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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두부 Jan 09. 2021

[브라버꼬 산티아고] 나는 왜 그 먼길을 걷게 되었나?

- 성격유형과 스키마 분석에 관한 이야기 


나를 아프게 했던 건
유년 시절로부터 이어진 ‘버림받는 것에 대한 공포’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왜 이 길을 걷게 되었을까. 이별 때문만이었을까? 그러기엔 이 길을 걷기 전, 이미 용서를 하고 왔다(고 그땐 생각했지). 내가 헤어질 무렵, 나는 직업이 5개였다. 목표가 있었다. 돈을 모아야 한다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살 보금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또 그 돈을 밑천으로 우리의 것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매일 부유하는 나의 삶에 뿌리를 내리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영화 한 편, 책 한 권 읽을 수 없는 하루하루가 질려 버렸다. 밑천 없이 소진되고 있는 기분. 돈은 모이고 있었지만, 목표한 금액에 미치지 못하자 조급해졌다. 나이는 먹어 가는 데 뒤처진 느낌이 들고 불안했다. 그런데 그 불안에 대해 생각할 시간도 없이 눈앞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었다. 하루하루 소진되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돈을 모아야 한다는 목표 하나로 버텼다. 버티고 버티다 보면 금방 좋은 날이 올 거야. 연인에게 기대고 싶었지만, 그이는 내 외로움을 받아줄 만큼 마음이 넉넉한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의 우울만으로도 버티기 힘들고 괴로운 사람이었다. 속으로 혼자 우는 날이 많아졌다. 이 겨울만 버티면 봄이 온다고, 홀로 견디고 또 견뎠다.


하지만 인생은 알 수 없는 법. 돈을 모으던 목표가 더는 필요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삶을 버텨내던 이유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아마 그 자리에, 삶의 무의미함에, 공황이 찾아오지 않았을까.


의사 선생님은 내게 말했다. 나의 스키마는 너무 자기희생적이라고. 내가 너인지, 네가 나인지 모르고, 마치 그 사람을 나의 일부처럼 여겼기에, 모든 걸 타인에게 맞춰 살았기 때문에 지금 더 힘든 것이라고. 취미가 뭐냐고 묻는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분명 내 취미가 있었을 텐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떠오르는 것이라곤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일들 뿐이었다. 내가 사라졌던 것이다. 그것 보라고. 선생님은 산티아고에 잘 다녀오라고 하셨다. 가서 다시 자기를 찾고 싶어 다녀오는 것 아니냐면서 잘 다녀오라고 하셨다. 다녀온 후에 보자는 말씀과 함께.


스키마는 성격 구조와 같은 것이다. 나의 경우 '유기 불안성', '자기희생', '자책감', '보상 욕구' 순으로 높게 스키마가 나타났다. 선생님은 유기 불안성의 경우, 현재 이별로 인한 극심한 고통 때문에 가장 크게 발현된 것 같고, 아마 본래 성격이라면 '자기희생'과 '자책감'이 더 위에 올라올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유기 불안성이란 세상에 혼자 남겨지고 버려질 것 같은 두려움이다. 혼자가 된다는 두려움. 맞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불안감의 근원이다. 그리고 선생님은 내가 너무 헌신하고, 희생하는 바람에 고통도 더 크게 되는 거라고 말씀하셨다. 건강한 연애,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각자의 울타리가 있고, 내가 있는 다음에 너도 있다는 생각을 꼭 하라고 말씀해주셨다. 내가 있는 다음에 너도 있어야지 내가 너이고 네가 내가 되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 애한테 너무 나를 맞췄다. 아니, 맞췄다기보다 나는 그 애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그 애의 모든 것을 마치 내 것처럼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러다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는지도 잊어버렸다. 나는 늘 그 애가 좋아하는 곳으로 가고, 좋아하는 일들을 해주며 사랑받길 원했으니까. 선생님은 자기희생의 스키마가 큰 사람들은 일이 잘못되었을 때도 과도하게 자책을 하게 되고 그것이 자신을 심하게 아프게 한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희생을 통해 사랑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은 사실 마음 한구석에선 그것에 대해 보상 욕구가 생기는데 그게 수준이 맞지 않으면 또 아프게 되고, 이 모든 게 연결되어있다고 하셨다.


다음은 정신과에서 실제로 상담받은 상담기록의 일부다. 


선생님 : 본인의 스키마 가운데 유기 불안성이 크게 나와요.

