에 대해 특별히 붙인 보론에서 이것을 '한계자유'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또 혼자 넘겨짚는다. 그러니까, 자기가 알 수 없는 타인의 사정에 대한 오차 범위 같은 것에서 인용은 이성적으로 실행될 수밖에 없는 여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용인은 보기 싫은 꼴을 끝내 참아내야 하는 비용을 개인적, 사회적으로 일정 정도 요구하지만, 그것이 틀린 것을 모두에게 동일하게 강제할 때의 오류에 비하면 견딜만한 것이 될 거라고 나는 계산한다. 용인의 기회비용은 다른 사람들이 다 옳게 행동하는 상황보다는 자유의 속박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용인을 아마도 프랑스 사회는 손해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계산법에는 용인이 없었던 어떤 역사적 상황에 대한 경험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므로 용인은 사실 사회의 다른 구성원, 즉 타인 일반에 대한 암묵적 신뢰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고, 책에서 말하지 않은 전제를 구성하게 된다. 누구 하나쯤 틀린, 어긋난, 다소 위험한 생각을 말한다고 해서, 다른 구성원들이 그 말을 귀담아듣고 동조하지는 않을 거라는 신뢰. 프랑스인들이 그 파란만장한 근대 역사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짐작할 뿐이지만, 그들은 대체로 자기 사회의 구성원들을 신뢰하는 것이 분명하다. 한국에는 좀처럼 없는 개념, 연대(박애는 역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번역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렇게 똘레랑스, 자유와 함께 삼인사각 게임을 하는 것이다. 나는 이들만큼 자유와 (은밀한) 연대의 개념을 끝까지 밀고 나간 인류 집단이 있었을까 가끔 생각한다. 아마도 찾아내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까 참을 수 없는 타인에 대한 나의 현재 시도는 용인 단계에 있다. 그들이 그들 방식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두고 보아주는 것. 물론 나는 그들에게 볼륨을 줄여줄 것을 평이하게 요구할 수 있다(나는 이것을 매우 잘한다). 그보다 더 자주는 그들을 흘겨보고 혼잣말론라도 작게 흉을 본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정한 내가 할 수 있는 행위의 한계선이다. 나는 그들이 내 마음에 들게 생각하고 행동하게 강제할 아무런 자격이 없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것이 홍세화가 설명하는 프랑스식 똘레랑스와 얼마나 같고 틀린 지는 모르겠다. 다만 나 자신의 규칙과 행동원칙의 세부사항들을 보강하고 다듬는 데 이 책에서 매우 큰 도움을 받았다. 책의 어투는 낯설지만(우리 엄마보다 열 살이나 위인 아저씨가 90년대 문어체로 쓴 에세이이니까) 책의 어떤 생각은 여전히 매우 현재적임을 여러 번 느꼈다.


독재자가 되려는 인간을 동시대에 마주한 일이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그것이 이 책을 읽게 한 중요한 배경이었다. 물론 올해가 책이 나온 지 30주년이기도 하지만, 개정증보판을 지금 낸 데에도 그 사건이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읽으면서 개인적으로는 홍세화의 자기 해방 서사도 흥미로웠다. 망명자로서 생계에 대해 느꼈던 두려움과 무기력함으로부터의 해방. 그가 마침내 자신을 해방했다는 유월의 아름다운 새벽 파리의 길을 나는 어렴풋이 짐작한다. 그는 더 이상 울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다음에 파리를 가면 그 생각을 하며 그가 택시로 달렸다던 길들을 더듬어 볼 것이다. 우리는, 원하지 않는 방식이지만, 진정 원하던 읽고 쓰기를 참아내며 끝내 자신의 방법으로 생존해 냈다고 생각하며 그를 기릴 것이다. 파리의 거리에서.


이 책의 독자가 될 이유는 사실 너무 많았는데,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이유는 이모였다. 충북 단양 리 단위 어느 마을에 살던 이 세련된 젊은 여성의 방에는 이 책이 있었다. 그녀가 삼십 년 전 읽던 책이 궁금했다. 읽고 나니 다른 궁금증이 생긴다. 이모, 그때 이 책 읽고 무슨 생각했어? 다음에 만나면 물어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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