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코로나 블루 : 리액션을 덮어버린 마스크
나는 코로나 시대를 잘 이겨내고 있는 사람 중 하나여야 했다.
왜냐면 일하거나 이동하는 중에는 마스크를 거의 벗지 않는데도 물리적으로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우울감의 원인 중 하나로 꼽는 해외여행 규제도 물론 가고야 싶지만 오히려 매년 의식처럼 행해 온 해외여행 대신 국내로만 촘촘히 여행을 다니며 색다른 만족감을 느꼈다. 주변에 아픈 사람 없이 이 시기를 잘 견뎌나가고 있는 내 일상이 이렇게 힘이 없는지. 마음 하나 가득 찬 느낌이 들지 않는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올해 웃음의 총량이 작년 대비 반절은 줄어들었다. 작년엔 분명 웃는 일이 많았다. 과장 없이 매일매일 웃는 일이 반드시 하나쯤 생겼다. 웃기는 게 있으면 웃고, 웃음소리가 들리면 또 웃고, 대화하는 사람이 눈웃음만 지어도 따라 웃는 나라서 하루 종일 웃는 게 어렵지 않았다.
작년만큼 행복한 일이 많았음에도 마스크를 쓰고나서부터 웃음이 없어졌다. 누군가의 웃음을 목격하며 덩달아 기분 좋아지는 일도, 누군가의 웃음을 카피해 따라 웃을 일도 사라졌다. 웃을 일이 생겨도 마스크를 쓴 채 웃는 일은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평생을 온 얼굴을 이용해 웃어온 나에게 눈과 소리로만 웃음을 표현하는 일은 제 아무리 웃어도 시원하지 않다.
나의 리액션도 함께 봉쇄당했다. 내가 당신에게 귀 기울이고 있어요. 내가 당신에게 공감하고 있어요. 내가 당신과 함께 웃어요. 나는 이 모든 문장들을 내 표정에 녹여내어 얼굴로 말했다. 나같이 얼굴로 대화하려 드는 사람은 다른 이의 표정에도 많이 의존하는 편이다. 상대방의 표정을 읽은 후에야 안정감을 느끼는 나는 코로나 이후 모든 대화가 불완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힘겨웠다. 나의 뜻이 100이라면 94는 잘려나간 것 같아서. 상대방의 6만 나에게 전달되는 거 같아서. 대화의 구멍을 메꾸는 데서 느껴지는 정신적인 피로감이 마스크의 갑갑함을 이겼다. 리액션이 나에게 이렇게 중요한 의미였는지 새삼 깨닫는다.
마스크를 낀 이후 턱이 계속 아프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안 보이는 표정을 삐죽거리며 마스크 밖으로 보이려 하다 보니 본능적으로 표정을 과장하고 있던 탓이다. 어서 빨리 마스크를 벗고 나의 100과 다른 이의 100을 담아 한바탕 신나게 웃고 대화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