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마주한 여행

여행, 묻다

by 샛별

요즘 대부분 새로운 곳에 가면 지역 서점을 방문하곤 한다. 지난해 아들을 만나러 가면서도 다른 나라에서 지역서점을 방문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관광을 위한 여행이 아니기에 늘 어딘가로 떠나기 전 챙기는, 가고 싶은 한 곳이 이번에는 저절로 책방으로 정해진 셈이다. 궁금해져 인터넷으로 내가 가는 도시를 중심으로 서점들을 찾아보았다. 방문할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좋아하는 몇몇 작가의 책에서 알게 된 한 서점이 있는 것이 아닌가. 대형 서점이 아님에도 자기만의 색깔을 지니고 오랜 기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근사한 서점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더구나 소도시에 자리 잡고 있음에도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책방이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다른 나라에서 그런 책방을 방문한다는 것은 얼마나 신선한 경험일까.

미국의 서점 여행기 “ 나의 아름다운 책방’에서 찾아볼 수 있는 초원의 빛 서점(Prairie Lights Books)은 세계국제창작프로그램이 열리는 도시에 있고 그 프로그램에 참가한 작가들이 모여 글을 낭독하는, 작가들이 매우 좋아하는 장소로 자주 언급 되었었다. 몇 달 동안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의 틀을 지닌 작가들이 모여 한 가지 공통점인 글쓰기를 하며 보내는, 작가의 말처럼 삶에서 의무감은 잊고 자유롭게 오로지 글쓰기로 보냈다는 시간. 왠지 세계의 젊은 작가들이 모여 글을 낭독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곳에는 작가들의 기운이 모여있을 것만 같았다. 책을 읽으며 상상 속의 장소를 기억 한 편에 담았다는 것은 언젠가 그곳에 가고 싶은 소망을 가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그곳에 가볼 가능성은 거의 희박했다. 기억에 남은 영화, 메릴 스트립과 크린트이스트 우드가 주연한 슬픈 운명의 사랑 이야기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본 푸른 아이오와 풍경과 겹쳐진 상상 속의 한 장소일 뿐이었다.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철없는 로맨티시스트의 꿈, 상상 속 장소를 가고 싶어 하는 엄마를 위해 아들이 바쁜 시간을 쪼개어 나를 그곳에 데려다주었다. 허둥대고, 할 수 있는 것이 적고, 그저 두려운 것만 많아진 노년의 내게, 말도 서툴고 대중교통도 편치 않은 곳에서 의지할 수 있는 이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초원의 빛 서점

내부정경(왼쪽 푸른 원통모양은 무료 글뽑기 기계)

낯선 언어가 들려오는 초원의 빛 서점의 이층 카페에 앉아 마치 그곳에 사는 사람인 양 가져간 책을 읽는다. 일이 바쁜 아들은 그새 컴퓨터를 열고 자신의 일을 하고 있고 금세 눈이 피곤해진 나는 책을 덮고 차근차근 책방을 둘러본다.

좋아하는 외국 작가의 책을 원서로 다시 읽어보고 싶은 적이 있었다. 글쓴이의 언어로 다시 만나보는 책은 느낌이 더 생생하게 다가왔기에 이번에도 서점을 방문한다면 최근 들어 알게 된 너무도 아끼고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방문 기념으로 살 계획이었다.

혼자서 부푼 마음을 안고 서가를 돌아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슬그머니 그곳에 서있는 내가 왠지 길을 잃은 아이가 된 느낌이다. 서가에서 만난 낯선 언어의 책들은 비록 제목들은 읽을 수 있더라도 영 와닿지 않았다. 그렇게 책들 사이를 기웃대다가 보니 마치 옷에 별 관심이 없는 내가 백화점 여성복 코너에서 화려한 옷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책이 관심 밖 물건들 같다. 책방에서 난생처음 느껴본 생경한 기분이었다.

늘 책이 가득한 책방에 들어서면 언제 어디에서나 편안함을 느꼈었는데...

어쩌면 그것은 당연하고도 이미 예견 가능한 것이었다. 내가 이곳에서도 내 나라에서처럼 책을 고를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게 된 것은 그간 읽어 온 수많은 외국 작가들의 책이 우리말에 맞게 번역되어 내게 왔으므로 깨닫지 못한 탓이다. 많은 이들의 수고가 있어 가능했던 것을 여행길의 들뜬 마음이 그것을 잊게 만든 것이다.

