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택, 낫이라는 칼(2022), 문학과지성사
첫 시부터 탁월했다. <구석>은 있으면서도 없는 것 같은 공간, 후미진 공간으로 이 명사를 정의하면서 시작한다. 그러나 구석은 곧 안온한 곳, 마음 둘 장소로서 다른 의미를 부여받는다. 아기라는 존재의 등장을 통해서다. 무의미한 구석은 아기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로 가득 찬 풍부한 공간으로 변모한다. 무의미와 유의미. 쓸모없음과 쓸모. 작음과 충분히 큼. 논리적으로 대립하고 그러므로 상충하는 듯 보이는 이 같은 정의는 구석이라는 존재에 대한 엄연한 진실이고 이 둘은 시 안에서 모순 없이 양립한다. 물론 가중치는 진행방향을 따라 충만한 공간으로서의 구석에 있다. 상반되는 듯한 진실이 매듭도 없이 나란히 이어진 이 시적 장면을 나는 거의 마법 같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강아지가 꼬리를 흔드는 힘>에서 시인은 다른 방식의 확장을 보여준다. 아직 세계와 자아의 구분조차 명확하지 않은 강아지, 이 어린 생명체가 꼬리를 흔드는 힘은 제 몸을 벗어나 나무와 산, 강과 하늘에 이른다. 이렇게 증폭된 세계의 힘은 마침내 강아지 머리를 쓰다듬는 시적 화자의 몸을 관통한다. 어린 생물의 생명력은 거대한 자연을 뒤흔들고 인간 역시 그 에너지를 실감하는 것이다. 이 거대한 확장 서사의 과정에서 시가 뿜어내는 힘과 기운은 독자에게까지 손실 없이 전달된다.
나는 이 힘과 기운이 좋다. 두툼한 시집의 사분의 일을 읽었는데 지금까지 모든 시에 이 같은 에너지가 넘친다. 시인은 우리 안에 숨겨진 야생을(<야생 2>) 툭툭 건드려 깨우고 무심하고 무감각한 노인이 그 외피 안에 숨긴 말간 젊은이를 발견해 낸다 혹은 상상해 낸다(<위장>). 시들은 지리멸렬한 현대사회에 대한 폭로이기보다는 독자 내면에 잠복해 있는 활기와 생명력을 소생시키라는 일깨움이자 부름이다. 나는 현대 문명의 비극성과 난폭함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의 묘사를 넘어선 시인의 지향 속에서 오히려 더욱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인간의 힘을 재발견하게 된다. 나아감. 인간은 이 진보의 지향으로 어쨌거나 여기까지 온 것이다. 결과의 좋고 나쁨,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역사, 인간이 벌여 온 이 모든 난리법석은 그 움직임, 어디로든 한 발짝 나아가는 지향에서 일관된 것이다. 그 움직임의 역동은 현대인의 내면에서 멸종했을 리 없다. 비록 비극과 비관과 죽음으로 무심해진 두꺼운 지층 아래 묻혀 있다 해도 말이다. 이 시집 안에서 흔들어 깨우려는 것은 그 생명력일 것이다. 그 끈질긴 힘은 생물과 사물을 가리지 않고 뻗어나가고 터져 나온다.
시를 묵독하면서도 나는 선생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의 시 수업을 들은 일은 크나큰 행운이었다. 그가 고른 교재용 시들은 그렇게 힘이 있는 것, 생동하는 것들이었고 나는 비관과 절망, 무의미와 관조 전에 살아있음과 움직임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적어도 시의 세계에서만큼은.
대산문학상 수상작인 이 시집을 그러면서도 두려움에 오래 덮어두었었다. 선생에게 실망할까 두려웠고 시를 이해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계속 시를 써보라는 선생의 권유를 내 안에서 심폐소생하려는 지금, 이 시집은 얼마나 시의적절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