나 : 그게 뭐죠?

선생님 :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만 같은 기분이요. 그리고 자기희생과 보상 욕구가 크죠. 이게 다 맞물리는 거예요. 자기를 희생하면서 인정받으려고 하고, 자기가 없어질 만큼 일에, 사람에 열중하죠. 그리고 그 열중한 일이 어그러졌을 때 극도로 홀로 된 것 같은 불안을 느끼는 거죠. 가고 싶은 회사 최종에서 떨어졌을 때도 많이 힘들었다고 했죠? 아마 그 회사도, 그 친구와도 본인의 이런 성격 구조로 인해서 더 크게 아픈 걸지 몰라요. 그런데 아마도 유기 불안성은 지금 헤어진 직후라 가장 크게 나타나는 것 같고, 어쩌면 본인의 가장 큰 스키마는 자기희생과 보상 욕구일지도 몰라요.

나 : 네... 그렇군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선생님 : 음, 일단 자기 스키마를 알고 있는 게 중요해요. 아,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그러니까 앞으로 누군가를 만날 때는 조금 더 울타리를 치려고 노력하고, 자기를 지키면서 만나야죠. 네가 너고, 네가 나인 게 좋은 관계인 건 아니에요. 서로 이웃집에 살면서도 얼마든지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거든요.

나 : 그런가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제가 썼던 일기 중에 그런 게 있었어요. 네가 나의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꼭 나의 어떤 일부처럼 느껴져서 팔인지, 다리인지, 검지 손가락인지 무엇인지 그건 잘 모르겠는데 꼭 일부처럼 느껴진다고. 그래서 우리가 뭔가 잘못되면 그때부터 내 하루는 멈춰버린다고. 그런데 그게 안 좋은 거였군요. 저는 일체감이 느껴지는 순간들이 좋았어요. 두 사람의 삶이 포개져 한 사람처럼 살아가는 기분이었거든요. 그럼 제가 완전해지는 기분이었어요. 제가 사라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중략) 


나 : 아참, 그 애가 새로 만나는 사람은 조울증이 있다던데 너무 걱정돼요. 괜찮은 걸까요?

선생님 : 좋지는 않죠……. 

나 : (한숨을 쉬며) 휴...

선생님 : 거 봐요. 지금 또 그 친구 생각하는 거잖아요. 본인만 생각해요. 지금은. 그 친구도 성인이잖아요. 어른이에요. 그 친구도 자기가 경험해 봐야 느끼고 배우고 성숙할 수 있어요. 말한다고 알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심리상담을 받았을 때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이랑도 비슷했다. 어렵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상담이 끝날 무렵 선생님은 잠시 알 수 없는 미소와 뜸을 들이다가 한마디 덧붙이셨다. 그런데 스키마라는 게 참,,, 알고 있어도,,, 그게 내 맘대로 잘 안돼요^^; 그 말을 듣고 나도 피식 웃어버렸다. 아, 선생님도 어쩔 수 없으시구나. 생긴 대로 살아야 하는구나. 이렇게 아플 줄 알지만 어느 순간 또 사랑에 홀랑 빠지고 나면, 정신없이 허우적거리다가, 또 아프겠구나. 문득 선생님의 스키마는 무엇일지 궁금해졌지만, 왠지 물어볼 수가 없었다. 


까미노를 걸으면서 드디어 떠오른 기억이 있다.
아참. 나는 배낭여행자로 살고 싶었지. 어린 시절 해적이 되겠다고 노래를 부른 적도 있었지. 그보다 더 어린 시절엔 방랑시인을 꿈꿨었지.
그래 맞아. 나는 이런 것들을 좋아했지.
그냥 그냥 맞추어 살다 보니 내가 좋아하던 걸 완전히 까먹었었구나.

요가를 하다 산티아고라는 단어가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우울을 극복하는 저마다의 방법에는 수백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나는 나를 되찾는 방법으로 무의식 중에 선택한 것이 바로 순례길이 아니었나 싶다. 그날 저녁, 요가 수업에서 요가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쁘게 자세 취하려고 하지 마세요. 예쁜 자세를 하려고 하는 것도 남을 의식하는 거예요. 지금 이 시간엔 아무도 신경 쓰지 마세요. 내 호흡에만 집중합니다. 내 호흡에만, 내 몸의 소리에만.



나를 되찾는 걸음걸음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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