다른 언어의 벽 앞에서 서점 방문은 상상한 것과는 매우 달랐다. 하지만 마음 깊숙이 묻혀 있었던 먼 기억 속의 장소를 찾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고, 매우 좋아하는 작가의 책도 샀으며, 작가들의 기운이 스며있는 장소에서 그들의 시간을 상상하며 보낼 수 있었다. 또 그곳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커피를 마시며 오랜만에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아주 오래 기억하고 싶은 시간이었다.

그날 한 곳 만을 방문하는 것이 아쉬워서 우리는 시립도서관의 2층에 자리하고 있는 헌책방 한 곳과 시립도서관을 함께 돌아보기로 했다. 사이언스, 역사, 소설... 잘 분류된 시립 도서관의 서가를 둘러보다가 색다른, 여러 나라별로 책들이 분류되어 있는 코너를 만났다. 코너 한편에 많지는 않지만 몇 십 권의 우리 책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가의 수많은 책들 속 그곳에서 만난 한강, 박완서... 우리 책 코너만이 환한 스포트 라이트를 받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전 다른 책방에서 나를 당황하게 했던 느낌, 다른 언어로 쓰인 수많은 책들에게서는 느낄 수없었던 것, ‘땡큐 스타벅스’’여수의 사랑’’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 낡았어도 내 나라의 말들로 쓰인 책들은 펼치지 않아도 편안함과 다정함을 지닌 채 나를 바라보아 주고 있는 듯했다.

나는 마치 책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다.


시카고 미술관

그림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아들이 데려간 곳은 시카고미술관이었다. 그림들이 너무 많아서 하루에 다 보기에는 무리가 되기에 꼭 보고 싶은 것 위주로 보았더라면 보고 싶은 그림들을 더 오래 볼 수 있었겠지만 다양한 시대의 그림들을 차례로 보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하지만 차례대로 그림을 보다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인지했을 때는 많이 지쳤고 진짜 보고 싶었던 그림들이 있는 곳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기대했던 모네의 그림들은 생각만큼 많지 않아 아쉬웠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단지 색들의 모임으로 보이던 희미한 그림이 멀리 떨어져 바라볼 때 그 형상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그 그림을 책으로 볼 때는 깨닫지 못했던 신비한 것이어서 감탄을 하며 꽤 오랜 시간을 머물렀다.

아직 보아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았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아들이 깜짝 선물로 준비해 둔 특별전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어느 전시회에 다녀와 내가 사다가 걸었던 그림을 보고 꼭 보여주고 싶었다는 쿠스타브 카유보트( Gustave Caillebotte) 순회전 ‘Painting His World’로 시카고 미술관 대표 소장품이기도 한 ‘파리의 거리, 비 오는 날’의 화가인 카유보트의 회화, 드로잉, 사진들을 통해 그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전시였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화가이기보다 후원자나 컬렉터로서 더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는 인상파 동료작가들의 전시회에 자금을 대기도 하고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등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을 구매해서 동료들을 도왔고, 그 작품들은 사후 오르세미술관에 기증되어 인상주의의 발전과 보존에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어려운 살림살이가 아니어서 인지 그림뿐만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기까지 자잘한 그의 스케치며 사진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그의 생활환경,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 좋아하는 몇몇 그림만큼이나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완성작을 만들기 위하여 그림 속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수정한 스케치들이었다. 대작 속에 존재하는 남성을 그리기 위해 아주 미세하게 여러 번 그린 다수의 스케치들을 보며 진실로 노력하는 이로서 그가 인상 깊게 다가왔다. 그가 후원했던 가난한 화가들과는 달리 대작뿐만 아니라 자잘한 스케치들 까지 함께 남아있는 것은 그에게 큰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화가이기보다 천재화가들 곁에서 주변인으로 살았던 그가 오늘날 다른 인상파 인상파 작가들의 그림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굵직한 선을 지닌 저 그림들을 그리기 위해 얼마나 더 많은 노력을 했던 것일까.

좋아하는 모네의 그림만큼이나 내게 인상적으로 와닿는 그림을 보는 나의 마음속에, 불현듯 그의 스케치가 나의 메모장 속에 잠들어 있는 글들 인양 다가왔다.


여행 돌아보기: 첫 여행노트를 쓰며

새해가 지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저곳 몸에 이상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특히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눈이었다. 금세 피로해지는 눈 때문에 우선 책과 폰을 멀리해야 했다. 책을 펴면 5분을 버티지 못하고 덮는 날들이 쌓이면서 우울이 쌓이고 있었다. 읽는 일과 쓰는 일은 마치 한 묶음으로 엮인 듯 읽지 못하는 날이 길어질수록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한 움큼 꽉 쥔 모래가 순식간에 흘러내리듯 스르르 내게서 멀어져 갔다. 메모장 속에 적었던 순간순간 떠오르는 짧은 글들이 더 이상 글로 태어나지 못했다.

무기력하게 누워있기도 하고 애써 다시 일어서는 시간을 반복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다가온 노화의 증상을 받아들여야만 괴로운 시간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 힘으로 움직일 수 없는, 저물어가고 있는 희미한 남은 날들을 그려 본다. 남은 날들 중에 온전히 내 발로 씩씩하게 다닐 수 있는 날들은 얼마나 될까. 남들에게는 엄살처럼 느껴질 고작 눈의 아픔일 테지만 일상을 흔드는, 어찌할 수 없는 힘이 나에게 이제 그만 가까운 것을 보는 일에서 눈을 거두라고 말하고 있었다. 멀리 큰 것들을 바라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를 추스르기 위하여 집을 떠나 가까운 곳부터 자주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먼 여행, 아들을 만나러 미국으로 떠났다가 돌아온 참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와서 한 달 가까이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다. 그리움이, 내게 남아있는 희미한 시간 속 이루어질 우리들의 짧은 만남이 피부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여행노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여행의 기록 속에서 우리가 보낸 그 시간들이 사진 속에서 또 짧게나마 기록해 둔 글 속에서 다시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 주었다. 비로소 나는 그 시간의 나를 다시 돌아볼 수 있었다. 생생하게 그 자리에서 느낀 나의 생각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책이 물건처럼 느껴졌던 경험은 그나마 겨우 몇 페이지만이라도 읽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글로 쓰인 책들이, 남의 언어로 쓰인 글이라도 내 언어로 번역된 책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한 좋은 시간이었다. 마치 책을 처음 만나듯 한참을 서있던 순간의 나는, 아픈 눈 때문에 책을 읽는 일을 강제로 멀리하려 했던 몇 달 동안 겪었던 최소한의 독서에 대한 갈증, 그나마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며칠 동안 낯선 곳에서의 시간들, 최소한의 독서라도 가능한 안락한 내 공간에 대한 그리움이 한꺼번에 밀려든 탓일 것이다. 모네의 그림보다 더 강하게 남은 기억, 카유보트의 그림들을 바라보며 메모장의 글들을 떠올렸던 것은 글을 다시 쓰고 싶다는 강한 끌림 때문이었다. 메모장에 쌓인 글들을 다시 이어 나만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사그라들고 있던 소망을 일깨워 주는 것이었다.

여행노트를 완성하고 나서 아이들에게 편지를 썼다. 틈틈이 적어 둔 그날들의 풍경 속에서 진정 기억에 남는 것은 소소한 우리들의 일상, 그들과 함께 마주한 밥상, 담소를 나누며 함께 마시던 커피, 산책길, 말하지 않아도 우리들 사이를 흐르던 사랑이었노라고. 일생을 두고두고 아끼며 반추하고 싶은 시간을 선물해 주어 고맙다고. 사랑하는 사람과 꿈꾸던 장소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이루고 싶은 꿈이 담긴 책을 안고 돌아오게 되어 행복했다고.

우연히 본 책에서 나를 그곳에 가도록 끌어들인 힘은 어디에서 왔는가. 아직도 내게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는가. 내내 내 마음속에 머물던 글쓰기,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 것일까.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하며 낯선 땅에서 마주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 책과 글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던 힘들었던 시간은 나를 새로운 곳으로 떠나게 했고 내내 마음속에 남아있던 물음들을 나에게서 불러내어 주었다. 책을 읽다 어느 순간 마음속에 담았던 장소, 사고 싶었던 저자의 책, 그 모든 것은 내 마음속에 존재했던 쓰고 싶었던 글들에 다가가고 싶은 나의 소망과 닿아 있는 것이었다.

작은 꿈 하나를 다시 꾸어본다. 왠지 나는 그곳에 작은 등대 하나를 세워 두고 온 것만 같다. 앞으로 나의 시간이 어떻게 흐를지 내가 이룰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비록 희미하지만 먼 이국 오랜 서점에서 밝힌 등대의 불빛을 바라보며 느린 걸음으로 끝까지 헤매지 않고 묵묵히 걸어갈 수 있었으면.

스스로와 마주하며 바라본 그 시간들은 긴 시간 나를 힘들게 했던 아픔이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여행노트에 붙여둔 기계에서 뽑은 그날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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